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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44

 

염불 중에는 실상염불實相念佛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진리 자체를 우리가 상상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리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실상염불은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이 아닙니다. 보이진 않지만 이 우주는 부처님 생명이란 말입니다. 관무량수경에 훌륭한 말씀이 있습니다.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하는 아주 고도한 진리를 담은 말씀입니다. 즉 모든 부처님은 우주를 몸으로 합니다. 이런 말씀은 방편을 떠나버린 진리 그대로의 말씀입니다.

 

우주 자체가 부처님의 몸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이것이 바로 대승불법이 됩니다. 우주 자체가 오직 하나의 생명이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우주를 몸으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산도 부처님, 물도 부처님, 곤충도 부처님, 다 부처님 아님이 없습니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중생은 자꾸만 나누어 봅니다. 어째서 그런 것인가? 중생은 겉에 있는 상만 보고 집착합니다. 나라는 상, 너라는 상, 밉다는 상, 사랑한다는 상, 그런 상만 집착하는 것이 중생입니다.

 

그러나 성자는 모든 존재의 본 바탕을 봅니다. 본 바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똑같습니다. 불교에서 많이 인용하는 수파水波의 비유가 있습니다. 물과 파도의 비유입니다. 바람에 따라 파도가 일파만파로 갈라져도, 결국엔 똑같은 물입니다. 그것과 똑같이 부처님은 광대무변한 우주 바다의 물에 비유할 수 있고 중생의 번뇌나 모든 분별심은 파도에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파도와 물이 다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파도가 천파만파 부서지더라도, 이 파도는 결국 물이란 말입니다.

 

그렇듯이 우리 중생이 인과의 법칙에 따라 산이 되고 하늘의 별이 되고 인간이 되고 금수가 되더라도, 똑같이 모두가 다 우주의 법인 그 부처님 몸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반야심경을 보나 금강경을 보나, 전부다 그런 도리와 성품과 현상의 관계가 담겨 있지요. 중생은 현상만 보는 것이고, 성자는 그 본 바탕을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상염불은 가장 고도한 염불로서, 우주의 실상, 우주의 본바탕을 관찰하면서 하는 염불입니다.

 

