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95
1. 부처님께서 맨 처음에 탄생하실 때 말씀하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것은 불교인들은 다 알지 않습니까?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이것을 풀이하면 하늘 위에나 하늘 아래, 다시 말하자면 천지우주 전체에 있어서 나 홀로 존엄하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나’ 라고 하는 것은 망녕된 나(妄我)라든가 개인적인 나(個我)인 이른바 소아(小我0는 아닙니다. 참 진(眞)자 나 아(我)자 진아(眞我), 또는 큰 대(大)자 나 아(我)자, 이른바 대아(大我)입니다. 말하자면 참 사람, 참 존재를 말하는 것이지요. 우리 중생들 차원에서는 상대유한적인 문제만 생각하고 따지고 하지 않습니까. 깨달은 성자의 분상에서는 상대유한적인 그런 경계를 떠나서 절대적인, 불교 말로 하면 이른바 성품자리에서 말씀을 하십니다.
비단 석가모니 부처님 뿐만 아니라 공자 노자 예수 등 모든 성인들은 다 성품자리에서 생각하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품 자리를 깨달으면 그때는 나와 남의 차별도 없고 내 종교 네 종교, 내 민족 네 민족하는 그런 분별시비를 다 떠나버립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주를 온통 하나의 생명으로 본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자타시비하고 있지요. 때문에 우리 중생들이 보이는대로 말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들은 이른바 삼독심(三毒心)이라, 탐욕심이나 분노하는 마음, 또는 어리석은 마음을 완전히 여의지 못했습니다. 이른바 때묻은 그런 마음이 우리 중생들 마음입니다. 상대적인 그런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중생이란 존재는 우주의 진상을 바로 보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성자에 한해서만 우주의 참모습을 온전히 봅니다.
그래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부처님께서 깨달은 대아·진아, 이른바 참사람, 그런 경계에서 보면 우주는 참사람뿐이고 참 진리뿐이지 다른 것은 없습니다. 때묻은 눈으로 봐야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밉다 사랑한다, 그러는 것이지 영원적인 차원, 절대 근원적인 차원에서 볼때는 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뿐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생명 자리를 깨달으면 성자고 하나의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맨 처음에 오직 세상에는 하나의 생명뿐이다, 하나의 진리뿐이다, 우주자체가 바로 하나의 생명덩어리다, 이렇게 선언하신 것이지요. 천상천하유아독존은 따지고 보면 가장 위대하고 심오한 인권선언인 동시에 해방선언입니다.
2. 우리가 그냥 생각할 때, 나한테 진리가 없는데 진리를 구한다, 그렇게 상식적으로 생각하기가 쉽지 않습니까? 그러나 불교의 대승적인 차원에서 생각할 때는 나한테 이미 진리는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눈으로 보면 천지우주가 본래로 다 부처란 말입니다. 부처님 성품이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아닙니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진여불성(眞如佛性) 그럽니다. 모든 진리와 생명을 다 갖추고 있으니까요.
다만 그런 소중한 보배를 우리 중생이 미처 깨닫지를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마음이나 우리 마음이나 예수님 마음이나 성품공덕은 똑같습니다. 우리 스스로 미워하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욕심부리는 그런 마음 때문에 나한테 생생하게 약동하고 있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차이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방금 회장님 말씀마따나 어느 누구든 그런 쪽으로 영생 해탈을 구하고 고통이 없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마음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같은 분도 인간은 그런 쪽으로 유한자가 무한을 구하는, 또는 한정된 자가 영생을 구하는 마음을 본래 갖추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진여불성의 자리, 성자의 자리를 얻지 못하면 참다운 행복은 없습니다. 우리 중생계에 있어서는 상대적인 행복뿐인 것이지 절대적인 행복은 없습니다. 절대적인 행복은 모든 고난을 해탈해버린 참다운 자유인인 성자의 경계에만 있습니다.
