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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14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14

 

우리 불교의 명상법은 한 말로 하면 참선법 아니겠습니까? 참선법도 따지고 보면 명상법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차원의 문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마는, 참선법은 이른바 삼매법(三昧法)입니다. 명상이나 삼매나 참선이나 다 그 개념 내용은 비슷비슷합니다. 그래서 참선법을 이야기할 때는, 먼저 이른바 외도선(外道禪)이라고 하는 정도(正道)가 아니라 외도로 하는 선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외도명상법입니다.

 

외도명상법이란 어떤 것인가? 이것을 명상하고 있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몸도 건강해지고 운수도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즉 그러한 세간의 유위법(有爲法), 세간의 때를 벗어나지 못한단 말입니다. 이른바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하는 법이 외도명상법입니다.

 

범부(凡夫) 명상법(瞑想法)이 있습니다. 이것은 외도보다는 한 차원 더 높습니다. 어떤 것이 범부명상법인가? 그것은 적어도 인과는 믿습니다. 인과법을 믿는다는 것은, 아시는 바와 같이 선을 행하면 당연히 행복이 그 과보로 올 것이고, 악은 악의 업보로 해서 틀림없이 불행이 옵니다. 이런 정도의 인과응보의 범주 내에서 믿는 명상법이 즉 범부 명상법입니다.

 

그보다 더 높은 명상법이 이른바 소승(小乘) 명상법(瞑想法)입니다. 소승 명상법은 어떠한 것인가? 소승 명상법은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서, 이 몸이, 자기 존재가 본래로 허망한 존재임을 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과학적으로도 완벽한 가르침입니다. 과거 고전물리학이나 현대 물리학이나, 어떤 면으로 보나 부처님 가르침은 다 상통(相通)하는 완벽한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현대 물리학이 여태까지 애써 발견한 결과가, 모든 존재는 본래(本來)로 비어 있다는 소식입니다.

 

반야심경은 눈에 보이는 존재든 관념적인 존재든 모든 존재가 다 비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법문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오온개공(五蘊皆空)입니다. 오온개공이라는 말에 그렇게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뜻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적인 존재 뿐 아니라, 자기의 육신 또는 관념, 모두가 본래 존재성이 없단 말입니다.

 

애써 명상을 한다고 하더라도, “금쪽같은, 이 몸이 소중하고, 보이는 환경도 지금 내가 보는 대로 실존적인 대상이다고 생각한다면, 참다운 명상이 못 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처님 법에 따르는 명상법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상대적인 유위법(有爲法)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한계적인 것이지, 영원한 해탈의 법이 절대로 못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해탈법이란 영생의 행복을 보장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소승적인 명상법은, 우선 자기 존재가 본래로 존재성이 없다는 것을 믿고, 해탈을 위해 닦는 선입니다.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임시간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우리 몸입니다. 현대 물리학도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각 원소가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잠시 모였습니다. 우리 마음도 불교에서 말하는 수상행식(受想行識), 감수하고 상상하고 미워하고 분별 시비하고, 이런 우리 마음의 부스러기가 잠시 인연 따라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철학적으로 심오한 것입니다.

 

인연 떠나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연 따라 생긴 것은 인연을 다하면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인연 따라 생긴 것은 한순간도 머무름이 없습니다. 몇 억분의 1초간도, 찰라도 머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무상입니다.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에 의하면, 미세한 부분은 측정을 못합니다. 전자나 양성자나 이러한 것은 측정을 못합니다. 왜 측정을 못하는가? 정확한 위치를 측정할 수 없고, 정확한 운동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으로 아 이것이다, 저것이다, 의학적으로 어떻게 된다, 인과적으로 어떻게 된다, 그렇게 알고 있지만, 그것은 거시적으로 우리 눈에 보이는 한계에서 그런 것이지, 눈에 안보이는 소립자 단계에서는 측정을 못합니다. 위치와 운동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는 측정을 못합니다. 따라서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 불확실한 것이 이른바 우주의 일체 존재의 근원적인 모습입니다.

 

확실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성자(聖者)의 법, 부처님의 법은 확실합니다. 부처 불자(), 성품 성자() 이것이 불성입니다. 우주의 도리이기 때문에 진여(眞如)입니다, 그 자리는 다만 하나의 도리에 그치지 않고, 바로 우주의 생명, 우주의 에너지이기 때문에 불성이란 뜻입니다.

 

현대 물리학이라는 과학적인 학문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체의 모양이 있고, 모습이 있는 존재는 모두가 비었다, 이런 소식까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이 비어 있는 저쪽은 무엇인가? 이것은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자의 투철한 깨달음의 안목에서만이 불성 자리는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승(大乘) 명상법(瞑想法)은 무엇인가? 소승 명상법에서 비록 자기 존재의 허무성이나 자기 존재가 한 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더라도, 일체 존재 일체 만유는 무엇인가, 자기 존재는 그렇다 하더라도 달이나 해나 이런 일체 만유는 있지 않는가? 산천초목은 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단계는 아직은 소승적인 단계인 것입니다.

 

대승명상법은 비단 자기 존재만이 아니라, 대상적으로 느끼는 산하대지ㆍ삼라만상ㆍ해ㆍ달, 그 어떤 것도 존재하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라는 법입니다. 존재성이 없습니다. 오온개공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오온개공이 되어야, 내 몸뚱아리뿐만 아니라 일체 존재 모두가 본래 비어있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대승의 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치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치만으로 아는 것은 철학적으로 아는 것이지 실제로 우리가 증명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증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명하는 명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명상이 있어야 실지로 체험합니다. 명상이라는 말이나 삼매라는 말이나 참선이라는 말이나, 개념적인 내용은 우리 마음을 맑혀서 본래 마음자리로 돌아가는 공부 방법입니다. 따라서 기왕이면 차원 높은 명상법을 해야 불자로서의 자긍심으로 보나 책임으로 보나 되지 않겠습니까?

