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96
우리 불자님들은 이러한 눈에 안보이는 도리에 관해서 깊이 명심하셔야 됩니다.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이나 무슨 경전이나 눈에 안보이는 성품의 도리를 말씀했습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모든 눈에 보이는 것은 다 꿈이나 허깨비나 그림자나 같은 것이다, 이렇게 여실히 철저히 봄으로써 비로소 즉견여래라, 부처님을 안단 말입니다.
부처님이란 것은 바로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모든 뜻도 모두가 다 그런 뜻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겉만 보고,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느끼고 집착하니까 하나의 생명을 못보는 것입니다. 모든 집착을 풀어버리고 살아야지 못 풀면 인생은 고난밖에 안됩니다. 자기 몸밖에 모르고 물질만 생각할 때 그 가운데서 작은 싸움도 큰 전쟁도 일어납니다. 참답게 바른 도리를 안다면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근본적인 성품으로 봐서는 너나 나나 다 하나의 성품인데 어떻게 자기만을 위해서 다른 존재나 다른 사람을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고난이나 부조리나 고통은 성품을 잘 몰라서 생깁니다. 즉 겉만 알고 참된 생명의 바른 도리를 몰라서 생깁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특히 불교인들이 할 일은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허망한 것을 허망한 것으로 알고 모두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이나 ‘참말로 있는 것은 진여불성 뿐이다’라고 아셔야 합니다. 진여불성, 이것은 바로 우주생명의 빛입니다. 우주라는 것은 부처님의 빛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공부하시는 나무아미타불은 바로 우주의 생명의 빛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불은 다른 말로 하면 무량광불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광명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아미타불은 바로 무량광불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불경에는 “아미타불을 부르는 염불수행자는 사람 가운데서 향기로운 꽃이다(念佛修行者 是人中芬陀利華),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생명의 광명인 우주생명인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또는 다른 부처님 이름이나 다 똑같지만 특히 아미타불은 광명의 상징인 생명이란 말입니다.
염불수행자는 그런 향기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이 위기승우(觀音勢至爲其勝友)라, 그 위대한 보살들이 아주 훌륭한 도반으로 안단 말입니다. 벗이 된단 말입니다. 얼마나 그것이 존중스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보통사람이 벗이 되어도 좋고 공부 잘하고 총명한 사람의 벗이 되어도 축복된 일인데 하물며 대우주의 자비의 상징인 관세음보살이나 우주의 지혜의 상징인 대세지보살이나 그런 대보살들이 우리의 도반이 된다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축복된 일이겠습니까?
또 능엄경은 참선할 때도 꼭 참고로 해야할 훌륭한 경전입니다. 이 능엄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약중생심(若衆生心) 억불염불(憶佛念佛) 현전당래(現前當來) 필정견불(必定見佛)”이라는 법문이 있습니다. 만약 중생이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 이름(명호)를 왼다면 살아서 현생에라든가 죽은 뒤에라도 틀림없이 부처님을 뵙는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본래 생명은 본래 부처입니다. 부처님은 어디에 있고 어디에 없고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나 우리 몸 속에나 우주 가운데 어디에서나 조그마한 티끌 속에도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껍데기, 겉만 보니까 모르는 것인데 그 실상(實相) 성품(性品)으로 본다면 우주는 모두가 다 부처님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맑아지고 우리 마음이 보다 더 근원적으로 깊어지면 깊어진 만큼 부처님과 가까이 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성인은 별종이 아닙니다. 같은 사람인데 마음이 깊어지고 맑아져서 본래의 생명을 깨달은 분이 성인입니다. 따라서 성인은 특별한 사람만 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성인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금생에 태어난 것은 다른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성인이 되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알고 보면 누구나가 꼭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금생의 목적도 성인이 되는 데에 있습니다. 지위가 높고 돈을 많이 벌고 하는 것은 하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다운 목적은 인격의 완성입니다. 앞서 능엄경 말씀을 다시 한번 외겠습니다. 