그러면 그 행복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이른바 수행론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종교나 철학에 있어서 근원적인 본체론이 있으면 또 본체를 증명하기 위한 방법적인 수행론이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도 역시 근원적인 것을 우리가 인식할 때 올바른 수행론이 나옵니다. 우리가 원래는 완전무결한 만덕을 갖춘 진여불성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과거세에 지은 나쁜 업(業) 때문입니다. 이른바 업이라는 사상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인도말로 하면 카르마라고 하는 것인데 업이라는 것이 어째 중요한 사상인가 하면 우리가 금생에 사람으로 태어나고 또는 개로 태어나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우리가 과거세에 지은 업 때문에 그럽니다. 또 미래 역시 현재 우리가 뭘 생각하는가,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 지은 업으로 미래를 받습니다.
본래는 모두가 다 하나의 완전무결한 즉 말하자면 부처님 생명, 불성뿐이고 그야말로 원만한 만덕을 갖춘 생명인 것인데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 스스로 진리를 보지 못하고 업을 짓기 때문에 그럽니다. 그래서 과거전생에 업을 잘 지었으면 분명히 존재하는 천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만 긍정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천상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천상도 과거전생의 업따라서 욕계천상 또는 욕심을 다 떠나버린 색계천상, 또 모든 물질을 떠나버린 무색계천상, 그렇습니다. 우리가 과거전생에 업으로 해서 그렇게 태어난 것만 생각할 때는 불교는 숙명론이 되겠지요. 그러나 불교는 절대로 숙명론이 아니라 과거 전생에 우리가 업을 잘못 지었으면 금생에 업의 과보로 해서 우리가 고통도 받지만 또 지금 현재 이 순간부터서 우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올바른 행동을 하면 그때는 그야말로 업을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는 숙명론이지만 현재부터 미래까지는 업을 해탈하는, 즉 말하자면 그야말로 자유무애(自由無碍)한 위대한 존재라고 볼 수가 있지요.
3. 저는 큰스승은 못됩니다. 하나의 수행자로서 부처님 법을 깨달으려고 애쓰는 한낱 구도자, 수행자일뿐입니다. 염불선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일본사람, 다나베하지메란 분이 있어요. 그이는 일본 ‘니시다철학’의 체계를 세운 위대한 분입니다. 그래서 일본철학이 세계적으로 좋은 손색없는 철학으로 발돋움한 것입니다. ‘니시다철학(일명 京都철학)’은 니시다기타로(西田幾多郞)라는 분이 맨 처음에 창도를 했고 다나베하지메란 분이 체계를 보다 더 안정시킨 분입니다마는 그분이 한 말이 있어요. 그분은 철학도기 때문에 염불이나 그런 것과는 거리가 있다고 볼 수도 있지요.
논리적인 것을 주로 하기 때문에. 그러나 그 분 말씀이 일본불교는 염불선이 아니면 재생의 약동을 얻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다나베하지메란 그 분의 철학서가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논리적이기 때문에 아주 그야말로 참 까다롭고 또 그것이 논리전개가 너무나 번쇄(煩瑣)해놔서 알아먹기도 어렵고 해서 사람들은 잘 안보려고 하는데 저는 인연이 닿아서 접하게 되었지요. 다나베하지메라는 그이가 낸 책중에 철학통론이란 것이 있어요. 철학개론이 아니라 철학통론이라는 책인데 까다롭지만 까다로운 가운데서 논리가 명석하기 때문에 저는 여러번 봤습니다.
그런데 불교인도 아닌 순수철학도가 일본불교가 재생의 힘을 얻으려면 염불선을 떠나서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이 분은 아마 깊은 명상을 통해서 이런 생각을 했겠지요. 사실 이 염불선이란 문제는 제가 창도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부터서 흘러나온 것인데 사람들이 소홀히 했습니다. 소홀히 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불교의 역사를 살펴볼 때 중국 당나라 때까지는 그렇게 분열이 많이 안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송나라 때 분열이 아주 심했어요. 화두선(話頭禪)이 생기고 잠자코 명상을 주로 하는 묵조선(黙照禪)이 생기고 또는 염불선(念佛禪)이 생긴 것은 다 송나라 때였습니다. 그 전까지는 우리가 본래 부처인 바로 부처님 자리에 마음을 두고 추구하였습니다. 설사 명상한다 하더라도 부처님에 대한 명상이었습니다.
