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794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794

 

-반야심경 설법(5) -청화(淸華)대종사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 정신과 물질 아닙니까. 빛 색(), () 이것은 물질에 해당하고, 수상행식(受想行識) 이것은 정신에 해당 합니다 즉 우리의 감각(感覺), 상상(想像), 또 의욕(意慾), 또는 분별(分別) 시비(是非)하는 식()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에서는 오온법(五蘊法) 그러면 우주만유의 법을 총망라해서 오온법 그럽니다. 오온이라. 방금 말씀마따나 인제 정신과 물질을 한꺼번에 포함했단 말입니다. 따라서 중생들은 모두가 다 오온법으로 해서 구성되어 있습니다. 헌데 우리 눈앞에 분명히 있게 보이는 -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분명히 있게 보이는 - 그 오온법이 다 비었다고 본단 말입니다.

 

부처님의 법문 차원이라는 것이 3차원으로 구분하는 것인데, 그 맨 처음에는 낮은 차원은 중생 정도에 맞추어서 모든 것이 선도 있고 악도 있고 너도 있고 나도 있고 말입니다. 이런 저급한 차원에 맞추어서 하는 법문 이것이 유교라, 있을 유(), 유교란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바로 보면 그것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림자 같고 또는 허깨비 같고 말입니다. 수중월(水中月)이라, 물속에 비친 달 같고 그런 것이지 우리가 보듯이 꼭 내가 있고 네가 있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걸 느껴야 씁니다.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꿈 몽(), 허깨비 환(), 거품 포(), 그림자 영(), 몽환포영 같이 우리 현실을 못 보면 그때는 불교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는 인생고를 제도하는 인생고를 떠나는 가르침인데 인생고를 떠나려고 하면 방금 말씀과 같이 일체만유가 우리가 보는 실존적인 것이 사실은 실존이 아니라 이것이 몽환포영이란 말입니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또는 물속에 비친 달이요 그와 같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런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지금 같은 과학도 무엇도 없고 문맹만 충만해 있는, 지금부터 2500년 전 이상 되는 인도사회에서 부처님께서 모두가 비었다하시면 그런 말을 알 수가 있습니까? 지금 사람들도 잘 모르는데 말입니다.

다 알 수 없으니까 초기에는 부처님께서 있다 없다 선도 있다 악도 있다 인제 네가 있다 내가 있다 그와 같이 중생차원에서 말씀 했단 말입니다. 허나 중생들의 근기가 좀 익어져서 좀 수련을 거친 다음에는 비었단 말입니다. 반야심경은 그와 같이 비었다 하는 그런 정도에 맞추어서 말씀하신 법문입니다.

 

그러나 다만 비어 있으면 그것이 허무(虛無)가 되어서 니힐리즘nihilism 같은 것이 되어 버리지요. 다만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빈 실상(實相)이 그때는 중도(中道)란 말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맨 처음에 있을 유()자 유교, 그다음에는 빌 공()자 공교, 그다음에는 부처님께서 꼭 하시고 싶은 말씀 실상 그대로 하신 말씀이 중도(中道)란 말입니다.

 

