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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43

 

우리가 참선(參禪)한다고 생각할 때 마음을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 하는 점에서 볼 때, 불교의 많은 경전(經典) 가운데서 육조단경(六祖壇經) 같이 근본적으로 말씀한 경전은 참 드뭅니다. 부처님 말씀이 아니면 경()이란 말은 못 붙이는 것인데, 육조단경(六祖壇經)이라고 경() ()를 붙여가지고 지금까지 내려온 것은 6조스님께서 간절히 생각했던 근본정신이 살아있기 때문에 경()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육조단경을 숭상하고 수행의 귀감으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참선이란 말을 할 때 여래선(如來禪), 그러면 굉장히 차원이 높은 선()같이 생각되지 않습니까. 여래선은 달마스님께서 직접하신 고차원의 참선이고, 염불선(念佛禪)은 어쩐지 더 차원이 낮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염불(念佛)이라는 것이 생각 염() 부처 불(), 부처를 생각하고 부처를 찾는 것이고 성불(成佛)을 위해서 한 것이기 때문에 여래선(如來禪)이나 염불선(念佛禪)이나 결국은 같은 것입니다. 여래(如來)가 부처고 부처가 여래인 것이지 무슨 여래가 따로 있고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선과 염불선이 같은 것인데, 중생들은 여래선은 차원 높은 달마스님이 직접 말씀하신 선이고 염불선은 후대의 방편적인 선으로 정도가 낮은 것이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표현의 차이 가지고 필요없는 시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 그 본체(本體)를 안 여읜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본체를 떠나버리면 결국은 이른바 상()아닙니까. 현상적인 여러 가지 차별 분별적인 그런 차원이 상()인 것이고, ()는 인간이나 자연계나 모든 존재의 근본이 말하자면 체 아닙니까. 따라서 불교의 가장 중요한 점은 섭상귀체(攝相歸體), ()을 거두어서 체()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모든 공부가 다 그렇습니다. 섭상귀체라, ()을 거두어서 체()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섭상귀체가 되어야 하고 또 이 체()에 대해서 확실한 개념을 확립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체()가 이른바 자성(自性)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성(自性) 그러면 스스로 자() 성품 성() (), 보통은 우리 개인적인 스스로의 성품이 자성이라고 범위를 좁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자성(自性) 그럴 때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의 준말로 사용합니다. 겉에 부동된 우리 인간성은 십인십색(十人十色)으로 되어 있겠지만 그 자성(自性)의 우리 마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라고 생각할 때는 마음이라는 것이 원래 모양이나 형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본질을 생각할 때는 끝도 갓도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끝도 갓도 없는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 무한한 말하자면, 우리 인간성의 본질을 가리켜서 자성청정심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자성청정심을 기조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 부처님 가르침인 것이고 결국은 육조단경입니다.

 

육조단경에는 자성(自性)이란 말이 110군데가 넘게 나옵니다. 얼마만큼 자성에 대해서, 자성청정심에 대해 역점을 두고 말씀했던가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은 바꿔서 불성(佛性)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성(自性)’, 그러면 보통은 개별적인 범위로 좁게 생각하고 불성(佛性)’, 그러면 그때는 만유의 근본이니까 넓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자성(自性)과 불성(佛性)이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째서 둘이 아닌가를 철학적인 사고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그 겉만 생각할 때는 당연히 차이가 있지만, 그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원래 상()이 없는 것입니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상()이 없는 것인데, ()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결국은 두루 사방에 다 통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심령과학이라든가 전생담 같은 것에서 인간성에 대해서 여러 가지 논의가 되지 않습니까만, 우리 인간성이라는 것이 모양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결국은 제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한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시간적으로 볼 때는 영원적인 것이고 공간적인 의미에서는 무한한 존재란 말입니다. 따라서 자성(自性)을 궁극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결국은 한도 끝도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바로 불성(佛性)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불성도 역시 부처님 그러면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제한해서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석가모니 부처님도 우주의 근본생명인 불성을 깨달으신 분 아닙니까. 불성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붙였지만 그 우주의 생명이 말하자면 바로 자성(自性)인 동시에 불성(佛性)입니다. ‘우주 생명은 어떤 존재인 것인가?’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우주 생명을 생각할 때는 이것도 역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습니다.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도저히 우리가 인식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자성이나 불성이나 결국은 우주 생명은 똑같습니다. 똑같은 이른바 하나의 생명자체란 말입니다.

 

