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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51

 

 

자성이란 말을 여러분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자성이란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인데, 자성은 우리 본래 마음인 본성本性 아닙니까? 우리 중생들은 본성을 잘 모릅니다. 내 본성을 내 마음이지 않는가, 이렇게 어렴풋이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자성이 내 마음이면 내 마음은 어떤 것인가. 내 마음의 깊이는 얼마나 깊고 또 내 마음은 얼마나 넓은 것인가, 이렇게 생각해 보면 내 마음의 모양이 만들어지는 듯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음이라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이면 모르겠지만 보이지 않는단 말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또 마음 깊이도 부박浮薄합니다. 옹졸한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좁습니까? 또 마음이 깊은 사람은 한도 끝도 없이 묵직하여 그 사람의 속을 알 수 없도록 깊은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가장 깊고 가장 넓은 사람이 성인입니다. 이 세상의 신비롭고 부사의한 것 중에서 가장 신비롭고 부사의한 것은 역시 마음입니다. 마음은 어떻게 헤아릴 수 없단 말입니다. 자기 마음도 금방 남 좋아했다가 또 조건이 바꿔지면 금방 싫어합니다. 내외간도 같이 만날 때는 서로 좋아하니까 당연히 만났지 않았겠습니까 마는, 또 다른 여건이 생겨서 싫어지면 그때는 헤어지고 죽이기도 한단 말입니다.

 

그걸 생각하면 사람 마음이 참 요물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불여의不如意하고 복잡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마는 그런 것도 모두 다 요망스러운 마음의 짓입니다. 마음의 탓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마음이 얇아서 그렇습니다. 마음 깊이를 알면 모르겠지만 모르니까 얇은 그대로 금생에 나와서 보고 듣고 느끼고 또 마음이 앏은 탓으로 자기 몸뚱이를 꼭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시야視野가 짧으니까 우선 가까운 자기 몸뚱이만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러나 과거 전생에 이와같은 몸이 있었을 것인가 생각할 때는 이와 같은 몸이 있지가 않습니다. 소박한 사람들은 과거에 이와 같은 몸이 있고 죽어서 내생에도 이와 같은 몸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금생에 받은 이 몸은 과거 전생의 업따라서 금생에만 받은 것입니다. 어디에도 똑같은 그런 몸이 없습니다. 내생에 가더라도 금생에 지은 업이 과거 전생에 지은 업과 똑같아서 똑같은 몸을 받겠습니까? 내생에 가면 또 다른 몸을 받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결제結制할 때는 그런 것 저런 것을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나라는 것이 참으로 무엇인가, 내 마음이 얼마나 깊을 것인가? 마음 잘못쓰면 아까 말씀드린대로 별스럽고 요망스러운, 여러 가지 혼란스러움을 다 야기시킵니다. 아무리 지위가 높다 하더라도, 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범부凡夫입니다. 범부가 사실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전생에 자기가 좀 지은 바가 있어서 군수도 되고 도지사도 되고 대통령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자기가 자기 마음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참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참 사람은 성인聖人입니다. 참사람 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을 마십시오. 참사람 되는 것이 인간의 가장 바른 길입니다. 정도입니다. 참사람이 안되면 그대로 말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몇 생을 다시 태어나고 해도 역시 꼭 참사람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마음의 근원 자리는 바로 참사람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근원 자리는 바로 성자의 마음자리입니다.

 

우리가 잘못 배우고 잘못 버릇 붙여놔서 금생에 이상한 짓을 해서 마음을 좁고 옹졸하고 얕게 쓰는 것이지 우리가 마음의 깊이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마음의 깊이가 한도 끝도 없어요. 마음이 물질같으면 다 깊다 얕다 하겠지만 마음은 본래 모양이 없어서 깊이도 한도 끝도 없습니다. 무한의 깊이입니다.

 

그러면 마음은 얼마나 넓을 것인가. 아까 입정入定시간에 여러분들이 하신 바와 같이 마음은 허공과 같은 것입니다. 마음은 바로 허공虛空입니다. 한도 끝도 없단 말입니다. 한도 끝도 없이 휑하니 크기만 크고 내용이 부실하면 별것도 아니겠지요. 그러나 한도 끝도 없는 영원한 생명, 이것이 마음이기 때문에,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이요, 하느님이요, 그러는 것입니다. 하느님이라는 것이 어디 별도로 하늘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한도 끝도 없는 생명 자리가 바로 하느님이란 말입니다. 요한복음서를 보나, 또 다른 복음서를 보나, 그렇게 하느님 말씀이 되어 있어요. 우리 중생들이 잘못 알아먹기 때문입니다.

