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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10

 

 

불교인(佛敎人)들은 역시 여러 가지 깨닫는 방법이 있습니다. 의심(疑心)하는 방법으로 해서 이른바 화두공안(話頭公案)이라 하는 그런 문제의식(問題意識)을 가지고서 깨닫는 방법을 삼을수도 있는 것이고,

 

또는 우주(宇宙)가 바로 어느 것이나 다 부처님 아닌 것이 없어 놔서 새삼스럽게 뭘 의심할 필요도 없고 또는 문제를 잡을 필요도 없이 천지우주(天地宇宙)는 모두가 부처님뿐이니까 부처님만 항시 생각하고 가면 되지 않겠는가. 나도 부처님이고 너도 부처님이고 천지우주 모든 자연현상(自然現象)도 부처님이고 하기 때문에 부처님만 생각하고 가면은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가 되지 않겠는가. 이런 방법도 있단 말입니다. 이런 방법은 이른바 염불(念佛)하는 방법 아닙니까.

 

또는 명상(瞑想)이라, 잠자코 명상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건 무엇인고 하면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이 우주가 바로 부처님 인지라 가만히 우리 마음을 보고서 마음을 관찰하고 마음을 관조(觀照)해서 마음을 닦아 나가면 본래 부처니까 아, 부처가 되지 않는가? , 그런 방법도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기독교(基督敎)인들을 두고 본다 하더라도 오 주여! 오 주여! 하고 그냥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마음이 다른 것에 헷갈리지 않게시리 하는 방법도 있겠지요. 그런 기독교식 방법으로 해서라도 그때는 기독교인들은 무방합니다.

 

또는 불교인이라 하더라도 꼭 부처님이라야 직성이 풀리고, 하나님이나 다른 이름을 부르면 직성이 안 풀어진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부처님 이름을 부르면 되는 것이고 하나님 부르나 뭣 부르나 팽 그 자리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서 더러는 가만히 이름도 안 부르고서 잠자코 마음을 비추어 가는 그런 방법도 있을 것이고,

 

또는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금생(今生)에 태어나서도 여러 가지 망상(妄想)을 많이 피우고 또는 헛된 행동(行動)을 많이 해서 이른바 업()을 많이 지었단 말입니다. 업을 많이 짓고 또는 과거전생(過去前生)도 업을 지어서 내려오는 것이고 말입니다.

 

우리 생명(生命)이라는 것은 우리 업식(業識), ()을 지은 우리 의식(意識)이 소멸(消滅)될 때까지는 항시 윤회(輪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過去)도 몇 생()을 두고 지금 우리가 윤회하는지를 모릅니다. 더러는 개가 되었다. 소가 되었다. 또는 부자가 되었다. 또는 그야말로 왕자가 되었다 말입니다.

 

불교(佛敎)에 십선업(十善業)이라. 열가지 선()을 닦으면은 다시 태어나면은 왕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지금 현대 평범한 사람이지만은 과거(過去)로 소급(遡及)해 올라가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여러 가지 존재(存在)가 많이 되었단 말입니다. 사람이 되고 개가 되고 소가 되고 또는 왕자가 되고 또는 우리가 죽어서 내생(來生), 금생(今生)에 깨달아서 부처가 되어 버리면은 윤회(輪廻)은 끝납니다.

 

그러나 금생에 깨닫지 못하고 죽는다고 생각할 때는 또 금생에 지은대로 내생으로 흘러간단 말입니다. 잘 못살았으면 지옥(地獄)이나 아귀(餓鬼)나 축생(丑生)이나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는 것이고 좀 잘 살았으면 인간(人間)이나 천상(天上)이나 또는 아수라(阿修羅)로 간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도리를 분명히 알고서 금생에 우리가 몇 십 년 되는 나그네 길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것은 기독교인나 불교인이나 이슬람인이나 모두가 다 그 교조의 말씀대로 우주(宇宙)의 본() 실상(實相), 우주의 생명의 본 실상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지상명령(至上命令)입니다. 어떻게 깨달아야 할 것인가? 그 깨닫는 방법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 종교의 교조가 말 한대로 우리가 그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불교(佛敎)인들은 염불(念佛)이나 또는 주문(呪文)이나 말입니다. 또는 가만히 명상하는 그런 명상(瞑想)이나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이고, 기독교(基督敎)인들은 오 주여! 오 주여! 하나님이시여! 하고 마음이 헷갈리지 않도록 거기다가만 초점을 맞추고서 기도(祈禱)를 모신다고 생각 할 때는 꼭 틀림없이 예수같이 참답게 우주의 본바탕을 깨닫는단 말입니다. 내 자성(自性), 내 참다운 생명(生命)을 구할 때는 꼭 생명(生命)적으로 인격적(人格的)으로 구하는 것이 우리가 성불(成佛)해 가는 하나의 지름길이 됩니다.

