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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93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93

 

금타선사의 가르침(4)

 

보리방편문은 육조단경의 수행론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십년 전 쯤, 제가 태안사에 있을 때는 금타선사의 그런 보리방편문이 육조단경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고 미처 몰랐어요. 몰랐는데 그 뒤에 여러 가지 경험이라든가 또는 나름대로 명상도 하고 해서 나중에 보리방편문이 육조스님의 수행법을 그대로 말씀한 법문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육조 혜능스님께서 가신 지가 13백년이 됐는데 육조 혜능스님 법을 그대로 계승한 분이 역시 금타선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제 말씀을 들으시고 육조단경을 다시 보시고서 육조단경 가운데 귀의삼신불(歸依三身佛)이라는 대목과 금강심론의 보리방편문 대목을 대조해 보시면 과연 그렇구나, 생각이 되실 것입니다.

 

금타선사님이 성자가 아니라고 생각해 버리면 그때는 할 수가 없지요. 믿음이란 것은 자유인 것이니까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천안통을 했다는 생각이 들고 분명히 누진통을 했다고 생각이 들고 또 맨 처음에 깨달을 때 나오는 숙명통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분명히 도인이지요. 도인의 증거로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말씀드렸지만 우선 삼명통은 꼭 해야 비로소 참다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숙명통은 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까지도 포함해서, 무시이래의 무수만생동안의 과거를 다 아는 지혜입니다. 천안통은 미래를 포함해 우주의 모든 존재를 그냥 투시해 다 아는 것입니다. 누진통은 우리 번뇌를 없애는 수행 방법을 모두 다 통달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든지 깨달았다고 하면 틀림없이 그와 같이 숙명통이 나오고 또는 천안통이 나오고 누진통이 나와야 이른바 참다운 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짓도인은 어떻게 될래야 될 수가 없습니다. 증거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달마스님이나 육조 혜능스님이나 또는 금타선사나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이나 똑같습니다.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집착해서 미처 공부를 안해서 깨닫지 못할 뿐이지 깨닫지 못한 단계에도 마음의 역량은, 성품은 똑같습니다. 결국 상에 있어서만 우리가 미처 못닦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지금 닦아나가는 과정, 이른바 위차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금강심론에 있는 16해탈지(解脫地)입니다. 16단계로 위차를 밟아서 가는 것인데 16해탈지 이것은 어느 한가지 경론만 참고로 한 것이 아니라 유심론 또는 화엄경, 대승, 소승, 밀교, 현교 모든 경론을 다 망라해서 16단계로 차서를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다른 유심론을 보나 무엇을 보나 그런 경론에는 경론대로해서 수행하는 단계가 있어요. 그러나 이런 것을 다 망라했을 뿐만 아니라 인용하고 체계를 세워놨기 때문에 16해탈지를 본다고 생각할 때는 결국은 다른 경론에 있는 수행론까지도 충분히 다 참고로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수영을 배울 때 물에 가서 배워야지 육지에서 수영을 배우면 제대로 배울 수가 없듯이 참선도 실제로 닦아야 됩니다. 자기가 느끼고 닦고 그래야 납득이 될 문제 아닙니까? 명상 가운데 최상명상이 참선아닙니까? 참선에 들어가려고 하면 쉽지가 않아요. 이른바 사선근(四善根)이라, 사선근을 다른 말로 하면 사가행(四加行) 그래요. 사선근은 사선정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닦는 것입니다. 우리 범부는 사선정에 그냥 비약적으로 막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점점 닦아가다가 어느 정도 기초가 되어야 사선정에 들어갑니다. 사선정(四禪定)사공정(四空定)멸진정(滅盡定)이것을 구차제정(九次第定)이라, 이 아홉 단계의 선을 기본선 또는 근본선이라고 그럽니다.

 

우리 신심이 사무치면, 우리 마음이란 것은 언제나 비약할 수가 있어요. 바이블을 보면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그대들에게 조금도 빈틈없는 신앙심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죽은 사람들한테 󰡐그대, 꼭 살아나라󰡑그러면 살아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사실 자기가 증명을 다 했어요. 마리아의 동생 라자로가 죽었는데 죽어서 파묻어서 사흘이나 됐는데 예수님이 어디 갔다오니까 마리아가 아주 간청을 해요 󰡒주여, 제 동생이 죽었으니 꼭 살려달라󰡓고 말입니다. 죽은 사람을 어떻게 살릴 것입니까마는 예수님은 그 무덤앞에 가서 한참동안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하고 자기의 마음이 조금도 빈틈없게 말착하는 그런 순수한 기도가 되었겠지요.

 

그렇게 모셔가지고 장엄한 음성으로󰡒라자로야, 일어나라󰡓그렇게 몇 번 하니까 라자로가 정말로 몸이 묶인 채로 벌떡 일어났단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묶은 끈도 다 끊어져 걸어갔다는 것이 기록에 있습니다. 일반사람들은 󰡐저런 것은 단순히 하나의 기적으로 과시한 것이다󰡑이렇게 그냥 쉽게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가 정말로 신앙심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조금도 빈틈없이 자기가 온전히 진여불성이 되었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기적을 충분히 부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 행하신 신통묘지가 얼마나 많습니까? 부처님께서 그냥 우리한테 방편으로 보이기 위해서 그렇다,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마는 그렇지가 않아요.

 

우리의 본성품인 진여불성이라는 것은 만능의 자리입니다. 모두들 다 할 수 있고 모두들 다 알 수 가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렁저렁한 것이 아닙니다. 명문학교도 안나오고 또 비록 깊은 명상을 안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내재해 있는 능력은 결국은 석가모니나 예수나 똑같습니다. 어느 순간도 우리는 비약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제자 앙굴리마라는 999인이나 죽인 잔인무도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만 죽여도 그것이 무시무시한 업장인데 999명이나 죽였어도 석가모니 부처님 만나가지고서 마음 돌이키니까 아라한과를 성취했습니다. 아라한과는 도인(道人)입니다.

