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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11

 

 

오늘 탑비(塔碑) 회향불사를 하는, 우리가 모시는 금타(金陀) 대화상은 비단 어느 누구의 은사이니까 또 어느 분들의 어느 문중의 스승이니까 위대하다. 그런 차원(次元)을 넘어선 아주 위대한 대성자(大聖者)이십니다.

 

우리는 부처님 공부를 할 때 여러 가지 갈래가 많지 않습니까. 그 원리원칙대로 정통적인 정통성(正統性)을 그대로 계승해서 공부한 분도 있고 또는 그때그때 방편적인 공부를 하신 분도 있고 합니다. 그러나 금타 대화상께서는 부처님의 정통불법(正統佛法), 불법(佛法)도 그때그때 시대적인 상황 따라서 약간 쇠미도 되고 또는 혼란스러운 때도 있고 또는 종파(宗派)가 분열되다 보면 그때그때 우열 논쟁이 생겨서 그때그때 종파에서 나온 이른바 법집(法執)하는 국집된 그런 수행법도 있게 됩니다.

 

그런데 금타 대화상께서 가르친 법은 이것은 부처님 당시부터 내려오는 이른바 근본불교(根本佛敎), 근본불교도 그대로 다 수렴을 하고 또는 달마대사(達磨大師), 달마대사라는 분은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 정통조사(正統祖師)28대 조사입니다. 28대로 부터서 중국의 6조 혜능대사(慧能大師) 대대로 중국에 와서 육조대사까지 나와 있는데 우리 한국불교(韓國佛敎)는 어느 때나 참선(參禪)하는 선종(禪宗)을 위주로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선()과 교()가 원래 따로 없는 것이고 또는 염불(念佛)과 선()과 따로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원통불교(圓通佛敎), 회통불교(回通佛敎)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달마스님 때부터 육조혜능대사까지 내려온 참선법을 순수한 참선법이라 이렇게 말들을 합니다. 즉 말하자면은 어느 종파(宗派)라든가 그런 것에 조금도 걸리지 않고서 부처님께서 전수하신 정법 그대로 달마스님께서 이쪽 동쪽나라로 와서 그렇게 전수(傳授)를 하셨고 또는 육조혜능 스님 때까지는 2조나, 3조나, 4조나, 5조나, 다 똑같은 그야말로 일사불란한 법맥(法脈)으로 해서 육조혜능스님 때 와서 마무리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가르침이 육조단경, 육조 스님께서 스스로 저술한 것은 아닙니다. 그 당시 제자분들이 육조스님 말씀을 그대로 기록해서 남긴 참선의 교과서 같은 훌륭한 귀감이 육조단경(六祖壇經)입니다. 그런데 육조단경 정신이 그 뒤로 마조스님이나 남정 보은스님이나 또는 조주 종승스님이나 임제스님이나 그런 분들까지는 그대로 다 계승이 됐습니다. 그러나 송나라 때 여러 가지 종파가 생기니까 종파에 따라서 서로 자기 종파가 훨썩 좋고 다른 종파는 별것이 아니다. 이렇게 할 수밖에는 없겠지요. 그래서 그런 때 불교(佛敎)의 순수(純粹)한 참선수행법(參禪修行法)이 더욱 혼란을 거듭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 고려(高麗) 때 그런 혼란을 거듭한 상황에서 그대로 한국에 전승이 돼서 우리 한국선도 약간은 혼란을 면치는 못했습니다. 특히 고려 말엽 때는 우리 불교가 얼마나 혼란스러웠습니까. 그러다가 조선 오백년 동안에는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불교인들은 중국(中國)과 교류를 못 했단 말입니다. 따라서 고려(高麗) 말엽 때 혼란스러운 우리 불교 상황이 그대로 조선 오백년 때 굳어 버렸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 오늘날 까지도 나쁜 영향이 상당히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금타 대화상께서는 육조 혜능대사의 가르침 그대로 복귀해야 된다. 이렇게 역설(逆說)하시면서 금강심론(金剛心論)이라, 금타 대화상께서 저술(著述)하신 유고를 모은 책이 금강심론 아니겠습니까. 금강심론에서 재차 역설 하신 것인데 그것도 그냥 말씀으로만 역설 하신 것이 아니라 금타 대화상께서 스스로 실참실구(實參實求), 스스로 깊은 삼매(三昧)에 들어서 통달(通達)하셨단 말입니다. 그래 가지고서 통달한 회향으로 해서 저술한 것 이 금강심론에 있는 금타 대화상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세상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혼란스러우니까 필연적으로 불안스럽지 않겠습니까. 이런 때 있어서는 꼭 무슨 일을 하던지 간에 정통성이 필요합니다. 조그만 사업이나 또는 가정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꼭 철학(哲學)이 필요합니다. 철학 그러면 어렵게 생각이 되시지마는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원리원칙대로 한다는 말입니다. 원리원칙대로 하는 것이 철학을 떠나지 않는 바른 정당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불교계도 마찬가지 입니다마는 상당히 혼란 상황을 거듭한단 말입니다. 스님들끼리 싸우기도 하고 종단(宗團)이 너무나 수가 많아서 더러는 종교무용론(宗敎無用論)이라, 이런 말까지 나올 정도로 혼란스럽단 말입니다. 다른 나라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국 뿐만 아니라 기독교나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이 그 원인이 어디가 있는가 하면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통성(正統性)의 결여 정통성의 혼미란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세계(世界) 종교 일반에 있어서도 가장 시급한 문제가 뭣인고 하면은 우리가 정통성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독교도 예수님의 사상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마태복음서나 누가복음서에도 있습니다만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구하라 그러면은 모든 것은 그대에 게 곁들어지리라먼저 순수(純粹)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라 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구하라, 그러면은 모두는 그대에게 다 곁들어지리라