 

질문 : 요즘 현대사회(現代社會)는 과학(科學)이 너무 발달하고 물질적(物質的)으로 풍요(豊饒)를 누리고 있습니다. 먹고, 입고, 쓰고, 자고 이런 것들이 너무나 풍요를 누리는데요. 그런데 반대로 정신적(精神的)으로 도덕적(道德的)으로 황폐(荒廢)해 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인생(人生)이 될 건지 새로운 가치관(價値觀)을 간략하게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석가모니(釋迦牟尼)같이 살고, 예수님같이 살면 되는 것인데, , 그분들은 정말 어떻게 살았는가 하면은 인생(人生)과 우주(宇宙)의 근본(根本)도리를 깨달은 분들이란 말입니다. 근본을 결국 깨달아 놓고 보면 우주(宇宙)가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生命)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나 저것을 보나 어느 것을 보나 모두가 다 하나의 우주의 참다운 생명(生命)의 화현(化現)이구나. 다시 바꿔서 말 하면은 부처님의 화신(化身)이구나. 또 기독교(基督敎)식으로 말한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하나님의 형상화(形象化)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어느 순간이나 불교(佛敎)인들은 부처님을 안 떠나고 기독교(基督敎)인들은 어느 순간이나 하나님을 안 떠나고 그렇게 사는 생활이 가장 바람직한 좋은 생활입니다.

 

질문 : 현대(現代)생활이 워낙 바쁘다 보니까 진정한 자아(自我)를 찾는다는 것, 진아(眞我)를 깨닫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더라구요. 왜 사람들이 진아(眞我)를 찾아야지 되고 또 평소 생활 속에서 어떻게 추구(追求)해야 되는지 그것 좀 말씀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 참 아주 좋은 질문이십니다. 역시 참다운 진아(眞我), 참다운 나, 참다운 나를 모르면은 우리 생활이 부자연스럽고 불행(不幸)합니다. 모두가 다, 가령 우리가 지나치게 물질을 탐한다거나 또는 감투를 탐한다거나 또는 무슨 종파(宗派)를 탐한다거나 이런 것도 모두가 다 참다운 진아(眞我)를 몰라서 그럽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다운 진아(眞我)를 모르는 생활은 허깨비 보고 즉 말하자면 꿈보고 쫓아가고 허깨비가 참말로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있고 하기 때문에 마땅히 그런 허망(虛妄)한 것 보고서 우리 마음을 거기다가 팔게 되면은 그때는 필연적(必然的)으로 우리가 불행(不幸)하게 됩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개가 못에 비친 지 그림자를 하나의 지 그림자인데 사실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못에 있는 개하고 싸우기 위해서 들어가서 빠져 죽어버리듯이 우리 사람도 허망(虛妄)한 것을 쫓다 보면은 그와 같이 필연적으로 우리가 불행하게 되기 때문에 마땅히 진아(眞我), 참 나라는 것은 인생(人生)과 우주(宇宙)의 참 면목인데, 참 나를 깨닫는 것은 이른바 우주의 실상(實相), 실존(實存)을 아는 것이고 또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키에르케고르나 또는 니체나 그런 훌륭한 철인(哲人)도 역시 모두가 다 실상(實相)을 실존(實存)을 깨달을라고 애썼단 말입니다. 실존철학(實存哲學)은 모두가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성자(聖者)가 아니기 때문에 실존을 깨닫지는 못했겠지요. 실존을 깨달은 분들은 역시 석가(釋迦), 공자(孔子), 예수 그분들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실존(實存)을 깨달아야 참다운 진아(眞我)를 깨달은 것이 되기 때문에, 그런 깨달은 것이 쉽지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깨달은 분들을 우리 지표나 귀감으로 삼고서 우리도 깨닫기 위해서 애를 쓴단 말입니다.

 

그렇게 애쓰다 보면은 다행히 금생(今生)에 우리 정진력이 결집(結集)이 되고 우리 업장(業障)이 녹아지면 깨달을 것이고, 금생(今生)에 못 깨달으면 또 내생(來生)에 깨달을 것이고, 우리가 한번 금생에 깨닫는다는 서원(誓願)을 가지고 나갈 때는 금생에 틀림없이 우리가 바로만 살면은 깨달을 것인데 혹시 우리가 바로 살기가 어렵고 그때그때 물질(物質)생활에서 오는 마음이 산란하게 되면 또 내 생(來生)가서 깨닫는 것이고 한번 우리가 서원(誓願) 세우면 그때는 서원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생(今生)과 내생(來生)에 틀림없이 깨닫는, 이른바 진아(眞我)를 참 다웁게 구현하고서 또 만 중생(衆生)을 구제(救濟)하는 그런 생활을 하게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