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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63

 

 

* 이 글은 200185일 성륜사 보살계 수계식에서 청화 큰스님께서 하신 법문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상()으로 관찰하면 천지 우주가 천차만별(千差萬別)의 구분이 있습니다. 나 따로 있고 너 따로 있고 구별이 됩니다. 그러나 본래적인 근본(根本)에서 관조(觀照)할 때는 모두가 하나의 자리로 귀일(歸一)됩니다. 성인들은 이와 같이 천지 우주를 하나로 보기 때문에, 나와 남의 구별이 없습니다. 따라서 근본적인 의미에서 이 우주는 내 것과 남의 것의 구별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생 차원에서 너와 나를 구별해서 보기 때문에, 가지가지 갈등이 생기고 부조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불자님들께서 보살계(菩薩戒)를 받습니다. 보살계는 다른 계와는 다릅니다. 가령 무슨 계율(戒律)을 지킨다든가, 살생을 말라, 거짓말을 말라 하는 등의 금지적으로, 단순히 금욕적으로만 되어 있는 계율은 일반, 보통 계율입니다.

 

그러나 보살계라는 것은, 마치 공자님이 말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내가 70세에 이르러 내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고 했는데 왜 그럴 것인가? 그것은 공자님이 70세에 이르러 우주의 본바탕을 훤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주의 본바탕 당체(當體)를 깨닫고 보니,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또 우주가 하나의 몸이기 때문에 자기 개인의 에고를 위해서, 자기개인의 욕망을 위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고 남에게 신세를 끼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인식론적으로 모두를 대상에서 보면, 분명히 구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존재론적으로 존재가 무엇인가, 우주가 지금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실상에서 본다면, 그때는 너와 내가 구별이 없습니다. 철학에도 여러 학문적 갈래가 있습니다마는, 그중에서 실존철학은 우주의 실상을 밝히는 철학입니다. 우주의 실상은 어떠한 것인가, 겉에서 보면 이것저것 천차만별로 차이가 있지마는, 바탕에서 보면 하나란 말입니다.

 

지금 큰 바다에 떠 있는 무수한 섬들이 있습니다. 바다 위에서 보면 섬입니다. 그러나 바다의 바탕, 바다의 바닥에서 본다면, 섬이 아니라 육지입니다. 섬은 없고 육지뿐입니다. 이와 똑같습니다. 이와 같이 천개 만개의 섬이 있더라도, 바다의 바닥에서 보면 하나의 육지란 말입니다. 우주 만유가 바탕에서 보면 하나란 말입니다.

 

보통 우리는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합니다. 그 고생 바다에서는 다 고생스럽습니다. 아무리 행복한 분도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한계 상황을 넘을 수가 없습니다. 또 생사 문제 말고도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모순과 부조리가 많습니까. 그러면 고생은 아무런 필요가 없는 고생인가? 고생은 절대로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고생으로 해서 다생겁래(多生劫來)의 업장(業障)을 녹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살아서 지옥에 떨어지는 수도 있고,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성문, 연각, 보살, 부처라는 중생이 내왕하고 생사윤회하는 길에서 업 따라 죽고 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한도 끝도 없이 우리 생명은 연속됩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이란 말입니다. 우리 생명 자체는 죽음이 없습니다. 업 따라서 모양만 바꿀 뿐입니다. 금생에 불행하여 젊어서 지금 당장 죽는다 하더라도 아쉽게 생각하고 서운하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죽자마자 1초의 시차도 없이 그냥 생을 받습니다. 생명 그대로 새 옷인 새 몸을 받습니다.

 

우리 생명은 본래가 하나의 실상입니다. 본래가 실상이라는 그 말은, 본래 우리가 부처란 말입니다. 부처만이 참다운 실상입니다. 바로 그 자리가 우주의 본성품 자리란 말입니다. 그 자리는 또한 우주 에너지의, 우주의 본 생명 자리이기 때문에, 그냥 무생물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우주 생명 자리는 제한되고 능력도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도 끝도 없는 능력, 한도 끝도 없는 자비, 행복이 다 갖추어진 자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자리가 인격적으로 또는 생명적으로 표현하면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이나 우주 에너지란 말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또한 우주 에너지나 부처님이나 내 생명이나, 모두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생명이나 우주에너지나 부처나 똑같은 말입니다. 이 셋이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남한테 보시를 할 때도, 흔히 애견대비(愛見大悲)라 애견(愛見)을 여의지 않고 일어나는 소승적인 대비로써 남을 구제한다 하더라도 번뇌(煩惱)가 있어서, 즉 너는 나보다 못하니까 내가 좀 도와줘야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도와준단 말입니다.

 

우주 만유의 진상을 보지 못하고, 중생이 참으로 있다는 생각을 일으키며 자비를 베풉니다. 참다운 베품이란 무엇인가? 저 사람과 나의 생명이 본래로 둘이 아닌 자리에서 베풀어야 참다운 보시입니다. 하나의 생명으로 저 사람을 봐야, 하나의 생명으로 봐져야 실상 자리에서의 보시이고 참된 보시가 됩니다.

 

그 자리가 실상 자리입니다. 다른 말로 실존(實存) 자리입니다. 원래가 하나의 생명인데, 우리 중생이 그렇게 보지를 못하니까 너 따로 나 따로 본단 말입니다. 그래서 보살계는 바로 불성계(佛性戒), 불성계는 상대유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계가 아니라 바로 우주의 본성, 우리 인간의 본성 자리에서 본성을 밝히는 계란 말입니다.