 

중생들더러 󰡒그대 마음이 하나님이고 부처님이다󰡓 이렇게 말하면 중생들이 알아먹겠습니까? 못 알아먹을 테니까 이래저래 방편을 써서 󰡒이뭐꼬󰡓 무무󰡓그러는 것이지, 그분들의 본뜻은 한도 끝도 없는 마음자리가 바로 부처님이요 참다운 하느님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선을 하고 경을 보고 한다하더라도 암중모색으로 덮어놓고 󰡒이뭐꼬” “무무󰡓할 것이 아니라, 도인들이나 부처님의 본뜻은, 마음 자리 그대로 바로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달마스님도 그러시고 육조 혜능스님도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달마스님께서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신 것은 문자를 배우지 말라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문자의 뜻에, 글의 뜻에 집착하지 말고, 바로 근본 마음자리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스님께서 하신 법문이 이입행입理入行入이라 하셨습니다. 이입행입이라는 말씀이 달마스님 법문의 요체要諦입니다. 그래서 후대에는 여러 가지로 고증考證을 밟아서 후대의 사가史家들이 고증을 해서 그전에 달마스님이 무슨 저술을 냈다고 했던 것들은 모두 달마스님한테 가탁假託해서 붙인 것이고 달마스님의 참다운 법문은 리입행입이라고 했습니다. 이입理入은 무엇인고 하면 다스릴 리자 들 입, 이치로 해서 먼저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덮어놓고서 우리들에게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즉, 문자는 다 덮어놓고, 참선하고 벽만 바라보고 믿으란 것이 아닙니다. 먼저 이치로, 이론적으로 체계를 세우라는 말씀입니다.

 

사조도신四祖道信 스님도 말씀하시기를, 공부를 하려면 먼저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여실하게 반야바라밀을 공부하고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합리적입니다. 우리가 서구의 기독교 역사를 본다 하더라도 기독교의 신학자들 가운데도 이론과 실천 중에서 어디에다 중점을 둘 것인가 해서 종교에다 더 역점을 둔 신학자도 있고 또는 철학에다 역점을 둔 분도 있습니다.

 

철학과 종교라는 문제를 여러분들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철학이란 것은 인생과 우주의 근본 도리를 이론적으로 체계를 세운 것이 철학이지 않겠습니까? 또 종교는 그 자리를 바로 생명으로, 그 자리를 바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론과 실천, 철학과 종교가 조화調和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론적인 면은 철학, 실천적인 면은 종교, 이렇게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그러면 이론적으로는 아까 말한 것과 같이 불성, 자성自性 또는 도다 뭐다 여러 가지로 말씀이 되겠지요. 그러나 자성이다, 불성이다, 진여다, 그런 것은 이론인데, 거기에 그쳐 버리면 생명이 아니란 말입니다.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이론 그것은 생명을 표현하기 위한 방편方便에 불과한 것이고, 참다운 것은 생생한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아닙니까? 아무리 우리가 교학을 많이 배워서 불교 학자가 되고 무엇이 된다하더라도, 순수한 마음으로 불교를 생명으로 받아들여야 참다운 공부가 되고 성인聖人이 됩니다. 가령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왼다 하더라도 나무아미타불 됩니다. 그냥 이론으로 나무아미타불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고 내 마음의 본성이다고 이렇게 말은 쉽겠지요. 그러나 이론적으로만 해서는 그것이 참 맛이 없단 말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은 자성미타自性彌陀, 내 생명의 본체가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간절히 믿고, 아미타불에 의지해서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도 모르게 차근차근 부처가 되어간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보통 내 마음이라 할 때의 그 마음은 좁지만, 마음의 본 바탕은, 근원은 부처님과 더불어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음의 넓이도 천지 우주를 다 그 마음속에 담아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잘 생각하십시오. 모양이 없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모양이 있으면 한계가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모양이 있는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얽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모양이 없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제약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도 끝도 없습니다. 깊이도 한도 끝도 없고, 넓이도 한도 끝도 없고, 허공과 더불어서 같고 허공과 더불어서 우리 마음이 하나입니다.

 

내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나의 마음도 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 마음은 지금 좁지만 본래 내 마음은 한도 끝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저 사람은 욕도 잘하고 나쁜 짓도 하고 해서 저 사람 마음은 본래 좁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 사람 마음이나 누구 마음이나 똑같습니다. 석가모니 마음이나 달마스님 마음이나 예수 마음이나, 마음은 똑같습니다. 모양이 없어서 비교할 수가 없어요.

 

모양이 있으면 비교가 되겠지만 모양없는 것이 어떻게 비교가 되겠습니까? 물질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교할 수도 없으나 내가 내 마음이 있어서 살아 있듯이, 마음은 분명히 존재하는 생명의 본질입니다. 끝도 가도 없이 깊고 넓고 한도 끝도 없는. 그러면서도 만덕萬德을 갖춘 그 자리가 바로 마음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