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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47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47

 

불교는 정말로 우리 인생의 보배로운 가르침이지만, 부처님을 간절히 생각하고 또 부처님의 명호를 외는 염불의 가르침과 우리의 이상향인 극락세계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참다운 종교적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만큼 염불과 극락세계라는 것은 아주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은 정토삼부경에 있는 하나의 경입니다. 그래서 관무량수경의 전체 내용이 어떤 것인가를 대강 말씀드리면, 관무량수경의 관은 볼 관[], 무량수는 한도 끝도 없는 그런 영생의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아미타불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무량수불입니다. 영생의 생명이란 뜻입니다. 그런가하면 아미타불의 이름은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아미타불이란 것은 대상화시킬 수 있는 그 어떠한 것도 아닙니다. 상대적 존재가 아니라, 생명 자체, 우주 생명 자체, 또는 우리의 본래면목 자체가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이름은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 굉장히 많습니다. 영원한 생명 자체라, 이런 때는 무량수불인 것입니다.

 

아미타불 가운데는 자비나 지혜나 모든 공덕이 한량없이 많다, 한량없이 지혜 공덕이 충만해 있다, 이런 차원에서 의미할 때는 무량광불입니다. 빛 광[]자를 넣어서 한도 끝도 없는 그런 광명의 부처입니다. 그런가 하면 무변광불이라, 끝도 가도 없이 광대무변해서, 한도 없는 우주의 모두를 포섭해 있다는 이른바 공간성을 초월한 그러한 생명입니다. 이런 때는 무변광불입니다. 이렇게 아미타불에 대해서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청정하다고 해서 청정광불,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서 부사의광불, 이와 같이 굉장히 많습니다.

 

또 한도 끝도 없는 행복이라, 그래서 그때는 감로왕불입니다. 영생의 생명수가 감로수 아니겠습니까? 영생하는 생명 자체이기에 감로왕불입니다. 이와 같이 이름 자체에 불교의 공덕이 모조리 다 포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미타불을 우리의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극락세계도 분명히 우리 불교인들의 이상세계일 뿐만 아니라 일체 존재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 인간 존재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이 극락세계로부터 와서 극락세계로 간다고 볼 수 있는 것이고 또 방편을 떠나 사실 그대로 말하면, 이 세계 이대로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이런 것도 우리가 이야기하기가 곤혹스럽지 않습니까? 혼란스럽고 여러 가지 제약이 많은 이런 사바세계가 어떻게 해서 극락일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것도 여러분들이 의심을 품을 수 있지요.

 

그러나 이런 것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론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정도의 내용을 한시간 동안 이야기하겠습니다. 구체적인 말씀은 다 못한다하더라도 대강 중요한 것은 얘기해 드릴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불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외도와 불교(정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삼법인三法印입니다. 삼법인이 있으면 정법이라 말하는 것이고 삼법인이 없으면 정법이 아닌 외도라고 합니다. 그럼 삼법인은 무엇인가? 아시다시피 먼저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모든 것은 결국은 무상합니다. 무상하다는 그것은 어느 것도 고정된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리고 덧없다는 말입니다. 인연 따라 이루어진 것은 고유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 인간 존재의 눈에 비치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바꿔 말해서 유위법입니다.

 

상대 유한적인 법은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투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상만 있는 것이지 성품이 없단 말입니다. 여러분들 금강경을 자주 보셔서 아시겠지만,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입니다. 상대 유한적인 법이나 대상화시킬 수 있는 그런 것은 여몽환포영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거품같이 실체가 없습니다. 그와같이 일체 만법은 허망무상한 것입니다. 인연 따라 이루어진 것은 제행무상이란 말입니다. 다른 종교나 철학에는 제행무상같은 명백한 가르침이 없습니다. 어렴풋이 말씀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단호하고 명백하게 나타낸 가르침은 없습니다.