따라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비었다 하는 그런 가르침과 중도를 아울러서 합한 가르침입니다. 그러기에 어제 말한 바와 같이 공이 즉 색이요 색이 즉 공이란 말입니다. 색 이것은 물질을 말한 것이요 공 이것은 정신을 말한단 말입니다. 즉 물질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물질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마음이 안 보인단 말입니다. 중생과 성자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일반 중생은 마음은 못보고 그냥 형체만 본단 말입니다. 도인들은 형체를 봄과 동시에 형체의 근원인, 형체를 이룩한 순수한 그런 힘 순수한 에너지를 본단 말입니다. 그것이 마음인데, 따라서 성인들은 근원적인 순수한 마음을 보고서 마음에 비춰서 물질을 다루기 때문에 오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은 겉만 보고서 피상적으로 즉 말하자면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맹이는 모르고서 겉만 봅니다. 겉만 보니까 사물을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인간(人間)이 무엇인가? 인간이 이렇게 코가 있고 눈이 있고, 형체만 인간은 본단 말입니다. 사실은 알맹이는 우리 마음이 아닙니까. 내내야 마음이 나단 말입니다. 내 마음이 나인 것을 우리 중생은 몸뚱아리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내 몸이다 해서 집착을 합니다. 중생과 성인의 차이는 거기가 있습니다. 성자는 근원을 보고서 마음을 본체로 해가지고서 마음에 입각(立脚)해 버리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그냥 마음이 안 보이는 것이니까. 겉만 보고 따지니까 인제 사람 사람끼리 분열이 생기고 불화가 생기고 싸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반야심경에서 그 인생고(人生苦), ()이요, (), 또 헤어지는 고통, 또는 보기 싫은 사람과 만나는 고통, 이런 고통들을 이길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쓸 것인가?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 즉 오온 물질과 정신이 우리 중생이 보는 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그림자 같이 허망하다. 이와 같이 비었다고 비추어 봄으로써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일체 고액을 없앤단 말입니다.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이라, 즉 공에서 본다하면, 모든 것이 텅 비었다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 이것은 우리가 감수(感受)하는 우리 감각(感覺)을 말합니다. () 이것은 헤아리는 상상(想像)인 것이고, () 이것은 천류(遷流)라고도 말하고 의욕적인 의식을 또 말 합니다. 의지를 말하는 것이고, () 이것은 분별(分別)하는 우리 식을 말하고 우리 마음 작용을 수상행식 그렇게 말합니다.

 

성자가 바로 보는 그런 공 가운데는 아까 말씀마따나 성인들은 공을 보고 우리 범부들은 공을 못 봅니다. 공 그것이 사실은 실체의 근원입니다. 그런 공 가운데는 공중무색(空中無色)이라, 그런 색() 즉 물질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 같은 우리가 보는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학승들한테는 그런 말을 안 했지만 저 위에 있는 분들에게는 그런 말씀을 가끔 했습니다.

 

현미경(顯微鏡)을 쓰고 본다고 하면 그야말로 참 이렇게 안 보인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전자현미경을 쓰고 본다면 이렇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마치 누런 안경을 쓰고 보면 밖이 다 누렇게 보이고, 푸른 안경을 쓰고 보면 푸르게 보이듯이 우리 중생은 중생의 업()으로 중생의 업을 쓰고 보니까 너요 나요 좋다 궂다 하는 것이지 중생의 업을 떠나 버리면 그렇게 안 보는 것입니다. 일체만유(一切萬有)의 실상(實相) 일체만유의 본 모습, 본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도인이 본다고 하면 텅 비어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공중무색(空中無色)이라, 도인이 보는 공 가운데는 색 즉 물질도 없고 또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이라, 우리가 감수하는 아프다 또는 좋다 하는 그런 촉감도 없고 말입니다. 또는 상상하는 것도 인제 그것도 중생의 망상에서 오는 것이고, 우리가 하고 싶다 하는 그런 의욕적인 것도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우리가 분별 시비하는 것도 없는 것이고 이와 같이 그런 마음 작용도 없고,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따라서 눈으로 보는 시각(視覺), 귀로 듣는 청각(聽覺), 코로 냄새 맡고 있는 우리 후각(嗅覺), 혀로 우리가 맛을 보는 미각(味覺) 말입니다. 몸으로 느끼는 촉각(觸覺) 말입니다. 또 우리 의식(意識)으로 분별하는 우리 식활동(識活動) 이런 것도 결국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허깨비 보고서 있다고 그럽니다. 허깨비 보고서, 또한 동시에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란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눈으로 보는 색, 주위환경 여러 가지 물질도 없고, 또한 들리는 소리도 없고, 후각(嗅覺)으로 느끼는 향기도 없고, 미각(味覺)으로 오는 맛도 없고, 또는 촉각(觸角) 몸으로 느끼는 촉감(觸感)도 없고, 또 우리 의식(意識)으로 분별(分別)하는 일체 좋다 궂다하는 어떠한 법()도 없단 말입니다.

