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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57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57

 

우리 인간성은 아라한도를 성취하면, 누구나 다 삼명육통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성은 정말로 끝도 가도 없는 무한한 가능성을 갖춘 것인데, 중생들은 아라한도를 성취할 만하게 제대로 닦지를 못할 뿐입니다.

 

삼매를 성취해야 자기를 초월할 수 있다

 

그래서 제대로 닦는 길을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우선 철저하게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이른바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는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계율 가운데서도 특히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음식을 함부로 먹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음식을 함부로 먹으면 우리의 생리(生理)와 심리(心理)가 본래 둘이 아니라서 서로 상응(相應)하기 때문에 음식을 함부로 먹으면 우리 마음도 흐리멍덩할 뿐만 아니라 우리 몸도 오염이 됩니다.

 

그래서 철저한 계율로 해서 준비작업을 하고 그 다음에는 불교 말로 하면 삼마지(三摩地), 삼매(三昧)에 든단 말입니다. 삼매라는 것은 명상을 말합니다. 보통 명상은 삼마지, 삼매라고 못합니다. 초보적인 비파사나(Vipassana)나 관조(觀照)하는 초보적인 명상을 해서, 우리 마음이 분열되지 않는 오직 일념(一念)으로 흘러가는 것을 삼매라고 하지요. 삼매에 들어야 비로소 자기를 초월합니다.

 

삼매에 온전히 들어서 삼매를 성취해야 자기를 초월해 가지고 성자가 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특수한 사람만 성자가 되는 것으로 생각할는지 모르나, 옛날 소크라테스(Socrates)나 플라톤(Platon) 같은 분도 성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소크라테스는 길을 가다가도 가만히 서서 엑스타시스(Ecstasies), 명상에 잠기고 자기망아적(自己忘我的), 자기를 잊어버리는 자기를 초월하는 경지에 들어갔단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모든 문제가 종교는 종교대로 철학 체계가 미흡하면 확실한 종교가 되기 어렵고 또 철학적으로 교리적 분석을 잘해놓고 한 체계가 선다 하더라도 항시 교리에만 묶여 사변적인 환경을 벗어날 수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먼저 말씀드린 에리유게나’, 그분도 철저하게 종교와 철학을 동일시했단 말입니다. 꼭 종교와 철학은 같이 놓아야 한다고 하면서 이른반 신앙과 이성은 일치되어야지 이성은 이성대로, 신앙은 신앙대로 간다면 철저한 성과를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현대 여러 분야에서 모순이 야기되고 많은 지적도 나오는데 가장 큰 원인은 순수사유를 미온적으로 하는 데에 있습니다. 깊은 사유를 한다고 할 때에는 모든가 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졌기 때문에, 내 관념(觀念)이나 내 몸뚱이나 모든 눈에 보이는 현상계는 결국 자기라고 고집할 것도 없고, 자기 소유를 주장할 필요도 없단 말입니다.

 

인간이 자기라는 에고나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서 생활한다면, 부조리가 생겨날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자기라는 에고가 생기면, 거기에 내 남편, 내 아내, 내 재산, 내 영역이 따르겠지요. 그래서 철학이란 것은 철저하게 사유해야 한다고 봅니다. 끝까지 투철하게 사유해 나가야, 이른바 인생과 우주의 본바탕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본래적인 본바탕을 안다고 할 때는, 결국 불교 술어로 무아(無我)란 말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와 불교와 이슬람교의 어떤 종교도 별도로 따로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하나기 때문에, 종교도 하나란 말입니다. 우리 진리는 하나기 때문에, 저는 종교도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신학 체계를 세운 초기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그 다음에 9세기에 나온 에리유게나나, 14세기에 나온 에크하르트(Eekhart 1260-1327)나 또는 13세기에 나온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 등등, 이런 분들이 세운 종교나 철학의 체계는 불교 체계와 같습니다.

 

모든 성자나 철학자들은 별도의 각각 체계를 세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똑같은 동일률(同一律) 이라, 하나의 진리에서 온 일체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모두가 하나요, 일원적(一元的) 존재요, 진리란 말입니다. 깊이 사유해 보면, 눈에 보이는 것은 허상이기 때문에, 진리의 자리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철학적인 깊은 사유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노파심에서 자꾸 반복합니다마는, 순수 사유를 해서 자기라는 것이 원래 허망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라고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의 금강경에서는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다 꿈이요, 그림자요 허깨비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재와 실재 아닌 것을 명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진리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진리인데 하나의 진리는 아까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도 말했습니다마는 존재하는 것’,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일 뿐이란 말입니다. 결국은 실상은 하나일 뿐입니다. 실상은 모두가 다 하나이고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다 가상에 불과하고 말입니다.

 

가상(假相)과 실상(實相)을 분명히 구분하는 것을 철저히,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거기에다 자기 스스로 본래가 무아(無我)라는 데에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아라는 것은 아시는 바와 같이, 불교에서 말하는󰡐내가 없다󰡑는 무아 아니겠습니까? 어째서 내가 없는가 생각할 때, 모든 것을 철저히 사유해 나가면, 나라는 것이 어디에 붙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잘못 생각하고 미지근하게 생각하니까 내가 있고 내 손도 있고 하는 것이지, 깊이 생각하면 현상적인 문제는 사실 꿈같은 것이란 말입니다. 허상입니다.

