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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40

 

석가모니 부처님과 인연해서 네 가지 기념일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4월 초파일과 열반 드신 2월 보름 열반재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출가하신 28일 출가재일과 128일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성도재일, 이 네 날이 석가모니 부처님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기념일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육신이 나신 것은 48일이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셔서 우주의 진리로 태어나신 날은 바로 성도재일입니다. 우리 인간의 한평생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일대사(一大事) 인연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 본래면목자리를 아는 것, 즉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문제를 모르고 평생 지낸다는 것은 결국 꿈속에서 지내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다른 철학이나 종교도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애썼지만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고는 그런 문제에 명확한 해답을 주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우리가 물을 마실 때 차고 따뜻한 것은 물을 먹어 봐야 알 수 있듯이 불교의 가르침도 자기 스스로 닦아보고 다른 가르침과 비교해 봐야 불교가 얼마나 훌륭한지 알 수 있습니다.

 

현대물질 문명이 최고도로 발달된 오늘날에 와서 물질이 무엇인가, 우주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 같은 문제를 풀어감에 따라 부처님 법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다시 재인식하게 됩니다. 인간성 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문제에 관해서 해답을 내릴 수 있는 가르침은 부처님 가르침뿐입니다. 현대과학이 발달되었다 하더라도 현대물리학도 물질의 근원은 잘 모릅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고, 정작 체험한다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문제입니다만 우리가 이렇게 참선도 하고 애쓰는 것은 체험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보통 성도재일이 가까워오면 선방에서는 용맹정진을 합니다. 우리가 하는 용맹정진이 어디서 연원이 됐는가 하면 여러 가지 근거가 있겠습니다만 가장 가까운 전거는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입니다.

 

삼매(三昧)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정사유(正思惟), 다시 바꿔서 말하면 바른 견해를 가지고서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른 소견을 가지고서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것을 보고 정사유(正思惟)라고 합니다. ()에 끌리지 않고서 오직 진리에다, 바른 견해에다 우리 마음을 딱 못 박아 두고서 동요하지 않는 것을 정사유(正思惟)라고 하는 것이고 인도 말로 해서 삼매(三昧)라고 합니다. 반주삼매(般舟三昧)란 것은 반주(般舟)는 인도 말인데 그것은 불립(佛立)이라, ‘부처 불()’, ‘설 립()’자 말입니다. 부처가 서서 앞에 보인단 말입니다. 따라서 반주삼매(般舟三昧)는 불립삼매(佛立三昧)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법당의 부처님 같은 불상이 눈앞에 훤히 보인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삼신(三身) 사상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눈에는 부처의 참다운 몸은 보이지 않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현세에 나오신 분이고 그분이 가신 뒤에도 그분의 형상을 만들어서 참배하니까 화신(化身)의 개념은 이해하시겠지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신(報身)이나 법신(法身)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보신(報身)은 부처님의 개념 가운데서 부처님의 자비나 지혜 같은 모든 일체 공덕을 다 갖추고 있는 그런 성품을 말합니다. 그러면 법신(法身)은 무엇인가, 법신(法身)은 그런 공덕을 갖춘 성품인 보신(報身)과 현상적인 모양을 나투는 화신(化身)을 통합한 부처님의 본체를 가르켜서 법신(法身)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 사상도 불교의 그런 삼신일불(三身一佛)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뒤 한 2백년쯤 지나 인도에서 아쇼카왕이라는 위대한 왕이 나왔습니다. 아쇼카왕은 인도를 통일시킨 후 티베트나 예수가 나신 이스라엘 지방까지 전도사를 보내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유포시켰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나시기 전에 이미 이스라엘 지방에는 부처님의 사상이 전파되었기 때문에 유대교나 신교의 교리에는 불교의 가르침과 유사한 것이 굉장히 많이 들어 있습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설(三位一體說)과 불교의 삼신일불(三身一佛) 사상은 거의 같습니다. 물론 불교 쪽이 더 심오하지만 거의 같습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부처님을 우리가 삼신(三身)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참 생명자리, 모든 공덕을 다 합친 종합적인 법신(法身) 자리, 또는 부처님의 그런 성품 공덕을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보신(報身) 자리, 그런 성품으로부터 현상적인 사람의 모습을 취한 화신(化身) 자리 이렇게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화신(化身) 차원에서는 석가모니와 우리가 둘, 셋으로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보신(報身)이나 법신(法身) 자리, 원래 부처님의 성품 자리는 똑같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겉에 현상적인 모습은 차이가 있습니다만, 본래 우주의 성품자리인 보신(報身)과 그런 본체성(本體性) 자리인 법신(法身)은 똑같습니다. 석가모니의 성품이나, 우리의 성품이나, , , 돼지의 성품이나, 무생물인 바위나 흙의 성품자리는 똑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체중생(一切衆生)이 개유불성(皆有佛性), 모든 중생이 다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중생(衆生)이라면 사람뿐 아니라 동물이나 또는 식물, 모두를 다 중생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또 대승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생물뿐 아니라 무생물까지 결국은 다 중생이란 말입니다. 이런 것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모든 존재에 불성(佛性)이 있다는 말입니다. 불성(佛性)이 있다는 말도 처음에는 사람의 머리나 심장 가운데 어딘가 불성이 있다는 그런 의미겠지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중생의 어느 부위에만 불성(佛性)이 있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 중생 전부가 다 불성(佛性)으로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천지우주가 불성(佛性)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불성(佛性) 이것은 물질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입니다.