 

따라서 외도와 정도와의 차이가 그런데 있습니다. 인연 따라 이루어진 현상적이고 상대 유한적인 것은 모두가 무상합니다. 고유한 것 없이 순간순간 변화해마지 않습니다. 공간성도 시간성도 없습니다. 무엇이 있다는 것은, 어느 공간에 고유하게 존재하고 어느 시간이 있어야 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인식의 패턴이란 것은, 내내야 그런 시간성 공간성이 있어야 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다행히도 현대 물리학에서 가장 천재적인 아인슈타인 등이 제행무상이란 소식을 방불하게 말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연기법을 방불하게 설명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라, 이것도 일체 존재란 것은 상대적으로 있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도 역시 일체 존재의 운동량을 바르게 측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위치를 측정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대체로 어름어름하게 측정이 되겠지마는, 전자라든가 중성자 같은 미시적인 단계에 이르면 측정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운동량을 바르게 측정하려면 위치를 측정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대체로 확률적으로 말하는 것이지,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이 있으니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는 연기법의 사상과 상대성의 이론은 서로 상응하는 도리입니다.

 

모두가 서로 어울려서 모양을 내는 것이지, 단독으로 모양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인연 따라 인과 연이 합해져서 모양을 내는 것이지, 고유한 것은 절대로 없습니다. 아무튼 천재적인 현대 물리학자가 우리 불교의 인연법을 그대로 말했습니다. 물론 다는 말을 못하겠지요. 왜 다 말을 못하냐 하면, 그 사람들은 인연법의 가장 근원적인 것은 무엇인가, 이런 것은 모른단 말입니다. 인연뿐만 아니라 가장 근원적인 것은 무엇인가, 이런 것은 모른단 말입니다. 인연뿐만 아니라 가장 근원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이것까지도 분명히 깨달은 분이 부처님이고 역대 조사입니다. 가장 근원적인 것을 모르면, 불교가 성립이 안됩니다.

 

제행무상이라, 고유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이, 모두가 상대적으로 잠시간 상을 냈을 뿐입니다. 상은 현상적이기 때문에 실체가 아닙니다.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아까 금강경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입니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나 거품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있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제법무아입니다. 모든 존재는 무아라,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나라고 할 것이 없으므로 내 소유가 없습니다.

 

부처님 법은 명백합니다. 금강경에서 보면, 부처님 말씀은 여어(如語), 진리 그대로 말씀했단 말입니다. 또는 진어(眞語), 진리만 그대로 말씀했단 말입니다. 또는 불이어(不異語), 다른 것은 절대로 말씀하시지 않았단 말입니다. 또는 불광어(不誑語), 어느 누구도 속이는 말씀이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은 진리 그대로 말씀하시고 바로 그것이 진리고 또 진리 아닌 것은 조금도 없고 또는 우리 중생을 속이는 말 역시 조금도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 보고 결정설(決定說)이라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열반경 27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제가 언급합니다. 사자후(獅子吼), 사자가 한번 포효하면 모든 짐승이 쩔쩔매고 뇌가 그냥 망가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듯이 부처님 말씀은 사자후같이, 사자의 포효하는 소리같이, 모든 외도나 모든 삿된 것을 절복(折伏)시킵니다. 따라서 부처님 말씀은 결정설이라, 꼭 사실대로 말씀했습니다. 결정설이란 무엇을 말씀하신고 하면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불성을 다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도 유정중생이니까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일반 다른 동물이나 다른 식물은 어떻습니까? 불교에서 일체 중생을 말할 때는 인간만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두두물물 산하대지, 하나의 천체라든가 그 어떠한 것도 일체 중생의 범주에 다 들어갑니다. 모든 중생이 다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지고 있다는 것은, 심장에 가지고 있거나 다른 데 가지고 있거나 하는 부분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불성이란 것은 물질이 아니고 하나의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분명히 있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불성이란 것은 우리 마음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 동시에, 우주의 생명입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가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모든 존재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그 말씀은 부처님의 사자후같은 결정설이고 확실하고 단호한 진리이기 때문에, 여래상주무유변역(如來常住無有變易)이라 합니다. 여래가 부처님 아닙니까?

 

부처님이 항시 머물면서 조금도 변동이 없단 말입니다.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는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소승불교는 더러는 상대적인 분야를 말씀했습니다만 부처님의 대승불교는 바로 우주자체를 부처님의 생명 덩어리로 봅니다. 여래상주무유변역(如來常住無有變易)이라, 그 여래는 바로 부처님인데 부처님이 항시 계시면서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오늘 계시다가 내일 안 계시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과거나 현재나 언제나 부처님은 존재하는 생명 자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