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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97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97

 

우리 불자님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할 때 훌륭한 부처님 말씀인 경전을 공부하고 배우고 하지마는 그 전부가 다 우리한테 실천적으로 옮겨지지가 않습니다. 왜 그러는가 하면 스스로가 마음을 가다듬어서 마음을 통일시켜서 깊은 삼매라는 깊은 선정이라는 공부를 우리가 미처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비단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나 일반 사람들도 학문적으로는 많이 알고 있지마는 그것만으로 얼마만큼 우리 마음이 정화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금생에 우리가 잘못 산 때뿐만 아니라 과거 무수생 동안 나고 죽으면서 때묻어온 번뇌를 녹이기는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참다운 진리의 핵심 내용은 어떠한 것인가,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성불하신 내용은 여러분도 들어서 아시는 바와 같이 연기법(緣起法) 곧 인연법입니다.

 

인연법이라는 것은 간단한 것이지만 그 가운데 불교의 모든 진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인연법도 단순하게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식의 연기법은 하나의 상식적인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연기법인 것이고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참다운 연기법은 보다 더 심오한, 우주 모두를 다 포함시켜버리는, 해결해버리는 연기법입니다. 그것이 어떤 연기법인가? 명심해서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연기법 가운데에 부처님의 숭고한 가르침이 다 들어있습니다. 부처님의 근본사상인 대승적 연기법은 잘 생각하고 깊이 명심해야 알아들으실 수 있습니다.

 

연기법은 법계연기(法界緣起), 또는 진여연기(眞如緣起)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지마는 진여(眞如)는 참 진(), 같을 여()자입니다. 진리라는 말입니다. 일반 사람은 진리라 하지만 불교에서는 진여라고 합니다. 진여, 또는 진리란 우주의 생명 그대로의 여실하고 참다운 이치란 말입니다. 우주의 참다운 생명인 진여는 그냥 보통 이치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생동하는 생명인 점에서 진여불성, 부처 불()자 성품 성()자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고도 합니다. 진여는 보통 이치적으로 우주의 원리, 또는 우주의 도리라고도 하지마는 그 진리는 또 하나의 우주 생명이기 때문에 불성이라는 말을 합해서 진여불성이라고도 합니다.

 

연기법 가운데 진여연기는 대승적인 인연법입니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하면 우리 중생이 알고 모르고에 상관없이 진리라는 것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우주는 항시 그 진리, 즉 우주의 원리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창조하거나 또는 누가 우리한테 베풀어서 준 것이 아니라 우주에는 우리가 알고 모르고에 상관없이, 어떤 성자가 나오시고 안 나오고에 상관없이 우주의 진리는 항시 우주의 도리 그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 도리가 진여불성 또는 진여연기의 도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여연기라는 것은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이고 우주의 생명 존재를 그대로 말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도 진여불성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나 또는 삼계제천(三界諸天)의 욕계에 있는 천상이나 또는 우주에 충만해 있는 모든 보살들 또는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있는 부처님들도 모두가 다 진여불성 가운데에 들어 있습니다.

 

진여불성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봐서 한도 끝도 없이 유구한 생명체이고 또는 거기에 들어 있는 공덕상으로 봐서는 만공덕(萬功德)의 자리입니다. 그런 공덕이 들어 있는 자리, 자비로운 기운, 지혜로운 기운, 모두를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그런 공덕이 들어 있는 자리가 진여 불성자리입니다. 진여불성, 이것은 바로 우주의 생명인 것이고 또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아무리 미세한 것 속에도 다 진여불성이 들어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법성게(法性偈)를 외시는 분이 계시겠지요. 법성게 가운데는 하나 하나의 가운데에 전체가 들어 있고 또는 전체 가운데는 하나가 들어 있어 우주가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어떤 충돌이나 마찰이 없이 모두가 원만하게 갖추어 있습니다.

 

우리 중생은 겉만 보기 때문에 잘못 느끼지만 근본 자리에서 본다면 우주의 생명은 하나의 생명인데 하나의 생명 위에서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천차만별로 모양만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진여불성이라는 그 자리, 그 도리로 본다면 어느 것도 진여불성으로 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또는 곤충이나 병균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으로 돼 있습니다. 진여불성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 그런 차이만 있습니다.

 

진여불성 도리로 본다면 어느 것도 진여불성으로 되어 있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하나의 곤충이나 병균이든지 모두가 다 진여불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진여불성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차이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공부할 때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고 있습니다. 그 참선과 염불이 우리한테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부처님 법은 덮어놓고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으십니다. 부처님 법은 실제로 우리 몸에나 마음에도 유익하며 재미도 있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깊어지는 것입니다. 진리는 이론적으로만 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편안하고 또한 만공덕을 갖춘 자리가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 나아간 만큼 우리 행복도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은 만중생의 근본자리인 동시에 바로 우리 인간성의 본질입니다. 우리 인간이 고통스러워하는 원인은 자기 정체성, 자기 본질을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자기 본질을 왜 모르는 것인가, 그것은 허망한 것에다 자기를 묶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보고 거기에 매여버리기 때문에 자기를 구속시키고 자기 본질도 모르고, 자기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또한 불행하단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자기 몸만 두고 볼 때도 이 몸뚱이가 개인에게는 중요하지만 사실은 이런 몸뚱이가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실이 아닌 몸뚱이 하나를 잘 간수하고 꾸미기 위해서 남과 싸우고 턱없는 욕심을 내고 더러는 남을 죽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이 모두가 자기 몸뚱이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기몸뚱이는 어떠한 것인가. 몸뚱이를 바로 안다면 허망한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은 우리 몸뚱이나 눈에 보이는 모두가 다 허망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중생은 허망한 것을, 있지 않는 것을 허망한 줄을 모릅니다. 실제로 이 몸뚱이가, 그야말로 자기 금쪽같은 몸뚱이가 과거나 현재는 물론 죽어서까지 이 몸뚱이 그대로 가지고 간다고 몽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만 보더라도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럴 수 없는 문제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 중생입니다.

 

몸뚱이, 이것은 인연생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해서 지금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뚱이나 만유가 다 변화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모두가 실존적으로 있지가 않습니다.

 

우리 몸뚱이 이것은 우리 중생이 생각하는 것 같이 있지 않습니다. 무상한 환상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제법공(諸法空)이라, 또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말씀이 불교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부처님께서 비유로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로 비었으니까 비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공이니까 공이라 하신 것입니다. 정말로 공인 것입니다.

 

* 하동 쌍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