송나라때 묵조선을 한 분은 천동정각(天童正覺, 1091~1157)이라는 스님이지요. 그리고 화두를 정형화시킨 분은 이른바 대혜종고(大慧宗杲,1088~1163)라는 스님인데 두 분은 친한 친구예요. 친한 도반입니다. 한 예로 천동정각스님이 열반에 드셨을 때 화두파인 대혜스님이 호상(護喪)이 되어가지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러니까 그 분들 사이에는 이것이든 저것이든간에 예각(銳角)적인 대립이 없었습니다. 묵조선이든 화두선이든 염불선이든 그것은 다만 하나의 경향일 뿐입니다. 그 후에 대혜종고파가 따로 생기고 천동정각파가 생겨가지고서 묵조선이다, 화두선이다, 해가지고 뒷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싸우고 종파가 생기고 그런 것입니다.
한국도 지금 불교 종파가 오십종파가 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모두가 다 대의명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걸 그런 자리에서 보면 다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근원을 깨달아야 올바른 것이 될 터인데 근원을 무시하고서 그냥 지엽적인 문제를 가지고 시야비야하니까 문제가 생기고 공부도 안되는 것입니다. 염불선 문제는 사실 부처님 당시부터 내려온 것이지요. 화엄경을 보나 법화경을 보나 능엄경을 보나 대승경전은 염불 말씀을 한군데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능엄경(楞嚴經)은 선수(禪髓)라고 그럽니다. 그야말로 참선의 정수라는 경이 능엄경인데 능엄경에 있는 그 말씀도 염불에 관한 것입니다. 억불염불현전당래필정견불(憶佛念佛現前當來必定見佛)이라,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이름을 외고 공부하는 것은 현전에나 당세에나 반드시 부처를 성취한다 그말입니다. 참선의 정수같은 수능엄경에서 그렇게 말씀했어요. 또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는 염불행자인중분다리화(念佛行者人中芬陀利華)라, 염불하는 사람은 사람가운데서 가장 향기로운 연꽃이나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관음세지위기승우(觀音勢至爲其勝友)라, 관세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이 그런 염불하는 사람을 가장 좋은 벗으로 여긴단 말입니다.
염불이란 뜻이 무엇입니까? 생각할 염(念)자 부처 불(佛)자 아닙니까. 우리 본래가 부처고 바른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인데 부처를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무슨 방편공부가 될 수가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교의 가장 정수라고 볼 수 있지요.
달마대사를 비롯하여 이조 혜가스님, 삼조 승찬스님, 사조 도신스님, 오조 홍인스님, 육조 혜능스님으로 이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삼조 승찬스님 때까지는 일정하게 공부하는 처소가 없이 그냥 탁발을 주로 하고 이른바 고행을 주로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조 도신스님때 이르러 비로소 오백명 칠백명씩 모여서 집단적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사조 도신스님때 집단적으로 안주해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도신스님은 아주 저술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도신스님이 저술한 법문이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입니다. 그런데 입도안심요방편법문이란 것은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란 책에 나와 있는 것인데 결국은 철저한 염불입니다.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의 일상삼매라, 천지우주가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 하나의 생명에다 마음을 두는 것이 이른바 염불이지요. 부처란 개념가운데는 천지우주가 다 들어갑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자타시비, 그런 것이 있지만 근본적인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또 하나의 생명, 그럴 때는 내 마음과 부처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화엄경에도 있는 바와 같이 심불중생삼무차별(心佛衆生三無差別)이라[야마천궁보살설게품], 우리 마음이나 또는 부처나 또는 중생이나 차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차별로 보는 것이지 깨달은 분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하나의 부처님으로 본단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그대로 부처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하느님 아님이 없습니다.
이렇게 천지우주를 깨달은 분상에서 바로 파악하고 지장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그때는 다 염불선이지요. 오! 주여, 해도 결국은 표현만 다르지 그것은 하나의 염불선입니다. 우주가 하느님뿐이고 하느님 아닌 것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진리의 본체를 여의지 않으면 그때는 그것이 참다운 염불이고 참다운 참선이 되지요. 그러나 본체를 여의고 대상적으로 부처님을 설정하고 하는 염불은 방편염불이고 타력염불입니다. 모든 것이 다 부처 아님이 없다는 본체론적인 입장에서 진여불성을 여의지 않으면 그것은 참다운 염불인 동시에 바로 염불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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