 

생명도 그냥 생명이 아니라 전문용어로 하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영생불멸하고 또는 헤아릴 수 없는 무량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영생불멸하고 무량공덕을 다 갖추고 있는 생명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불성(佛性)이라 합니다. 따라서 어느 것이나 또는 어디에나 모두가 불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량공덕과 영생불멸하는 그런 생명을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중생이 어두운 번뇌 때문에 불성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부처님은 우주에 충만해 있다는 말입니다. 불성은 우주에 충만한 것인데 다만 우리 중생이 미처 보지 못합니다.

 

부처님 되고자 하는 공부가 여러 가지가 많이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참선(參禪)공부가 가장 지름길입니다. 요즈음은 불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명상이나 참선 비슷한 말씀을 많이 합니다만 불교에서 말하는 참선과는 약간 다릅니다. 참선을 분류할 때 외도선(外道禪)은 해탈을 목표로 하지 않고서 상대유한적인 건강이나 초능력같은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것보고 외도선(外道禪) 그럽니다. 요즘 유행하는 초월명상 또는 마인드 컨트롤 이런 것은 모두 외도선(外道禪)입니다.

 

 

그다음에는 범부선(凡夫禪)이라, 인과를 믿고 닦는 선을 범부선이라고 합니다. 외도(外道)는 인과를 모릅니다. 범부선은 인과는 믿지만 아직은 해탈을 구할 수 있는 그런 근기는 못 되고 상대유한적인 공덕을 구합니다. 그다음은 소승선(小乘禪)으로 불교에 귀의해서 아공(我空)이라 내가 비었다는 도리는 알지만 법공(法空)이라 나뿐만 아니라 천지 우주가 비었다는 도리는 아직 모릅니다. 아공(我空)만 믿고 해탈을 위해 닦는 선()이 소승선(小乘禪)입니다.

 

다음에 대승선(大乘禪)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이라, 자기도 비어있지만 일체존재가 다 비어있다는, 일체의 개념이나 자기라는 존재가 다 비어있다고 믿고서 닦는 선()이 대승선(大乘禪)입니다. 그다음은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 최상승선은 우리 모두의 본질이 본래 부처로서 일체무루공덕을 원만히 구족함을 신해(信解)하고 닦는 선()을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고 합니다.

 

부처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가 이대로 화장세계라. 천지우주가 찬란스러운 부처님 광명으로 충만해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가장 고도한 최상승선(最上乘禪)은 이 자리를 딱 믿고 닦는단 말입니다.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모두가 다 부처라는 말입니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무량신통지혜(無量神通智慧)를 원만구족(圓滿具足)이라. 모두가 다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원만히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 같은 분은 어느 누구를 보건 당신은 앞으로 성불할 분이니 내가 당신을 숭배합니다.” 그렇게 절을 했다고 합니다.