 

우리 부처님 말씀은 보다 명백합니다. 우리 인간성의 본래 자리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불심(佛心) 아니겠습니까. 불심이라, 부처불()자 마음심()자 불심(佛心)이나,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이나 똑같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면 불성은 인간만, 우리 인간만이 마음마다 불성이 있겠지 우리 인간의 본성이 불성이겠지 이렇게 가볍게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물론 우리 마음의 본성이 불성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불성은 우리 마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밖에 나 안이나 또는 언제 어디에나 충만해 있는 우주(宇宙)의 바로 본성(本性)입니다. 이 불성이라 하는 우리 인간성의 본바탕인 동시에 우주성의 근원적인 생명자리 이 자리가 바로 이른바 본체성(本體性)자린데, 이 불성자리를 우리가 놓쳐 버리면은 참다운 불법(佛法)이 되질 못하고 우리 행동도 규범을 잃어버립니다.

 

오늘날 도처마다 각 종교가 혼란스럽고 또는 인간사회가 여러 가지로 해서 혼미와 불안을 거듭한 것은 뭣인고 하면은 우리 정신지도를 할 수 있는 정신지도를 담당하는 각 종교(宗敎)들이 서로 정통성을 찾지를 잘못해있다는 말입니다. 금타 대화상의 위대한 점은 아까 말씀마따나 바로 그 정통성, 정통성(正統性)을 그냥 철학적(哲學的)으로나 학문적(學問的)으로 말로만 배우신 것이 아니라, 투철한 실참실구(實參實求), 투철한 깊은 삼매를 통해서 체험을 하셨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그렁저렁 공부할 때는 아닙니다. 그렁저렁 공부해서는 부처님의 가피도 얻지 못하고 우리한테 큰 보은을 우리가 가질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철저한 윤리도덕(倫理道德)이 기반이 되어야 됩니다. 이른바 계율(戒律)을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계율을 지키지 않고서 우리가 부처님의 법을 깨달을라고 생각하면 그때는 연목구어(緣木求魚)입니다. 나무 위에 가서 물고기를 구한다는 말입니다. 도저히 얻을래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철저한 윤리도덕을 지켜야 됩니다. 그래서 지조(志操)가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큰소리해도 깨달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금타 대화상의 위대한 점은 바로 불교의 정통성을 재차 천명(闡明)하신 그런 분이기 때문에 위대하다. 그런 말씀을 제가 드렸습니다. 그러면 어느 대목이 그와 같이 정통성을 천명하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궁금들 하시겠지요. 육조 혜능스님께서는 그분은 학문적으로 많이 닦으신 분은 아닙니다. 오로지 마음 깨달아서 마음의 불성(佛性) 자리를 깨달아서 위대한 성자(聖者)가 됐던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자기 생명의 우리 생명의 근본 바탕인 동시에 우주생명(宇宙生命)의 근본(根本) 자리인 불성(佛性) 이것은 학문적(學問的)으로 깨달아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번뇌(煩惱)를 소멸시켜서 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주에는 불성 외에 또 무엇이 있는 것인가? 우리는 분명히 아셔야 됩니다. 방금 제가 말씀드리는 원리도 역시 정통성 이른바 정견(正見)이라 바른 견해, 바른 견해에 대해서 말씀하시고자한 것이고 또 어느 도인이나 다 그렇습니다. 저도 그분들 따라서 제가 원만 무결하게 깨달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분들 따라서 그분들 말씀을 옮겨드리는 것입니다.

 

불성이라 하는 것은 어디에 있고 없고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내 마음의 본성인 동시에, 우리 몸도 모두가 다 우리 몸전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불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또는 산천초목(山川草木)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한 말로 말하면은 우주는 바로 불성뿐입니다 우주는 오로지 한결같은 생명(生命)의 실상(實相)인 불성(佛性)뿐입니다. 불성을 깨달으면 성자(聖者)인 것이고 불성을 깨닫지 못하면은 범부 중생(凡夫衆生)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불성을 얼마만치 깨닫고 있습니까. 우주는 오직 불성뿐입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우주는 하나님뿐입니다.

 

먼저 불성을 구하라, 먼저 부처를 구하라,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도 부처지만은 참다운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과거, 현재, 미래, 언제나 계시는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생명 자체 생명의 본당, 본질 자체가 바로 참다운 부처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