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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54

 

달마스님 법문이라는 두 가지 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하면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법문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믿을 때는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면 종교를 믿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종교라는 것은 우리 마음을 평온히 하고 모든 사람끼리 서로 화해하고 더불어서 영원한 자성청정한 진리로 나가는 것이요,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인데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치 않으면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믿는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 마음이 편안한 안심법문이 중요한가?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다, 이런 말씀을 흔히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깊이 느끼고 명심해서 그렇게 실천하는 분들은 그렇게 많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정말로 바로 부처입니다. 부처를 떠나서 우리 마음을 논()할 수가 없고 우리 마음밖에 부처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바로 본래로 부처입니다. “나같이 별스럽지도 않는 그런 마음을 어떻게 부처라고 할 것인가이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 범부 중생이 생각하는 그런 정도의 마음이 아닙니다.

 

육조단경에서도 또 말씀하셨습니다마는, 우리 마음이 바로 우리 자성인데, 우리 자성 가운데 우리 마음의 본체, 우리 마음의 본체가 바로 청정법신비로자나불(淸淨法身毘盧遮那佛)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체가 바로 법신불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체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덕성(德性), 지혜공덕(智慧功德)이 바로 원만보신노사나불(圓滿報身盧舍那佛)입니다. 그 법신과 보신을 근거로 해서 모양을 나투고 또는 변화하는 그러한 차원에서, 이것이 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千百億化身釋迦牟尼佛)입니다. 즉 우리 마음 가운데에 법신과 보신과 화신 삼신이 원만히 갖추어 들어있습니다. 다시 되풀이해서 말씀드리면, 우리 마음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 본래 마음은 이 우주와 더불어 둘이 아닌, 우리 생명과 더불어 둘이 아닌 그 법신을 온전히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 가운데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영생하는 생명과 또는 다시없는 행복과 극락의 위 없는 행복과 또는 신통자재하는 신통(神通)과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갖추고, 그리고 만덕을 갖춘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또는 우리 마음의 본체는 번뇌가 조금도 없습니다. 본래 청정이란 말입니다. 때가 끼었다 안 끼었다 하는 것은 우리 중생이 봐서 그러는 것이지 우리 마음은 모양이 없어놔서 사실은 때가 낄래야 낄 수가 없습니다.

 

도둑질 많이 하고 그야말로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질 만한 죄를 많이 지었더라도 그 마음이 사실은 오염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해서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 스스로 자기 어리석음에 묶여서 범부(凡夫)가 되고 비하(卑下)하여 내가 나쁜 놈이라고 하는 것이지 우리 마음은 본래 모양이 없기 때문에 시간성과 공간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염(汚染)시킬래야 시킬 수가 없습니다.

 

금생에 잘못 살아서 지옥에 전락 되어가지고 한도 끝도 없이 오랫동안 지옥고를 받는다하더라도 우리 마음은 조금도 오염이 안됩니다. 우리 마음 청정(淸淨) 그대로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의 부처님 청정법신이 그대로 우리 마음의 본 성품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 자리는 지혜 자비 능력 행복이 거기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성, 우리의 본성이 지금 이대로 원만구족(圓滿具足)한 진여불성인 것입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분, 대천재 같은 분은 그러겠지마는 우리 같은 사람이 어째서 내 마음이 위대한 부처일 것인가 하고 조금도 의심을 갖지 말으십시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슈바이처 같은 이를 아프리카의 성자라고 하는데, 의사인 동시에 철학자요, 신학자(神學者), 음악가인 그분은 얼마나 잘났겠는가. 그리고 나는 무엇인가 하고 비교할 때 한심스럽게 생각할 분이 있겠습니다마는, 그러나 아인슈타인이나 슈바이처나 또 성자라 하는 인도의 간디나 지금 우리나 마음자리는 똑같습니다. 조금도 흠결(欠缺)이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마음이나 예수님 마음이나 달마스님 마음이나, 마음의 본바탕은 똑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 마음은 영겁회귀(永劫回歸). 우리는 본래가 부처기 때문에, 몇 겁을 되풀이하더라도 부처가 되는 일입니다. 또 부처가 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불교의 우주관(宇宙觀)에서는 중생의 공통업력(共通業力)에 의해 텅텅 빈 허공으로부터 다시 우주가 이루어집니다. 이른바 성겁(成劫)이 되면, 여러 가지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든 존재가 거기에 의지해 산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주겁(住劫)입니다. 그리고 나서 차근차근 찌꺼기가 생깁니다. 물질이란 것은 오랫동안 되다 보면, 그야말로 불가역성(不可逆性) 에너지라. 이른바 다시 활용(活用)할 수 없는 에너지, 엔트로피(entropy)가 자꾸만 쌓여 나중에는 산화(酸化)가 되어서 불이 난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괴겁(壞劫)이라, 우주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가 다 파괴가 됩니다.

 

파괴된 뒤에는 물질은 허공무일물(虛空無一物)이라. 텅텅 비어 버린단 말입니다. 아무 것도 없이 비어 버립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물질은 없으나, 우리 중생의 심식(心識)은 남아 있습니다. 즉 무색계(無色界) 중생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무색계 중생이 텅텅 빈 공겁세계(空劫世界)에서, 아직은 중생이어서 좋다 싫다하는 마음이 있겠지요.

 

그 싫다 좋다 하는 그런 마음이, 에너지(energy)가 상호작용(相互作用)해서 다시 우주를 형성합니다. 그러면 다시 텅텅 빈 공겁에서 우주가 성겁이 되고 그러면 중생이 살고, 다시 파괴되고 텅텅 빈 공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주는 영겁회귀를 합니다. 우주가 이루어지고 다시 존재가 살고, 또 파괴되고 또 텅텅 비어 버리고, 또다시 이루어지고 다시 모든 존재가 살고, 또 파괴되어 버리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역시 본래 부처기 때문에 꼭 부처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지금 부처가 되어가는 나그네길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