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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09

 

우리 불교(佛敎)를 공부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은 제법(諸法)이 공()이라. 불교경전(佛敎經典)에서 제법공(諸法空)이라, 제법이라는 것은 모든 존재(存在)를 말합니다. 존재를, 존재하는 것은 다 비었다. ()이단 말입니다.

 

제법공(諸法空)이란 도리를 모르면은 불교를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가까스로 소승(小乘)만 아는 것이지 대승(大乘)을 이해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대승이라는 것은 정말로 성불(成佛)하는 가르침인데 또는 만 중생을 포섭해서 만 중생을 다 부처가 되게 하는 그런 가르침인데 대승이 되기 위해서는 방금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일체 눈으로 보이는 것이 허망(虛妄)하다. 모두가 다 공()이다. 이런 소식을 알아야 대승이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들은 모두가 공이라는 소식을 물리학(物理學)도 동원하고 불경(佛經)도 동원하고 여러 성자의 가르침 따라서 정말로 공()인 것을 허망무상(虛妄無常)한 것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된단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허망무상하지 않은 참다운 실상(實相)을 구해서 나갈 수가 있는 것이지 허망무상 한 것을 허망하다고 모르면은 이것은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불교인들이 흔히 무아무소유(無我無所有), 무아, 무소유가 무엇인가? 이렇게 의문도 가지고 있고 불교에서 무아무소유를 말하는데 무아무소유가 어째서 무아, 무소유인가? 무아(無我)라는 것은 내가 없다는 뜻 아닙니까. 무소유(無所有)는 내 소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있고, 내 집도 있고, 내 아내도 남편도 있고, 재산도 있고, 감투도 있는 것인데 왜 그런 소유(所有)가 없다고 하는가?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못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할 때는, 원래는 나도 있고 내 소유도 있는 것인데 다만 성인(聖人)들의 가르침이 그런 집착(執着)을 좀 털어버리기 위해서 무아무소유를 말씀하시고, 우리가 공부를 많이 해야 무아무소유를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기가 쉽겠지요. 그러나 본래(本來)로 진리(眞理)가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입니다. 본래로 내가 없고 또는 내 소유가 없는 것입니다.

 

내 몸이라는 것은 잘나고 못나고 상관이 없이 다만 각 분자(分子), 각 원소(元素)가 합해서 잠시간 이렇게 진동(振動)해서 이렇게 저렇게 모양을 보일뿐이란 말입니다. 일 초 동안도 내 몸이 그대로 같을 때가 없습니다. 그 부처님 법문에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이라, 인연(因緣) 따라서 이루어진 존재(存在)는 즉시 공()이라,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런 모양같이 보이고 있을 뿐인 것이지 어느 순간, 어느 순간도 같은 모양이 없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은 어느 공간(空間), 어느 시간(時間)내에도 존재(存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우리 중생(衆生)들은 그걸 모르니까 그냥 허상(虛像)으로 지금 움직이고 있는 것을 존재(存在)한다고 본단 말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중생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우기고 있고, 그렇게 함으로 해서 모든 인생고(人生苦)가 한량(限量)없이 전개가 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인생고를 없앨라고 하면은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명명백백(明明白白)히 있는 바와 같이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 오온법(五蘊法)이 다 공()했음을 비추어봐서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모든 인생(人生)의 고액(苦厄)을 이길 수가 있단 말입니다. 원래 라는 것이 꿈같이 또는 허깨비 같이 물속에 비친 달그림자같이 허망(虛妄)하다.

 

이렇게 생각을 분명히 해야 인생고(人生苦)를 없앨 수가 있는 것이지 나는 이대로 건재(健在)하고 어제나나 오늘이나 똑같다. 또는 백년 뒤에도 같을 것이다. 죽은 뒤에도 딴 데가 태어나도 금생(今生)에 받은 이런 몸으로 태어 날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래서는 인생고를 못 넘어 섭니다.