 

공자님 말씀같이 칠십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하는 바로 그 자리가 불성(佛性)입니다. 우리 마음이 불성에 안주하면 우리 주체성(主體性)이 바로 불성입니다. 불성에 우리 마음을 두고 행동한다면 나와 남이 둘이 아닌 것이고 다른 동물과도 둘이 아닙니다. 하나의 풀포기, 하나의 돌멩이도 다 살아 있는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물활론(物活論)이라는 것은 어느 것이나 유정무정(有情無情) 유상무상(有相無相), 모양 있는 것이나 모양 없는 것이나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명이 있다고 보는 철학입니다.

 

여러분들 아시는 바와 같이 지식정보화라는 것은 정보의 홍수를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정보를 소화 못하면 마음이 항시 불안합니다. 그러기에 지식정보화시대에는 만중생이 모두 다 철인이 되어야 합니다. 철학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철학 저 철학, 교리적으로 많이 안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진리의 당체(當體)를 파악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자기 주체가 섭니다. 주관이 섭니다. 주체가 서야 비로소 불안의식을 해소할 수 있단 말입니다. 불안한 마음에서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살계(菩薩戒)는 불성계(佛性戒). 바로 불성, 우주 만유의 근본자리에서 우리 인간성의 근본실상 자리에 알맞은 법도法度, 계율이 불성계입니다. 그래서 다른 말로 하면 무상청정계(無上淸淨戒)입니다. 보살계는 상이 없는 계율입니다. 현상에서 보고 있는 차별적인 구차한 계가 아니라 우리 불성의 법도, 이 우주의 법도, 그대로 우리 인간이 준수해야 될 이른바 규범이 보살계입니다.

 

조금 더 부연해서 말씀드립니다마는 모든 지식정보가 혼란스럽게 얽히고 설키고 착종(錯綜)하고 있어서 우리가 기본적인 인생의 이론적인 체계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이른바 유물론은 모든 존재는 다 물질로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고 이에 대립해서 관념론 또는 이와 의미가 똑같은 유심론은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봅니다.

 

따라서 우리가 관념론에 설 것인가, 유물론에 설 것인가 하는 것은, 불자님들의 자유로운 의사에 맡깁니다. 그러나 적어도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철학상의 유심론 또는 관념론 쪽에다 우리 이상을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유물론은 오직 물질적인 행복이라든가 물질적인 평등이라든가 이런 데에다 중점적 관심을 두기 때문에 우리 인간성은 다분히 건조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하나의 마음으로, 불성으로 보는 그런 사상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범신론이란 말입니다. 같은 유심론, 같은 관념론 가운데도 범신론(汎神論)과 일신론(一神論)이 있습니다. 이런 개념도 간단한 것이니까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일신론은 모든 존재를 하느님이 창조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창조했으니까 응당 하느님이 섭리를 해야 되겠지요. 하느님이 창조했는데, 그 창조도 공평무사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람하고 동물하고 다른 식물하고도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 사람도 예수하고 다른 사람하고 차이가 있다고 하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계율을 지킨다 하더라도, 일신론의 관점에서는 사람끼리는 서로 죽이지 않고 또는 사랑하라고 되어 있지마는 다른 동물과 사람과의 관계는 모든 동물이나 식물은 사람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나 방법이나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위해 희생당해도 무방하다고 본단 말입니다.

 

자연에 있는 모든 것도 역시 우리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는 무자비하게 개발도 하고 그렇게 훼손시켜도 무방하다고 본단 말입니다. 이것이 일신론의 사상입니다. 그러나 범신론, 넓을 범() 귀신 신(), 범신론인데 우리 불교는 부처님 가르침은 범신론이라는 범주에다 다 집어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없으나, 구태여 철학적으로 말하면 우리 불교나 힌두교나 유교 등의 종교는 모두 범신론에 해당한다고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범신론이란 무엇인가? 범신론은 우주 모두가 바로 신이라고 본단 말입니다. 자연이나 다른 동물이나 인간이나 모두가 다 신이 아님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자연이 곧 신이요, 신이 곧 자연이라고 본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어느 것도 다른 것을 위해서 그와 다른 것을 또 희생시킬 수 없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보살계라는 것은 그러한 범신론적 견지에서 우주가 모두 다 생명 덩어리니까 그 본바탕에서 보면 더 높고 낮은 우열이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 차원에서 보면 천차만별로 구분이 되겠지마는 그래서 우선 철학적으로 범신론의 견지(見地)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보살계는 불성계입니다. 천지 우주의 근원적인 성품을 기조로 해서 이루어진 법도가 보살계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 보살계는 우리 인간이 우주 내에서 지켜야 할 가장 근원적인 하나의 윤리도덕입니다. 참다운 철학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 따르는 의식적인 실천이 따라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주라는 것이 그냥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법도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당체이기 때문에 마땅히 필연적으로 윤리도덕이 따르는 것입니다. 우주의 법도 가운데서 우리 인간이 닦아야 될 법규가 바로 보살계입니다.

 

보살계는 열 가지 무거운() 계와 마흔 여덟 가지 가벼운() 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흔 여덟 가지 가벼운 계도 열 가지 무거운 계 가운데에 다 포함된 진리이기 때문에 상당한 장황한 시간동안 말씀을 드려야 48계를 다 말씀드릴 것인데 그래서 그 열 가지 무거운 계율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가운데에 마흔 여덟 가지 계는 다 포함되어 있는 계율입니다.

 

우리가 계를 받을 때는 먼저 참회를 해야 합니다. 잘못해서 과거에 지은 죄가 없어져 버려야, 낡은 포대에 든 것을 다 비워 버려야, 새로운 것을 거기에 넣을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새로운 것을 담기 위해서는 마땅히 낡은 것을 모두 깨끗이 없애야 하듯이, 과거에 지은 죄를 모두 다 참회해야 합니다. 참회하는 뜻으로 연비(燃臂)하시기 바랍니다. 참회진언, 옴 살바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