약중생심(若衆生心) 억불염불(憶佛念佛)이라, 만약 중생의 마음에 부처님을 기억하고 잊지 않고 염불이나 부처님 이름을 외고 한다면, 현전당래(現前當來) 필정견불(必定見佛)이라, 반드시 부처를 뵙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가 어떻게 부처를 뵈올 것인가. 부처님은 하나의 우주의 생명인 동시에 우주의 빛이란 말입니다. 어디에 고유하게 고정되어 계신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공부를 부지런히 하면 틀림없이 부처님의 광명을 훤히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염불하는 가운데도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라, 부처님을 생각하고 생각하고 하다보면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라, 부처님이 우주의 어디에나 계시는 부처님의 광명이 훤히 보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미처 성자는 온전히 못된다 하더라도 정말로 부처님 공부를 많이 한 분들은 그때그때 순간적으로 부처님의 광명을 다 보는 것입니다. 불경 가운데도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이 있습니다. 반주삼매경은 무슨 경인가 하면 부처님이 훤히 자기 앞에 나타나 계시는 경입니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반주란 것은 인도말인데 음역하면 부처 불[佛]자 설 립[立]자, 부처님이 훤히 나타나 서서 보인단 말입니다. 다만 부처님의 광명만 보일 뿐 아니라 부처님 자리란 만능의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바란다면 신통자재(神通自在)한 자리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모양으로 모두가 보일 수도 있고 부처님이 하나하나 천만 백만 수 십억의 부처님 모양으로도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교는 또는 부처님 진리는 그렇게 신비부사의(神秘不思議)한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하는 그런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다만 우리 마음이 얕아서 중생들은 없는 것을 억지로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모양이 있는 가운데서는 참다운 행복은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 중생은 그런 것을 전도(顚倒)하고 거꾸로 본단 말입니다.
불교인들은 결단을 내려야 됩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만 이것이다, 저것이다 알아서는 우리한테 행복이 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다운 신앙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서운 윤리적인 결단을 해서 우리 스스로 깊은 명상에 잠겨야 합니다.
억불염불(憶佛念佛) 현전당래(現前當來) 필정견불(必定見佛)이라, 이것도 그냥 한번 두번으로 그냥 금생이나 내생으로 해서 부처님을 훤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 해서 깊은 명상에 든단 말입니다. 명상에 들어야 금생이나 전생에 지은 번뇌가 녹아서 녹아지면 맑은 거울에 모양이 제대로 비춰오듯이 비춰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역시 꼭 거울이나 똑같습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 때묻어 있는 것인데 무엇에 때묻어 있느냐 하면 자기라는 지독스런 관념 때문에 그것이 고집이 되어서 지나친 이익도 생각하고 폭력도 휘두르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부처님 오신 날 여러 불자님들과 만나게 되어서 대단히 행복스럽게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가물다가 감로수같은 비가 와서 천지은혜에 대해서 감사를 느끼고, 부처님 오신 날의 축제를 불자님들과 함께 맞게 되어서 행복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는 부처님 공부는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도리 그대로 따르는 것이 불법이고 그대로 따른다는 것은 우주의 실상이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님 명호(名號)를 부르고 외는 것을 끊임없이 지속시켜야 합니다. 부처님을 부르는 것을 지속시켜야 이른바 삼매가 되어서 명상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삼매란 명상입니다. 명상은 아무 것이나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명상은 부처님을 명상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실상인 모든 존재의 근원자리인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같이 훌륭한 명상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방법으로 명상을 하시더라도 그 근원은 모두가 다 부처님이다, 이렇게 부처님을 명상의 근원 자리에다 모시고서 명상을 하셔야 명상도 잘 되고 그래야 해탈의 길로 연결됩니다. 그렇게 하셔서 우리 스스로가 바꾸어져야 합니다. 우리 범부가 성자의 길로 차근차근 바꾸어져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금생에 산 보람이 있고 무상대도(無上大道)인 부처님 법을 만난 의미가 있습니다.
* 구레 연곡사 사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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