 

나라는 존재(存在)는 어느 시간(時間), 어느 공간(空間)속에나 그대로 고정적(固定的)으로 존재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 스피노자, 스피노자를 저는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분이 분명히 성자(聖者)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철학자(哲學者)로 해서는 굉장히 참 존경스러운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 왕자라든가 부자라든가 지위가 높은 대부들이 여러 가지로 도우려고 해도 그런 도움을 받지 않고서 그 안경알, 안경알을 자기 하숙방에서 갈면서 거기서 나온 수입가지고서 자기의 여러 가지의 하나의 저술(著述)적인 활동을 하면서 비용을 충당을 시켰단 말입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그 나중에 칸트라든가 니체라든가 쇼펜하우어라든가 그런 훌륭한 철인들의 스승 되는 그런 귀감을 많이 보이고 또 학설도 그랬단 말입니다. 스피노자가 말한 말 가운데서 모든 사람들이 회자하고 옮기고 서로 피차 탐구(探究)하고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 인고 하면은 영원(永遠)의 상()에서 현실(現實)을 관찰하라. - 영원의 이미지image에서 현실을 관찰하라. - 그러면은 모두는 영원에 참여한다.’ 성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역시 알기는 분별지혜(分別智慧)는 바로 알았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헌데 이분의 그 말이 그 뒤에도 여러 철인들의 입에 자주 회자가 되었습니다. ‘영원의 이미지에서 영원의 차원(次元)에서 현실(現實)을 관찰하라.’ 상대편을 대할 때도 영원의 차원에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차원에서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영원의 차원 즉 불성(佛性)의 차원 또는 하나님의 차원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오 주여! 하나님을 끊임없이 외우라고 하고 또 외이지 않습니까. 우리 불교인들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염불(念佛)할 때 끊임없이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 생각 생각에 상속(相續)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헌데 그런 말씀들이 그냥 하나님이나 부처님이 저 밖에가 있어가지고서 우리가 부르면은 우리한테 덕()을 주고 공덕(功德)을 준다. 우리한테 즉 가호(加護)를 준다. 이런 정도의 뜻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뜻은 무엇인고 하면은 그 실상(實相) 자체가 어느 것이나 모두가 부처님 아님이 없고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하나님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가 그 사람한테 대해서 가장 그 사람을 존중 하는 것이고 그 사람을 가장 대접을 잘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주고 그런 것보다도 그 사람을 본래(本來)대로, 본래대로 우리가 존중을 해야 그 사람한테 대해서 가장 좋은 대접이란 말입니다.

 

자기 아내한테나 남편한테나 누구한테나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부처님같이 알고 또는 아내를 하나님같이 알고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대접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방금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스피노자가 영원의 차원에서 현실을 관찰하라. 그러면은 모두가 다 영원에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야 됩니다. 우리는 지금 다종교(多宗敎)사회에 살고 있고 또는 가정(家庭)도 역시 다종교(多宗敎)가정적인, 그런 자칫 하면은 비극(悲劇)으로 치달릴 수가 있는 그런 소지가 다분히 있단 말입니다. 이런 때 있어놔서 우리가 꼭 성자(聖者)의 지혜(智慧), 성자의 지혜로 우리가 판단하고 관찰(觀察)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은 우리의 불행(不幸)이나 정보(情報)의 홍수(洪水) 가운데서 우리가 바로 헤치고 살 수가 없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지혜 또는 우리 부처님의 지혜, 공자의 지혜, 노자의 지혜, 이런 지혜들은 모두가 다 올바른 실상에서 실상적인 사실을 사실로 보는 그런 지혜입니다. 이렇게 제가 말씀드리면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일반사람들은 그런 지혜까지 도달을 할려면은 굉장히 어렵지 않는 것인가? 그런데 사실은 제일 쉬운 것입니다. 부처님 지혜 쪽으로 가기도 제일 쉽고 또 예수님 지혜 쪽으로 가기도 제일 쉬운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그분들은 모두가 다 우주(宇宙)의 도리에 딱 알맞게 말씀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이야 천차만별(千差萬別)로 말씀하고 생각하고 분별시비(分別是非)해서 그렇게 스스로도 괴롭고 남도 괴롭히지만은 그런 성인(聖人)들 말씀은 우주(宇宙) 생긴 대로 사람 생긴 대로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어느 것도 실상(實相)을 떠나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못난 사람들이든지 간에 못난 것은 허망(虛妄)한 모양이, 실지로 있지 않은 허망한 것이 못나게 우리 중생이 보이는 것이지 아, 예수님이 보고 우리 부처님이 보시고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못나게 안보인단 말입니다.

 

귀머거리나 또는 바보나 어떤 사람이나 또는 지체부자유(肢體不自有)자나 이런 것은 잠시간 금생(今生)에 인연(因緣)따라서 그렇게 지금 보일뿐인 것이지 그 사람의 실상(實相)은 똑같이 부처님이요. 바로 하나님의 딸이요 아들이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