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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48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48

 

우리 인간이라든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허망 무상하지만 우리 인간 존재나 그 허망 무상한 본래의 참다운 자리가, 이른바 부처님의 법신이고 바로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관무량수경에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염불수행자 인중분다리화[念佛修行者 人中芬陀利華], 가장 청정하고 향기로운 연꽃이 분다리화입니다. 그래서 염불수행자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참답고 향기로운 연꽃같은 그런 존재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외도와 정도를 알면 더욱 좋겠지요. 그러나 그런 철학적인 깊은 것을 모른다 하더라도 그냥 우리가 영생불멸한 실상 자체의 이름을 외우는 자는, 그대로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향기로운 연꽃과 똑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위기승우[觀世音菩薩 大勢至菩薩 爲其勝友], 그런 관세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 등 위대한 보살들의 가장 훌륭한 친구가 됩니다.

 

그런 부처님의 심오한 뜻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염불하는 사람은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뜻을 모르고 한다 하더라도 염불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 가운데 가장 향기로운 연꽃인 동시에,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이나 또는 보현보살이나 그런 보살들이 가장 훌륭한 벗으로 삼는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무아미타불 또는 아미타불이 이 세상의 모든 개념 가운데 가장 고귀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적인 전문 술어로 말하면, 무생청정보주명호[無生淸淨寶珠名號],

 

생사를 초월한 보배 같은 그런 명호란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깊고 가장 행복스럽고 가장 위대한 이름이 나무아미타불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다 떨쳐 버리고서 우주의 실상 자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런 최상의 이름을 갖는 부처님이니까 그 이름 가운데 부사의한 공덕이 있습니다. 어떤 공덕이 있는가 하면, 삼세 제불이 옹호할 것이고 또는 동시에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기도 하고 가장 무섭기도 하고 가장 자비스럽고 가장 지혜로운 길이기 때문에 어떤 신장이나 나쁜 귀신이나 좋은 귀신이나 하늘의 천상에 있는 천신들이나 모든 존재가 다 나무아미타불을 숭앙하고 받들고 지킨단 말입니다.

 

따라서 뜻도 모르고 나무아미타불 한번 왼다고 생각할 때도, 그 나무아미타불의 공덕으로 해서 모든 신장이 우리를 다 지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이름이 나무아미타불입니다. 가장 권위가 있기 때문에, 나쁜 것들은 얼씬도 못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부처님의 부사의한 명호를 간직할 수 있는 인연을 가졌습니다. 불교를 믿는다 해도, 염불은 방편 가르침이고 화두를 들고 선방에서 애쓰고 의단(疑團)을 품고 해야 참다운 가르침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염불 공부와 비교할 때는 사실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설사 우리가 선방에서 몇십 년 동안 화두를 들고 이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무엇인가, 의단을 품는다 하더라도 염불하는 마음이 화두하는 마음 밑바닥에 깔려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공부가 이어지는 것이지 그냥 덮어 놓고 의심한다 해서 그것이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염불하는 마음이 왜 깔려야 하는 것인가, 참선이란 것은 내 마음의 주인공을 찾는 것이 아닙니까? 이른바 본체를 여의지 않는단 말입니다.

육조혜능대사(六祖慧能大師)의 가르침도, 선이라는 것은 본체를 안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두를 들어도, 본체를 떠나 버리면 그건 선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뭐꼬󰡑 화두를 드나, 똥 막대기(乾屎橛) 화두를 드나, 어떻게 들든 간에 똥 막대기나 이뭐꼬나 그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산란스런 마음을 통일시켜, 본래 우리 생명이 부처이고 아미타불인데 부처를 찾고자 해서 우리가 임시로 의심을 품은 것이지, 의심 그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화두를 드는 것도 좋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화두를 빨리 타파해서 의심이 없는 그 자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말(本末)이 전도가 되었습니다. 또한 의심 그것에 무엇이 붙은 것도 아니고, 신앙이라는 것은 사실 의심이 있으면 안됩니다. 의심이 있으면 신앙이라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백퍼센트 그대로 믿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 증거로 달마스님도 의심하란 말 한 마디도 안 하셨고,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더라도 의심을 내란 말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마조스님이나 백장스님이나 또는 임제스님이나 의심을 내란 말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중국 남송때 대혜스님이 비로소 그 방편으로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우리 주인공을 찾는 그런 하나의 방편으로 해서 의심하란 것이지, 절대로 목적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