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817

 

 

부처님 가르침의 팔만사천법문이 모두가 다 본래 부처라는 말씀을 고구정녕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참선하고 염불하고, 공부하는 것은 부처가 되기 위해 근원적인 업장을 녹이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우리 중생은 어떻게 해서 가르침을 빨리 깨달을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어느 분들은 불경을 많이 읽으면 그걸로 해서 빨리 깨달을 것 아닌가 또는 법화경만 읽어도 성불한다는 종파도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그렇게 소중해도 이 종파에 가면 이렇게 말하고 저 종파에 가면 저렇게 말합니다. 또 스님들도 각각이 자기가 공부한 방식대로 지도하면 불자님들은 어떻게 어디에다 마음을 붙여야 할 것인가 주저하게 됩니다. 또 제 말씀의 내용의 골자와 관계가 됩니다마는 한 가지 부탁할 말씀이 있습니다. 다행히 여러분은 전생의 복이 많으시고 훌륭한 지도 법사를 만나시고 부처님을 잘 믿으셔서 여기까지 왔습니다마는 여러분의 자녀간들을 신앙면에서 방치해 두고 소홀하게 그냥 믿게 놔둘 문제가 아닐 듯 싶습니다.

 

타 종교는 신도도 훨씬 많고 일반 중생 교화면에서도 시설이 크고 화려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그냥 불교 쪽으로 오리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가족끼리도 종교가 제 각각인 것이 우리 가정의 현실입니다. 지금 이런 때입니다. 우리는 부모로서 자기 자녀에게 어떤 종교는 어떤 종교다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믿고 있는 불교는 어떠한 종교냐고 물을 때 대답을 못하면 참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부모님들은 이런 물음에 대답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자녀 사랑의 큰 과제 가운데 하나가 바른 종교를 선택하도록 가르쳐주는 일입니다.

 

적어도 세밀한 비교종교학 공부는 못한다 하더라도 지금 유포되어 있는 기독교, 이슬람교는 어떠한 것인가 등 세계적인 몇 가지 종교만이라도 체계를 세워 두어야 소중한 자녀들에게 대답해 줄 수가 있습니다. 동시에 소중한 자녀가 전도몽상을 않도록 지도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은 다른 종교와 비교해서 다른 찌꺼기가 하나 없이 일체 만유가 다 부처님 아님이 없다는 위대한 가르침임을 배워 알게 해야 참다운 부모가 됩니다.

 

우리 불교의 가르침 중에서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르침에 대해서도 잘못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르게 가르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불성·불심이 내 마음의 어디에 있을 것인가를 잘못 알고 잘못 가늠할 수 있습니다.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이나 불심은 어느 고유固有한 데나 특정한 곳에 있지 않습니다.

 

일체 존재가 모두 불성뿐입니다. 일체 존재가 지금 이대로 불성이란 뜻입니다. 부처님 아닌 것은 하나도 없이 모두가 부처님만 있다는 뜻입니다. 내 몸, 이대로 부처님 덩어리라는 말씀입니다. 현대 물리학에서도 "모든 물질의 궁극적인 끄트머리가 원자原子, 소립자素粒子"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불성이라고 하면 산소는 무엇이고 수소는 무엇이고 전자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나옵니다.

 

그러나 사실은 각 원소라든가 원자라든가 하는 모든 존재의 끄트머리는 현대과학이 알지 못합니다. 모르면서도 알고 있는 것은 전자나 양성자 가운데는 아주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현대과학은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자폭탄, 수소폭탄 등이 곧 원자력이니까 눈꼽만한 원자력, 모든 물질의 근원적인 원자력 가운데는 엄청난 힘이 있다는 것은 압니다. 원자나 소립자 안에는 한도 끝도 없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우주의 끄트머리에 있는 에너지는 한도 끝도 없구나"하고 과학자도 감탄한다고 합니다. 이 불가사의한 힘이 바로 불성의 힘입니다. 어느 것도 불성을 떠나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온 천지 우주가 불성이며 부처님 아닌 것이 없이 나와 더불어서 한 몸 하나의 부처님인 것입니다. 불성 곧 부처님 성품이라는 우주의 정기精氣가 어떻게 진동하고 운동하고 결합해서 전자가 되고, 중성자가 되고 양성자가 되었는지는 앞으로 과학자가 밝힐 문제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일체중생개유불성이 사람의 마음만 일체중생 아닌가 하여 국한시켜서는 안됩니다. 일체중생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어느 것이나 분석해서 들어간 미세한 알갱이는 전자나 양성자나 모두가 중생입니다. 중생이기 때문에 그러한 중생 모두가 다 불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두두물물 화화초초頭頭物物 花花草草가 비로자나진법신毘盧遮那眞法身"이라 했습니다. 꽃 하나 풀 한 포기 하나 부처님 아닌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은 만유가 다 불성뿐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불성, 그것은 그저 존재의 근원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도 안보이는 원자의 힘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듯이, 그보다 더 미세하고 보다 더 근원적인 불성의 힘은 한도 끝도 없는 무한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불성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일체의 공덕과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성 차원에서는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소멸되지 않습니다. 또한 불성은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생명 자체입니다. 불성은 곧 생명이기 때문에 불성 속에는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모든 행복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불성은 불교 말로'대아大我'또는'진아眞我'여서 쉽게는 대아, 진아가 들어 있어서 중생이 말하는''라고 하는 것은 소아小我나 망아妄我입니다. 대신에 참답게 깨달아서 아는 바른 나, 이른바 참 진, 나 아자 진아와 대아, 그 안에 들어 있는 힘은 또 역시 한도 끝도 없습니다. 즉 불성과 똑같은 힘이 내 안에 들어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아, 대아가 바로 불성이요 불성은 내 본성, 자성, 본래면목이나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가 소중한 불성이고 부처님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처를 깨달아서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 삼명육통三明六通입니다. 삼명육통이란 말씀이 불경에 수백군데 다 있습니다. 삼명은 먼저 숙명통宿命通이라, 과거를 훤히 아는 지혜를 들 수 있습니다. 텔레파시나 현대적인 시설이 없이도 밝은 마음만으로 과거 전생뿐만 아니라 무수생까지 소급해 올라가서 다 아는 능력입니다. 다음은 천안통天眼通입니다. 천안통은 우주를 다 내다볼 수 있고 미래를 다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을 말합니다.