 

우리가 허상을 떨쳐 버릴 수 있는 데까지 사유를 철저화시켜야 합니다. 다음은 우리가 초월하기 위해서 명상을 해야 합니다. 초월이 안되면 범부성을 초월할 수가 없습니다. 또 초월이 안되면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는 셈이 됩니다. 또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나 시간성과 공간성(空間性)과 인과율(因果律)에 제약을 받는단 말입니다. 초월하는 길이 명상법瞑想法인데, 명상법은 여러 가지 다른 법도 많이 있지만, 철학도들도 명상법은 꼭 불교의 것을 참고로 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하면 불교의 명상법은 우리 범부중생凡夫衆生이 부처가 되어 가는, 성자聖者가 되어 가는 법을 소상히 밝혀있단 말입니다. 그것은 제가 문제제기만 합니다마는 구차제정(九次第定)이 있습니다. 구차제정은 아홉 단계로 단계단계 올라가는 우리의 사유 체계라든가 우리 명상이 올라가는 단계를 말한 것인데, 구차제정으로 나간다면 성자의 지위인 아라한도에 들어가면 초월적인 기적을 낼 수가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경전을 보면, 초월적인 기적을 낸 분들이 한 두 분이 아닙니다. 중세에 있어서도 진묵대사(1562-1633)나 그런 분들은 상당한 기적을 냈습니다. 서산대사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또는 신라 때 원효 스님은 더욱 그랬습니다. 우리가 깊은 삼매에 들어서 우리 스스로 본래적인 인간성에 갖추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려고 생각한다면, 누구나가 낼 수 있습니다.

 

이런 기적을 부사의한 것이고 신화적인 것이라 생각하나, 신화도 기적도 아닙니다. 꼭 누구나 할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입니다. 개발만 하면 됩니다. 따라서 현대에 있어서 인간의 한계상황을 놓고 불안한 고민도 합니다마는 한계상황을 넘어서면 길이 분명히 있는데 그런 길을 가지 못한단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저도 제대로 갔다면 그런 초월적인 가능성을 만들 수 있을 텐데, 제대로 못했다는 것을 참괴(慙愧)합니다.

 

다른 분들도 앞으로 철학적인 문제라든가 종교적인 문제라든가 사회의 여러 병적인 요소들이 다른 원인도 있겠지만 인간성 문제에 있어서 스스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니까 그렇습니다.

 

인간 자체가 본래적으로 무한을 구하고 영원을 구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쇼펜하우어(Schopenhuer 1788-1860)가 말한 바와 같이, 유한자가 무한(無限)을 구하고, 또는 시간적인 존재가 영원을 구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했듯이 우리 인간은 본래적으로 영원성을 갖추고 있어서, 무한과 절대와 영원을 구하는 마음이 누구나 있습니다. 있는데도 이것을 구하지 말라고 막을 수가 없습니다. 보다 더 그것을 증장시키고 더 깊이 탐구해 성취하도록 권장해야겠지요. 그렇게 하려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철저하게 순수 사유를 해서 에리유게나나 엠페도크레스(Empedokles BC 493-433)라든가 그런 분들같이, 다른 찌꺼기는 다 털어버리고 순수성만 남을 수 있도록 까지 우리가 사유를 하고 다음으로 도덕적인 결단을 내려서 계율(戒律)을 잘 지켜야 합니다.

 

몸이 부도덕한 사람은 삼매라든가 깊은 명상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철저히 도덕적인 행동이 꼭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남녀문제도 역시 깊은 삼매에 들려고 생각한다면 절제를 하셔야 합니다. 칸트(Kant)라든가 니체(Neietzsche)라든가 쇼펜하우어(Schopenhuer)라든가 플라톤(Platon) 같은 사람들은 모두가 독신주의자 아닙니까. 사실 독신으로 산다는 것이 보통 뜻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부나 수녀도 독신 아닙니까. 우리 승려도 비구승은 독신 아닙니까. 왜 그런가하면 남녀 성문제를 초월하지 못하면 명상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어느 한계에서, 머물러버리고 절대로 온전한 초월을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음식 문제 남녀이성 문제 이런 문제를 초월할 수 있는 자기를 만들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철학자는 단순히 교육적으로 해서 아주 훌륭한 체계를 세워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하자없는 인격을 우선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깊은 명상을 하고 그 명상은 불교적인 것이 표준적인 명상법입니다.

 

구차제정(九次第定), 즉 아홉 단계를 밟아서 올라가면 차근차근 정화가 되어서, 마지막에 우리 범부성(凡夫性)을 초월해서 영원적인 자유로 들어간단 말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성자가 됩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나가 성자가 되는 것이 철학이나 종교의 구경적인 목적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이 한도 끝도 없는 가능성이 원래 있는 것이니까, 다만 거기에 가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철저한 순수 사유를 해서 이제까지 오염되고 불교적으로 말하면 과거 전생前生부터 무수생 동안에 우리 몸이나 마음에 오염된 것을 씻어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상당한 기간 동안 명상에 잠겨야 됩니다.

 

그래서 더러는 10년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30년을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또 저와 같이 80이 가까워져도 미처 다 끝내지 못하는 것은 제대로 잘못해서 그렇습니다. 역시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행복이나 무슨 문제도 결국 개별적인 인격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의 인격자로서 투철하게 깊은 생각을 해서 정당한 진리까지 순환시키고, 다음에는 도덕적인 결단으로 초월해야 한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