 

차원 높은 명상을 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보통 명상법도 어려운데 그렇게 최상승(最上乘) 명상법을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최상승 명상법이 제일 쉽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느끼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최상의 명상법이, 사실은 제일 쉽고 우리에게 행복을 보장하고 정신적 건강과 육체적인 건강에도 이익이 있는 법입니다. 그렇게 이익이 있고 재미도 한량없는, 또는 하기 제일 쉬운 법을 우리가 마다 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자의 법은 따지고 보면 간단명료합니다. 조금도 찌꺼기가 없습니다. 우주가 생긴 대로 우리 믿음이 생긴 대로 그대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존재는 본래가 개개원성이라, 본래로 원만히 성취되어 있습니다.

 

우리 존재란 것은 우리가 애쓰고 닦은 뒤에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바로 볼 수만 있다면, 이대로 본래로 모두 다 부처입니다. 잘나나 못나나 지체부자유자나, 또 사람뿐 아니라 개나 소나 돼지나 식물이나 모두 개개원성이라. 그 존재 자체 하나 하나가 모두 다 원만히 성취돼 있습니다.

 

우리가 종교를 공부할 때는 실천적인 것도 필요하지만, 철학적인 것이 따릅니다. 화엄경이나 능엄경이나 법화경이나 모두가 최고의 철학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부처님 가르침을 꼭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생명이 갖고 있는 본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몇 만생 다시 태어나고 태어나서 윤회한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은 본래 모습으로 다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 본래 모습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 한결 같이 부처가 됩니다. 그러기에 열반경에서도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체중생(一切衆生) 개당작불(皆當作佛)이라, 모든 중생이 필연적으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명상할 때, 우리의 마음 자리는 부처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른바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 같이 업장 많은 사람한테도 진여불성이, 우주 불성이 가득 충만해 있다고 어떻게 감히 말할 수 있는가?“ 하고 겁을 내지 마십시오. 우리 생각 가운데서 무슨 생각이 가장 고귀한가 하면,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방편이 없는 진실한 말씀을 하신 그 자리를 그대로 수용할 경우입니다. 그것이 생각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생각입니다.

 

그 무슨 명상법, 무슨 명상법 해서 별별 명상법이 다 나와 있습니다. 우리 스님네들도 거기에 빠져 가지고, 승복 입고서 거기에 다닌다고 하는 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참 비참한 일입니다. 부처님 공부를 어떻게 했길래 그렇게도 소중한 보배를 가지고 있으면서, 하찮은 자갈쪽 같은 것과 바꿀 것인가 말입니다. 대승명상법은, 내 존재뿐만 아니라 우주의 일체 존재가 인연 따라 잠시간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상함을 가르쳐 줍니다. 무상이란 말에 들어있는 의미가 굉장히 소중합니다. 무상이란 말속에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간성과 공간성이 없다는 뜻이 포함돼 있습니다.

 

인연 따라 잠시간 이루어진 것은 한 순간도 머무름이 없이 순간순간 변화해 마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존재성이 없습니다. 존재성이 없는 것은 일정한 시간 내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따라서 일정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어느 위치도 점유하지 않으니, 그것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다 그렇습니다. 내 몸이고 내 관념이고 다 그렇습니다.

 

인연생(因緣生)이기 때문에, 인연 따라 잠시간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느 순간도 어디에서도 그대로 머물지 않습니다. 어느 위치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있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인식이 되어야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시간성 공간성이 없다는 것은, 결국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그러한 혜안(慧眼), 곧 부처님의 투철한 안목은 25백 여 년의 사이에도 만유(萬有)의 진상을, 참다운 모습을 그대로 보신 것입니다.

 

부처님 명상법 같이 수승하고 위대한 명상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유위법적인 상대적인 명상법에다가 우리 마음을 놓을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은 25백 년 동안에 무수한 성자가 나와서 다 증명하고, 달마를 거쳐 육조 혜능스님까지 그대로 고스란히 전수한 법이 아닙니까? 삽삼조사(卅三祖師, 33조사)가 계계승승(繼繼承承) 가감이 없이 이어온 대승명상법입니다. 이런 법은 기간이 없습니다. 영원히 갑니다.

 

최상승 명상법은 우주가 다 하나의 생명임을 증명합니다. 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실 하나의 생명인데, 우리 중생이 중생심으로 보니까 나는 나 다르고 너는 너 다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가정을 구성할 때도,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어떠한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그것은 가정을 구성하는 구성원 하나하나를 다 부처님으로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소중한 가정화합의 묘결(妙訣)은 없습니다.

 

 

친구지간도 마찬가집니다. 자기 친구를 부처님 같이 대접하는 것, 그 보다 더 깊은 우정은 없습니다. 또 모든 사람을 다 부처님 같이 생각하고, 서로 부처를 증명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부처님으로 생각하는 단계는, 아직 이론적인 깨달음이지요. 그러나 참말로 어느 때 어느 순간에서나 부처님 같이 여실하게 볼 수 있는 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른바 명상이 필요합니다.

 

명상을 체험할 때, 우리 마음이 맑게 닦아지고 생리가 바꿔집니다. 명상이라는 것은 분명히 우리 생리를 고치어 달라지게 합니다. 욕심이나 진심(瞋心)으로 찌든 우리 지수화풍 사대가 청정한 사대 광명으로 이루어진 진정한 사대로 바꾸어지니 말입니다. 바꾸어지니 우리 마음이 얼마나 통쾌하겠습니까? 몸은 마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몸뚱아리도 거기에 따르게 됩니다. 따라서 가장 건강한 법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명상법, 불교적으로 말하면 최상승선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