 

법 이것은 우리 법률이란 법이 아니라, 우리 의식으로 판단하는 모든 의식작용(意識作用) 모든 시비 분별 이것이 여기 있는 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로 본다면 - 우리는 바로 못 보는 것이지만 - 바로 본다면 사실은 이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와 같이 없기 때문에

 

무안계내지(無眼界乃至), 우리 눈으로 보는 색()이라는 것은 본래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 업()으로 해서 만들어서 그와 같이 보인 것이지 원래 없는 것입니다. 시각이라는 것이, 내지(乃至)‘...에서 ...까지그 말입니다.

이 말은 앞뒤 사이 중간을 생략하고 이어갈 때에 쓰입니다. 무안계내지(無眼界乃至), 눈으로 보는 세계도 없고, 무이식계(無耳識界), 무비식계(無鼻識界), 무설식계(無舌識界), 무신식계(無身識界), 무의식계(無意識界)라 우리 의식으로 판단하는 그런 경계도 없단 말입니다.

 

무무명(無無明)이라, 무명도 없다 말입니다. 무명(無明)이라는 것은 진리를 모르 것이 무명 아닙니까. 무지(無知)나 무명(無明)이나 같은 뜻입니다. 바로 보면 없으니까 내내야 무지나 같지요.

 

()에서 본다면 그 때는 무지도 없단 말입니다. 무지라는 것은 내내야 우리가 이것저것을 판단을 잘 못하는 것이고 또는 실상을 몰라서 무지라 하는 것인데 실상을 다 봐버린 도인(道人)들의 안목에서 무지가 텅 비어서 청정무구(淸淨無垢)한 그런 불성(佛性)밖에 없는 그 자리를 봐버린 사람들이 어디가 무슨 무명이 있겠습니까. 그와 같이 본 근원을 못 본데에 가서 무지 즉 무명이 있는 것이지, 텅 비어서 일체 것을 다 떠나버린 훤히 비춰보는 마음자리에서는 무지나 무명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지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중생 경계에서 무지야 지혜(智慧)야 하는 것이지 지혜고 무지고 다 털어버리고 그야말로 참 본 근본을 딱 읽어버린 그런 경지에서 무슨 무지가 있겠습니까. 무명도 없고,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이라, 무명이 없기 때문에 무명을 없애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무명을 다 없애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무명이 있다고 하는 데에서 상대법에서 무명이 있다고 하니까 무명을 떼어내려고 애쓰는 것이지 아, 무명이 원래 없는데 어떻게 무명을 없앨 필요가 있겠습니까. 무명을 다해버리는 무명을 없애버리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내지무노사(乃至無老死), 또한 동시에 우리가 늙고 병들고 죽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생사(生死)를 초월(超越)해 버리는 즉 말하자면 생()이 있고 사()가 있고 그와 같이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모양의 세계에 가서 죽음과 생이 있는 것이지 모양 떠나버리면 순수한 에너지의 세계 순수한 생명의 세계에는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불생불멸(不生不滅)한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그런 세계에서 무슨 늙고 병들고 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이런 늙고 죽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이라, 따라서 늙음과 죽음을 다 없애버리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생사(生死)라는 것이 인생고(人生苦)에서 제일 무서운 고생 아닙니까. 권력이 좋다 무엇이 좋다 하지만 우리가 구해서 얻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란 말입니다.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인가 하면 역시 우리 목숨이 죽는다 하는 죽엄의 공포 같이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벌써 죽엄을 떠나버린 생사를 떠나버린데 가서 무슨 죽음의 공포가 있겠습니까. 역시 그때는 늙어서 죽는다는 것을 다 없앤다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