우주 생명은 어디에 있고 어디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성과 공간성이 없는 물질이 아닌 생명자체이기 때문에 우주에 끝도 갓도 없이 충만해 있는 것이고 또 과거 · 현재 · 미래를 통해서 중단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주 생명 · 불성 · 자성은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하는 하나의 참 에너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생각하면 어느 것이나 다 우주 생명이자 불성이고 자성인 것이지요. 그래서 우주란 것은 결국은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자성 아님이 없고 불성이 아님이 없고 우주 생명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우주는 결국은 불성뿐이다, 자성뿐이다, 우주 생명뿐이다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부할 때도 내가 지금 공부하는 것이 확실한 진리를 공부하는 것인가 아니면 어느 지엽적인 것을 가지고서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가 그렇게 의심을 가질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이 자성과 불성과 우주 생명이 본래 둘이 아니고 하나의 생명이다이런 자리를 우리가 이해하고서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결국은 같은 공부를 한다고 하더라도 훨씬 우리의 신념이 강해집니다. 이와 같이 그런 자리를 우리가 이해하고 하는 공부를 가리켜서 이른바 선오후수(先悟後修)라고 합니다. 먼저 이치를 깨닫고서 닦아 나간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오후수가 되어야 공부에 대해서 필요없는 망상을 낼 수 없습니다. 우주라는것은 다 불성 뿐이고 자성 뿐이고 우주 생명 뿐인데 다른 망상을 낼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생명의 고향인 참 불성자리, 우주 생명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 우주란 것은 본래 자리가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무슨 존재가 태어났다 하더라도 결국은 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 근본성품이라는 것은 모든 것의 참 근원자리이기 때문에 그 근원에서 그때 그때 인연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내서 나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다시 그때는 근본으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결국은 불성에서 나왔다가 다시 불성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금생에 버릇을 많이 붙여 놓으면 현세에 자기 몸뚱이나 물질에 애착을 품고 또 그 상()에 대한 나쁜 버릇을 많이 붙여 놓으면 결국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기 힘듭니다. 버릇 때문에 현상적인 모양에 집착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그런 허망무상한 것을, 이른바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제법(諸法)이 다 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연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보이지만 사실은 참으로 있지 않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말하는 제법공(諸法空)이나 또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나, 오온(五蘊)이라는 것은 우리의 관념이나 물질이 오온 아닙니까.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오온이 결국은 다 비어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범부적인 견해에서 잘못 보니까 있다고 하는 것이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결국은 오온이 다 비어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 오온이 비어있음을 비추어 봐야 비로서 인생고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반야심경에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이라는 그런 말씀들이 간단한 말씀이지만 진리를 있는 그대로 설파한 말입니다. 우리의 허튼 관념이라든가 이런 물질계라든가 이런 것이 본래 비어있음을 분명히 조견(照見)이라, 비출 조() 볼 견() (), 분명히 비어있음을 비추어 봄으로 해서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우리 인생고를 구제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인생고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오온(五蘊)이 다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관념도 있고 내 몸뚱이같은 물질이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는 이른바 불교적인 표현으로 하면 망유(妄有), 망령될 망() 있을 유() (), 망령된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생고를 못 떠난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은 다 허망한 것이고 섭상귀체(攝相歸體), 우리가 본체로 돌아가는 섭상귀체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될수록 복잡한 생활을 피해야 됩니다. 가사 대통령같은 감투를 쓰는 것도 그 감투 때문에 인간관계가 얼마나 더 복잡해집니까. 자기가 제일 잘나야 하고 남을 떨어뜨려야 되고 말입니다. 이것이 너무 지나치면 아주 피비린내 나는 그런 투쟁이 전개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문제에 관해서 관심을 두면 둘수록 우리가 체()로 돌아가는 것이 더디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하는 공부는 달마스님이 2조 혜가스님에게 법()의 표신(標信)으로 전수하신 능가경(楞伽經)의 참선법(參禪法)은 여래선(如來禪)입니다. 여래선(如來禪)에서 여래라는 것이 부처이기 때문에 바로 부처를 생각하고 부처가 되어가는 선()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여래선(如來禪)이나 염불선(念佛禪)이나 결국은 같은 것이란 말입니다. 또는 자성선(自性禪)이라, 자성선도 역시 똑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주의 본질은 바로 진여(眞如)이기 때문에 결국은 진여삼매(眞如三昧)라고도 합니다. 부처를 따로 생각하고 불성자리를 추구하는 선()이기 때문에 이른바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고, 비로소 선()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불경(佛經)이나 조사어록(祖師語錄)을 보면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 ()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처의 마음이라는 것은 여래(如來) · 자성(自性) · 불성(佛性) 아닙니까. 그래서 불성(佛性) · 자성(自性)은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우리가 불성(佛性)이라는 그 마음을 안 여의고서, 놓치지 않고서 참구하는 그런 선이 최상승선(最上乘禪)이요 또는 진여삼매(眞如三昧)이며 일행삼매(一行三昧)이고 자성선(自性禪)이며 불성선(佛性禪)이고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며 염불선(念佛禪)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주에는 불성 외에는 아무것도 다른 것은 없다. 우주는 오직 불성뿐이다라는 말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나쁜 버릇 때문에 그 자리를 깨닫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지 성자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 아님이 없고 불성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예수가 말씀하시기를 먼저 하늘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구하라. 그러면 나머지는 모두 다 곁들여서 얻게 되리라.’라고 한 것도 결국 뜻이 같습니다. 기독교도 그런 그릇된 견해만 떠나버리면 결국은 불교와 일맥상통합니다. 왜 그런가하면 성자는 근본자리를 봅니다. 불성이라고 표현하던지 하느님이라고 표현하던지 불성자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할 때는 결국은 성자란 말입니다. 단지 그 표현의 차이 때문에 사람들이 잘못 생각해서 여러 가지 필요없는 논쟁이 생기고 다툼이 생기는 것이지 우리가 성자의 본래 마음자리를 그대로 수용한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로 회통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