 

또 누진통漏盡通이 있습니다. 누진통은 번뇌의 근원을 알고서 번뇌를 다 없애고 마음을 깨닫게 하는 지혜입니다. 이와 같은 숙명통·천안통·누진통인데 성자가 온전히 되면 그 삼통三通을 다 안다는 것입니다. 출가해서 공부한다 하더라도 저나 어느 누구나 삼명통을 못하면 공부가 아직 덜된 셈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공부는 평생 동안 참선해도 공부가 다 된 것이 아닙니다. 다된 증거가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또 육통六通은 삼명통도 들어갑니다마는 천이통天耳通은 모든 음성을 다 알아 듣는다는 말입니다. 가령 영어를 안배워도 다 알아듣는 것입니다. 불성 가운데 들어 있는 힘은 이렇게 엄청난 것입니다. 누구나 우리에게 이런 힘이 들어 있는데 생각을 잘못해서 "나는 나일 뿐이다, 내가 아는 것은 금생에 나와서 배운 것뿐이다."이렇게 자기 능력을 국한시켜버리는 나쁜 생각 때문에 내 가진 능력을 확대 못합니다.

 

불교는 마음을 한도 끝도 없이 키우는 공부입니다. 제한된 우리 마음을 키워서 영원불멸하고 광대무변한 본래 마음자리, 본래 마음으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 부처님 공부입니다. 따라서 삼명육통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부처님 지혜이기 때문에 우리도 온전히 공부한다면 그런 신통神通이 꼭 나오는 것입니다. 신통이 안되면 죽어서 금생에 중생 생활을 하다가 내생 가서도 또 중생으로 태어납니다. 여러분도 윤회전생을 아시듯이 뱅뱅 돌아서 이리저리 윤회를 해서 개나 소나 축생도 됩니다.

 

지금 애완용 동물도 그 개가 전생에는 형제간이나 친구이거나 부모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느 것도 생명의 뿌리에서 보면, 불성 차원에서 본다면 다 똑같습니다. 똑같은데 어리석은 무명심 때문에 내 마음을 제한시켜 버리고 구속시켜버려서 능력을 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을 훤히 열린 광대무변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부처님 공부입니다. 참선·염불·묵조선 등 이런 여러 방법 중에서 어떤 방법이 제일 쉬울 것인가,

 

용수龍樹보살같은 조사는 부처님 정통 조사 가운데서 열 네번째 분입니다. 또 마명馬鳴스님은 12대 조사입니다. 또 대승불교의 아버지라 하는 분입니다. 이 두 분은 높은 조사들인데 용수보살은 우리 불교를 쉬운 문과 어려운 문으로 즉 이행문易行門과 난행문難行門으로 구분해서 말씀하셨는데 재가 불자님같이 바쁘고 공부할 여건이 어려운 분들은 당연히 쉬운 문으로 공부를 하셔야 되겠지요. 불교적 표현으로는 이행문을 택하셔야 될 것입니다.

 

이행문에 대해서 제가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자상한 말씀은 못드려도 어느 정도는 말씀드려야 여기까지 오신 보람이 있으시겠습니다. 이행문은 부처님을 흠모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내 생명이면서 우주의 생명입니다. 내 생명의 고향이며 내 본래면목입니다. 바로 우주 자체이시고 영원한 내 행복의 자리입니다.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면 찬탄하고 찬탄해도 부족한 우리의''입니다. 이 자리를 바로 파고들어서 놓치지 않는 것이 염불이고 갈앙심과 그리움으로 부르고 사모하는 것이 또한 염불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뭘 부르고 참구하든지 간에 우리가 감각적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물질 뿐'이라는 생각을 떠나서 찾아야 모든 존재의 실상을 파악하는 바른 수행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행의 길들 중에서 제일 쉬운 것이 이행문입니다. 그래서 그 쉬운 이행문은 어떻게 들어가는가 하면 인간의 마음에 대한, 부처님에 대한, 우리의 근본 생명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야 합니다.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하고, 기도를 하더라도 깨달음의 본고향에 대한, 부처님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해야 합니다. 부처님을 향한 하염없는 흠모심欽慕心이 없으면 우리 마음이 비약이 안됩니다.

 

마음이 빨리 정화되지 못합니다. 부처님께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그렁저렁 공부해서는 전생에 잘못 살고 잘못 배운 습이 빨리 녹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사무치게 본래의 자리, 우리 생명의 근원자리인 실상 즉 불성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없으면 가고 싶은 고향에 갈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