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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12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가르침이 어렵다고 절대로 생각을 마십시오. 제일 쉬운 것입니다. 왜 쉬운 것인가? 말을 바르게 하고 생각을 바르게 하고 우리 행동을 바르게 하면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말이나 행동이나 우리가 쉽게 알아볼 수가 있지마는 생각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좀 어려운 문제 아닙니까. 우리 생각 가운데 가장 바른 생각이 무슨 생각인가? 이것은 우리 마음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 마음의 주인공(主人公) 자리 우주(宇宙)의 본래자리, 우리 마음의 주인공이나 우주의 본래면목은 똑 같습니다.

 

우리 마음이 지금 모양이 있습니까. 모양이 안 보이지 않습니까. 또는 우주생명인 부처, 법신부처님 자리는 모양이 있습니까. 그도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주 생명 자리나 우리 마음자리 나 똑 같은 것입니다. 모양이 없으면서 시간(時間) 공간(空間)을 떠나 면서 분명히 존재하는 명명백백(明明白白)히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자리란 말입니다.

 

우리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다 외이지 않습니까. 또는 옴마니반메훔주문(呪文)도 외이고 참선(參禪)도 하고 또는 화두도 들고 합니다. 뭣 땜에 하는 것인가? 그것도 역시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의 본래자리 우리의 본래면목인 동시에 우주의 참 생명인 실상(實相)자리를 보고자 해서 그런 것입니다. 금생에 너무나 짧고 할 일도 많은데 어떻게 그런 걸 다 할 것인가? 그러나 금생에 할 일이 많지마는 그런 일 가운데서 가장 급하고 가장 소중한 것이 자기 생명의 본바탕을 아는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의식개혁(意識改革)을 해야 된다. 우리 마음을 바꿔야 된다. 참다운 자아를 참나인 진아(眞我)를 또는 대아(大我)를 구해야 된다. 이런 말씀을 흔히 하지 않습니까. 세속인들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참다운 나가 뭣 인가? 참다운 자기 주체의식(主體意識)이 무엇인가? 이렇게 따질 때는 철학(哲學)도 조금하고 뭘 좀 아셔도 대답을 잘 못 한단 말입니다. 철학을 했다 하더라도 철학도 여러 갈래가 있지 않습니까. 참다운 자기, 참다운 자기주체의식, 참다운 자기 본래면목은 역시 성자(聖者)의 가르침이 아니면 제대로 밝힐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의 모든 번뇌(煩惱) 때를 다 없애서 우리 마음이 본래(本來)의 상태로 되는 분이 성잔데 성자의 가르침이 돼야 비로소 우리 마음의 실상(實相)을 안단 말입니다. 그 일은 제일 급한 일이고 또 우리가 미리 겁내지만 사실은 제일 쉬운 일인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 가지 수행 방법도 많이 있고 또는 가을인지라 우리가 명상(瞑想)을 깊이 해야 할 때 아닙니까.

 

명상도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별별 명상이 다 있습니다. LA나 그런데 가 살아보면 정말로 참 잘난 사람도 많고 똑똑한 사람도 많고 또 무슨 법 무슨 법 한도 끝도 없이 여러 가지 명상법도 있고 별법이 다 있습니다. 무슨 기를 어떻게 다스린다는 법도 있고 별것 다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어보면 그 사람들이 대체로 참다운 마음을 깨달은 분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제가 다 모르니까 확인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경험한 걸로 해서는 그분들이 마음을 깨닫는 성자(聖者)가 아니란 말입니다.

 

성자가 아니라고 생각 할 때는 상대적(相對的)인 것 밖에는 안됩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나 예수나 공자(孔子)나 노자(老子)나 그런 분들은 상대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분들의 가르침은 절대적인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조금도 손색이 없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다만 하나의 제도가 생기고 종파(宗派)가 생겨놓으면 그 종파를 지키고 제도를 지키기 위해서 무리가 생기기 때문에 군더더기가 많이 거기에 붙어서 그런 것이지 가르침 자체는 무슨 성자나 적어도 성자라고 하면은 다 똑같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공부할 때는 꼭 성자의 가르침을 따라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금타(金陀) 대화상을 숭앙하는 것도 금타 대화상은 실참실구(實參實求) 해서 그냥 말씀으로 철학적인 체계를 세워가지고 우리한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난행고행(難行苦行)으로 수십년 동안 참선(參禪)을 통하고 또는 교학(敎學)을 공부해서 깨달으신 분입니다.