 

불교는 그와 같이 어느 순간 비약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못살았다 하더라도 지금 딱 마음을 바로 먹고서 스스로 󰡐지금 내 마음이 석가모니 마음이나 예수 마음이나 공자 마음이나 다 똑같은 마음이다, 진여불성이다, 청정무비한 본래면목이다󰡑이렇게 온전히 백 프로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무엇이든 다하는 것입니다. 신통도 부리고, 또는 모르는 것도 없고 말입니다. 현대는 원자력시대 아닙니까? 원자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컴퓨터나 뭐나 참 기기묘묘한 재주를 부리지 않습니까? 그런것도 모두가 따지고 보면 밑에 가서는 다 진여불성이에요. 천지우주에 진여불성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가장 바른 견해, 가장 행복스런 견해, 옳은 견해는 무엇인가 하면 어느 것도 모두다 부처로 봐야된단 말입니다. 자가 아내를 봐도 아내이기 이전에 다 부처님이고 말입니다. 부처님이 잠시간 인연따라서 아내라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친구를 보나 누구를 보나 아무리 미워하는 사람도 똑같이 결국은 조금도 어김없는 부처입니다. 그렇게 봐야 참다운 정견(正見)입니다. 그렇게 보지를 못하는 것은 다 사견(私見)이에요.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같은 것입니다.

 

부처님 법은 우리 마음을 편안히 하는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부처님 법은 조금도 우리를 그늘지게 하지 않습니다. 모두 다 부처님 얼굴같이 원만한 법문입니다.

 

이른바 참선해서 깨닫는 방법이, 구차제정(九次第定)입니다. 아홉차원인데 이것은 사선정(四禪定)사공정(四空定)멸진정(滅盡定) 그래요. 사선정은 네 차원의 그런 선정에 드는 것이고 사공정은 그보다도 한 차원 더 높여서 무색계를 관조하는 삼매입니다. 멸진정은 우리 범부중생의 번뇌를 모조리 다 없애는 그런 참선입니다. 멸진정이 되어야 비로소 우리가 참다운 성자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금생에 그렁저렁 하다보면, 저와같이 80세가 되면 그야말로 처량하지요. 80이란 참 무서운 나이입니다. 무서운 나이지만 부처님께서 80세에 가셨고 제가 존중하는 그리스 철인인 플라톤도 그 나이에 갔어요. 또 인광대사라고, 중국의 위대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도 80세에 가셨고 해서 내가 그분들 나이에 가게 되면 영광이요 한편으론 내가 참회가 되겠구나, 그렇게 자기 위안도 합니다. 그런데 그 인광대사는 인격이 굉장히 고매하신 분입니다. 그이는 계행도 아주 청정하고 모두를 다 중생을 위해서 회향하신 자기 이름을 상참괴승(常慙愧僧)이라, 그러니까 항상 자기를 부끄러워하고 뉘우치고 그런 중이라는 뜻이지요.

 

부처님 법문은 누구나가 다 그대로만 닦으면 꼭 되는 것입니다. 제대로 닦지를 못하니까 지금까지도 확철대오 못하고 범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간단명료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정견그대로 살면 됩니다.

 

기독교인들 같으면 마땅히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하느님 아님이 없다는 그런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일반 신도들한테 󰡒너희들은 저 하늘에 계시는 주님같이 사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되어라󰡓고 말씀했습니다. 온전한 사람은 무엇인가, 진리에 맞는 진리 그대로 사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입니다..

 

공자의 논어에도 소중한 말씀이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성자의 말이란 것은 모두가 다 옳습니다. 우리 중생의 작은 지식가지고서 그런 성자를 함부로 논해서는 안됩니다. 성자들은 우선 진리를 바로 깨달은 분들이니까 그때그때 사정따라서 다르게 표현이 됐다하더라도 우선 저분들 말씀은 다 옳거니, 이렇게 전제를 해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해서 불교만이 최상인 것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면 이것도 한가지 법집(法執)입니다.

 

우리 수행법도 그래요. 염불한 사람들은 염불만 최고고 다른 것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부처님께서나 성인들, 조사스님들께서 말씀한 수행법은 다 옳습니다. 화두공안을 의심하는 것이나 또는 묵조하는 것이나 염불이나 다 옳습니다. 다만 그 마음태도가 문제입니다.

 

어떻게 문제가 되는가 하면 가령 우리가 화두공안을 의심한다고 하면 그 부처님 도리, 불성(佛性) 떠나지 않아야 참다운 공안이라 말입니다. 가령 󰡐이뭐꼬󰡑라든가 또는 󰡐()󰡑자라든가 그 원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부처님 도리에다 진여불성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두고서 불성을 찾는 방편으로 해서 󰡐이뭐꼬󰡑가 생기고 󰡐󰡑자가 생깁니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을 찾기 위해서 그때그때 편의적으로 나온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령 염불선을 갖다가 부처님 당시에나 그 뒤에는 별로 없던 것을 청화가 만들었다든가 그래버리면 그것이 큰 탈이지요. 저같은 사람은 그런 무슨 󰡐하나의 선󰡑을 만들만큼 그렇게 출중한 사람이 아닙니다.

 

염불선이란 것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육조혜능스님 선법이 바로 염불선입니다. 또 사조 도신스님 수행법이 바로 염불선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진여불성을 안떠나고서 염불하면 다 염불선입니다. 여러분들이 지장보살을 외고 또는 관세음보살을 염하시고 한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의 본체, 우주의 본바탕자리인 불성을 떠나지 않으면 그것 모두가 참다운 염불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