비록 똑같이 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더라도 우리 마음을 덮어 놓고 부처님은 저 밖에 계시다가 우리가 염불하면 우리한테 와서 도와주시겠지하는 것은 타력염불他力念佛입니다. 보통 그렇게 많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애써서 나무아미타불하고 관세음보살하고 외면, 부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가호를 주시고 복을 주시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소박한 방편 염불입니다. 염불은 염불이지만 참다운 염불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꼭 권하고 싶은 염불법은 실상염불입니다. 우주의 진리에 따르는 염불이 실상염불입니다. 소승법은 부처님께서 편의에 따라, 중생의 그릇에 따라, 중생 근기에 맞게 하신 말씀이지요. 그러나 진리는 절대 둘이 아닙니다. 소승이나 대승으로 나눈 것도 하나의 방편인 것이지, 하나의 진리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염불을 하든 의단을 품고 화두 공부를 하든, 그 본뜻은 모두가 부처님이 되어가는,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이 되는 데 있습니다. 왜 꼭 부처님이 되어야 하는가? 부처님이 되지 못하면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생은 누구나가 다 한도 끝도 없는 행복을 추구하고, 아는 것에도 기왕이면 세상만사 다 알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면으로나 최선의 것을 추구합니다. 우리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입니다. 즉 우리 인간의 본바탕이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이 부처이기 때문에 한도 끝도 없이 다 구하는 것이지요. 부처라는 것은 어느 면으로 보나 완벽한 존재 아닙니까? 자비로 보나 지혜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어떤 면으로 보나 완벽한 것이 부처입니다. 따라서 우리 본성이 부처라서 한도 끝도 없이 다 구하는 거예요. 그러나 상대 유한적인 것은 어떻게 다 구한단 말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한계가 없으나, 물질도 한계가 있고 자원도 한계가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여기에 치열한 경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종교라는 것은, 이렇게 갈망해 마지않는 눈에 보이는 존재를 모두 허망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실로 있다고 보지를 않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제법諸法이 공이라 합니다. 제법이라고 하는 것은 주위에서 존재하는 모든 현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현상이 공이라. 또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이라고 합니다. 유위법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상대적이고 유한적인 것인데, 마치 꿈이요 도깨비요 그림자요 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꿈이 형상이 있습니까? 꿈을 꿀 때는 실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꿈을 깨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그림자는 빛이 비치고 모양이 있으면 모양에 따르는 그림자가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보이지만, 또 분명히 없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중생이 너요 나요 밉다 좋다 하는 것은 그림자 같고 꿈같다는 것입니다. 불교인들은 꿈같고 그림자 같다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불교를 그만 둘 수 밖에 없습니다. 꼭 이해해야 합니다. 본래가 꿈이고 허깨비 같은 것을,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있다고 생각하지요. 어째서 없는 것인가요? 우리가 깨달아서 성자가 되면 허망하게 보일 것인데, 우리 중생은 미운 사람은 꼭 밉게 보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스럽게만 보입니다. 그것은 중생의 착각입니다. 그것은 중생이 잘못 보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서 잠시간 허망상虛妄像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라. 모든 존재는 어느 순간도 고유한 존재가 없습니다. 예쁜 사람은 지금도 예쁘고 다음도 예쁘고 미운 사람은 지금도 밉고 다음에도 밉고 하는 이런 생각이 보통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은 중생의 착각입니다. 미운 사람도 인연 따라서 잠시간 생겨난 존재이기 때문에 일초동안도 같지 않습니다. 우리 세포도 역시 일 초의, 몇천 분의 일초 동안도 세포가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신진대사하며 변화합니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조금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어느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강도가 제일 강한 다이아몬드 같은 금강석도 정밀한 현미경으로 보면 순간순간 변화한단 말입니다. 존재란 것은 다 그러합니다. 같은 것이 어느 시간대에도 없고 어느 공간대에도 없습니다. 다만 중생이 잘못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육안의 참다운 실상을 회복해서 천안통天眼通을 통해야 비로소 존재의 본바탕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제 아무리 정밀한 현미경을 놓고 본다 하더라도, 물질이라는 한계내에서 보는 것이지, 물질을 떠나 버린 저쪽 세계는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모든 존재가 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 같다는 이 소식을, 아무리 섭섭해도 꼭 깊이 생각해 두셔야 합니다.

 

오직 문제는 생사해탈이라. 우리가 꿈을 깨서 참다운 진리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실상염불을 하시려면 기왕이면 제일 고도의 경지의 마음으로 염불을 하십시오. 실상염불이란 것은 그냥 마음으로 소리만 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본 바탕을 그대로 생각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온 우주 전체가 다 부처입니다. 이 사람을 보나 저 사람을 보나 이것을 보나 저것을 보나, 길 가다 독사를 보나 무엇을 보든지 그 모든 것이 본래가 부처입니다. 모든 것을 부처로 보는 것이 실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불자님들, 그렇게 우리의 본래 성품은 참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염불을 하시려면 그렇게 바르게 실상염불을 하십시오. 실상염불을 해야 비로소 참다운 공이 있단 말입니다. 실상염불의 공은 어디에다가 비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을 보나, 좋은 사람을 보나 나쁜 사람을 보나, 복 있는 사람을 보나 인상이 나쁜 사람을 보나 어떤 것이나 다 부처님으로 생각을 하면, 그때는 서로 상통이 됩니다. 내외가 살 때도 부인이 남편을 부처로 보고 남편이 부인을 부처로 보면, 그보다 더 좋은 관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친지, 사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을 보더라도 다 부처로 보는 실상염불을 하는 것이, 부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바라시는 염불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