 

여러분들한테 배부해 드리는 금타 대화상의 비명(碑銘)에도 있습니다마는 39세 때 활연대오(豁然大悟)를 하신 분입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가 아니라 자기 생명(生命)을 온전히 바치고서 참선(參禪)을 하셨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제가 너무 지리하게 말씀드리면 한()데 앉으셔서 여러모로 불편이 많으시기 때문에 줄여서 말씀을 잘 드리겠습니다마는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성자의 가르침이 가장 원칙적이고 정통이기 때문에 제일 쉽습니다.

 

어디서 그냥 꾸어온 것도 아닌 것이고 남한테 빌려온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내 마음 그대로 나한테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 그대로 불성자리가 얼마나 행복스러운 자린가. 이것은 다른 도인(道人)들도 말씀을 많이 했지마는 특히 금타 대화상께서 금강심론(金剛心論)의 오지여래(五智如來), 오지여래란 항목이 있습니다. 그 항목 보면 꼭 진리(眞理)의 사진 같단 말입니다.

 

부처님한테 갖추고 있는 공덕(功德) 그 공덕은 바로 우리마음 공덕입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갖추고 있는 공덕은 바로 우리가 갖추고 있는 마음 공덕입니다. 이 마음자리를 그렇게 상징적으로 여실하게 말씀 했단 말입니다. 꼭 진리사진 같습니다. 그런 법문은 깨닫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법문입니다. 그리고 육조혜능(六祖慧能) 스님께서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밝히신 가르침, 그 밝히신 가르침이 뭣인가? 이것은 좀 복잡하셔도 여러분들이 기억을 꼭 해 두십시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 부처님, 부처님 그러면은 너무나 막연하지 않습니까. 부처님은 어떠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부처님 공덕은 어떠한 것인가? 이것을 간추리면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이라 말입니다. 법신, 보신, 화신은 우리 불교인들은 꼭 기억 해 두셔야 합니다. 기독교인들 치고서 천주와 성령과 성자를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기독교(基督敎) 삼위일체(三位一體)라 말입니다. 불교인들로 해서 법신, 보신, 화신을 모르면 불교도 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공덕은 바로 내 마음 공덕인데 내 마음이 하나의 무한의 가능성이 바로 부처님 공덕이란 말입니다. 한데 그 속성이 거기에 들어있는 공덕상이 즉 말하자면 법신, 보신, 화신입니다. 법신은 뭣인가? 법신은 우주의 생명자체를 법신 그럽니다. 나나 너나 어느 것도 그 속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또는 10억 우주나 은하계나 뭣이나 모두가 다 법신 가운데 들어갑니다.

 

그럼 보신은 뭣인가? 보신은 법신 속에 들어있는 한없는 공덕이란 말입니다. 자비, 행복, 지혜, 능력, 어느 것이나 다 보신에 해당합니다. 화신은 뭣인가? 화신은 이것은 우주가 바로 법신 보신인데 그 법신, 보신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현상계(現象界) 나나 너나 산이나 또는 태양이나 모두가 다 화신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법신, 보신, 화신하면은 나를 비롯해서 천지우주(天地宇宙)가 거기에 다 포함됩니다. 하나의 우주론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우주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주에는 오직 모두가 다 부처님뿐이란 말입니다. 우주는 부처님뿐입니다. 우주에는 부처님뿐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대승(大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은 우리가 어떻게 공부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벌써 뻔한 일입니다. 우주가 부처님뿐이거니 다른 것 생각할 것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오직 부처님만 생각하고 부처님 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제일 쉽고 제일 확실한 법입니다. 불자님들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주가 다른 것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중생(衆生)이 번뇌(煩惱)에 가리어서 잘 못 봐서 그러는 것입니다. 우주는 오직 하나부터 열까지 또는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 영원한 세월동안 부처님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뿐입니다.

 

모양 이것은 하나의 진여불성의 상()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상만 보고서 본바탕은 모릅니다. 우리중생은 마음이 어두워서 본바탕인 진여불성은 모르고서, 우주의 진리(眞理)니까 진여(眞如) 그럽니다. 진여란 말이나 불성(佛性)이란 말이나 똑 같습니다. 진리이므로 진여인 것이고 또 생명이므로 그 자리가 바로 생명으로서 불성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이고 말입니다. 이름으로 말하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 菩薩) 그렇게 되겠지요.