 

달마스님께서는 이 최상승선(最上乘禪)을 우리에게 말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경()만 보고 계행만 청정하면 제일이라고 생각하고 본래 부처의 자리를 보고서 공부하라고 말하면 못 알아듣습니다. 선오후수(先悟後修)가 되어야 비로서 바른 참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조혜능스님 그분 어록이 육조단경입니다. 그 경()에 있는 가르침을 한 마디로 말하면 선오후수(先悟後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입니다.

 

선오후수(先悟後修). ‘먼저 선()’, ‘깨달을 오()’, ‘뒤 후()’, ‘닦을 수()’자입니다. 내가 먼저 이치로 깨닫고 닦는 선()이 참다운 선()입니다. 먼저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은 최상승선(最上乘禪),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님이다. 부처님 공덕으로 충만해 있다는 도리를 먼저 이해하고 믿고 닦아야 선오후수(先悟後修), 먼저 깨닫고 나중에 닦는 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은 뒤에 화장세계가 아니라 깨달은 도인이 나오고 안 나오고 상관이 없이 우주는 지금 그대로 부처님의 화장세계란 말입니다. 바꿔서 말하면 본체에서 보면 천지우주는 지금 그대로 행복스러운 극락세계, 화장세계인 것이고 우리 중생은 본질을 못보고 겉만 보고 그림자만 보기 때문에 시비 분별합니다.

부처님께서 보는 관점만 사실이고 진실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제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진실을 못 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부처님의 안목을 내 안목으로 해야 참선(參禪)이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은 정혜쌍수(定慧雙修). 선정(禪定)이라는 정()자하고 지혜(智慧)란 혜()하고 정혜쌍수(定慧雙修)입니다. 우리 마음을 하나로 오롯이 집중을 시키는 것을 보고 정()이라고 합니다. ()란 부처님의 참다운 지혜를 말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부처님의 참다운 지혜에 마음을 집중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이렇게 통일시켜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균형되게 닦아나간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본래 불성자리는 지혜(智慧)와 선정(禪定)을 본래로 원만히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불성은 모두를 원만히 갖춘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 공부도 거기에 걸맞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천지우주가 조금도 차이 없는 일미평등한 부처뿐이다. 그 생각을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 생각 생각에 다른 망념이 끼어들지 못하게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 하나의 본체자리를 부처님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하느님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옴 마니 반메 훔이나 관세음보살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간절히 기원하면 들어주시는 그런 좁은 의미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 원리로서의 하나님, 우리 생명의 근본 성품자리를 말합니다. 즉 말하자면 천지우주는 부처님 뿐이고 하나님 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불교와 기독교를 하나로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그 마음을 지켜 나간다고 생각할 때 우리 마음은 번뇌가 들어설 틈이 없이 마음이 바로 불성과 영원적인 화장세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때야 우리 마음은 참다운 해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성실하게, 진지하게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은 범부여서 다는 못 느낀다 하더라도 원래 우리의 본 성품은 바로 부처인 것을 믿고 이해하며 닦아야 합니다. 본래 해탈되어 있는 것인데 우리 스스로 자업자득으로 잘못 배우고 잘못 듣고 잘못 생각해서 스스로 꽁꽁 묶여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푸는 것이 해탈이고 열반입니다. 영원의 자리, 오직 그 하나의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집중시켜 나가면 우리 마음은 참다운 삼매에 들 수 있습니다. 그때는 불성(佛性), 영원의 고향에 우리가 돌아갈 수 있습니다. 금생에 못가면 내생에 가야만 하고 몇 만생 헤맨다 하더라도 꼭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체중생(一切衆生) 개당작불(皆當作佛)이라, 본래 부처니까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길지 않은 인생 후회 없도록 열심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1989. 12. 23 내장사 벽련암 성도절 소참법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