 

절대로 나누어 생각을 마십시오. 우주가 바로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이 그때는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제 말이 아니라 불교(佛敎) 대승경전(大乘經典)은 다 그렇게 말씀해 있고 또는 오늘 탑비(塔碑)조성 회향(廻向)불사라하는 우리 금타 대화상님 이분은 또 역설을 아주 강조했습니다. 특히 육조혜능까지 내려오신 정통법을 그대로 계승해서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아까 명상(瞑想)할 때에 참선(參禪) 입정(入定)할 때에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보리방편문이 바로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이 해 놓으신 어록(語錄)인 육조단경(六祖壇經)에 있는 그대로 말씀입니다. 육조혜능 스님께서는 소주 대범사란 절에 가셔서 맨 첫 번째로 하신 법문이 뭣 인고 하면은 내가 지금 그대들에게 일체삼신자성불(一體三身自性佛)을 훤히 알게 해서 여러분들 스스로 불성(佛性)을 깨닫게 하리라! 이 말씀이 육조단경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항시 공부하기를 삼신일불(三身一佛),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부처님 자리를 떠나지 말고 공부하면은 여러분들이 나한테 다시 올 필요도 없이 그냥 그 자리만 공부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했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그러시면 됩니다. 우리 스스로 법신, 보신, 화신을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계발을 미처 못 해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떠한 철학(哲學)보다도, 과학철학(科學哲學) 실존철학 (實存哲學) 무슨철학 어떠한 철학보다도 더 심오(深悟)하니 인간의 현 실존(實存)이 뭣인가 실존을 밝혀있단 말입니다. 금타 대화상은 비단 그러한 종교(宗敎)철학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라 현대가 과학만능시대(科學萬能時代)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우주(宇宙)의 본질(本質)과 형량(形量)이라는 저술을 하셨습니다. 그 저술(著述) 내용도 그냥 자연과학적(自然科學的)으로 기계론적(機械論的)으로 이렇게 말씀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마음하고 물질(物質) 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물질의 근원(根源)은 무엇인가.

 

지금 현대의 제아무리 정밀(精密)한 양자역학(量子力學)도 물질이 뭣인가 모릅니다. 다만 하나의 장 에너지라, 하나의 에너지라고는 말하지만 그 에너지의 실체가 뭣인가? 이걸 모른단 말입니다. 금타 대화상께서 우주의 본질과 형량이라는 거기에서 에너지의 실체(實體)는 바로 불심(佛心)이라 말입니다. 구체화 시키면 바로 금진(金塵)이라, 훤히 빛나는 하나의 빛이란 말입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하나의 방사선(放射線), 하나의 방사광을 가지고 있는 광선(光線)이란 말입니다. 양자(量子)나 전자(電子)나 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미세(微細)한 소립자(素粒子) 단계에서는 하나의 빛이란 말입니다. 빛의 근원적인 더 정밀한 빛이 뭣인가?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금진이라, 금진이란 말은 불교(佛敎)의 원래 구사론(俱舍論)에 있는 것인데 금타 대화상께서 재차 그것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우주는 결국은 금진이라 하는 광명(光明)으로 해서 우주(宇宙)가 충만해 있습니다. 어떠한 에너지고 모두가 다 금진광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금진광명은 뭣인가? 이것은 바로 불심(佛心)이라, 불성(佛性)이라, 부처님의 성품이 바로 금진광명(金塵光明)의 순수한 생명자체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대화상 탑비(塔碑)제막식에 이렇게 참여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우리가 꼭 기억 할 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정통성 문제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또는 하나의 종단적으로나 꼭 정통성이 살아 있어야 그래야 빛을 냅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제일 쉽고 가장 확실합니다. 우리 불교인들이 참선(參禪)공부를 하고 염불(念佛)을 한다 하더라도 그냥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그렇게만 해도 큰 공덕(功德)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왕이면은 보다 더 큰 공덕을 입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또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할려면 그 불성자리 내 생명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만유의 본바탕인 불성이 우주에는 항시 영원히 빛나있다. 무량공덕(無量功德)을 갖춘 불성(佛性)이 우주에는 끊임없이 시간 공간을 초월해서 영원히 빛나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는 것과 이렇게 생각 않고서 그냥 이름만 부르는 것과는 굉장히 차이가 있습니다.

 

화두를 참구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집니다. 그냥 덮어놓고 이뭣꼬라던가 ()’라던가 그냥 화두(話頭)만 의심한다고 해서 공부가 쭉쭉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를 드는 원인도 역시 근원자리를 근본 체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화두를 드는 것이지 그냥 덮어 놓고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어떻게 공부를 하던지 간에 참선(參禪)공부 하나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나 또는 염불(念佛)을 하나 주문(呪文)을 외이나 항시 우리 마음의 근원자리 불심자리를 놓치지 않아야 그래야 원칙적인 공부란 말입니다. 그래야 체를 안 여윈 자기 주체의식(主體意識)을 안 떠난 공부란 말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 제일 쉽습니다. 이렇게 하면은 다른 것 엿볼 필요가 없어요. 부처님 공부만 하기에도 우리는 너무나 바쁘고 자기 인생이 너무나 짧습니다. 우리인생(人生)의 의의(意義)가 뭣입니까. 인간존재(人間存在)가 자기한테 갖추고 있는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계발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