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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793

 

 

-반야심경 설법(4) -청화(淸華)대종사

 

불교는 법문 심도를 3단계로 구분합니다. 맨 처음에는 있을 유(), 가르칠 교(), 유교(有敎), 유교입니다. 반야심경 같은 이런 법문은 상당히 마음이 세련되어서 마음이 정화가 되어야 아는 것이지 무식한 사람들은 잘 못 알아먹습니다. 그러니까 인제 무식 대중한테는 이런 법문을 않고서 그냥 유교라, 있을 유()자 유교는 무엇인고 하면 선도 있고 악도 있고 너도 있고 나도 따로 있고 이와 같이 자타 시비를 구분한 법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초기 법문은 모두가 다 있다 하는 일반 중생 차원에서 하신 법문입니다. 지금도 역시 이런 법문이 어려운데 하물며 부처님께서 가신지가 2500년 이상, 그 당시 사회는 보다 무식했겠지요. 그런 때는 이런 고도한 법문을 알아먹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에는 그냥 있다 없다하는 우리 중생 차원에서 니가 있고 내가 있고 선도 있고 악도 있고 그와 같이 그런 차원에서 인과(因果) 정도는 믿고서 악을 행하면 그때는 죄를 받는 것이고 선을 행하면 복을 받는 것이고 그와 같이 선악 인과를 따져서 하는 그런 법문 이것이 유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일반 세간에서 하는 유위교(有爲敎), 일반 도덕이라는 것은 유교(有敎)에 해당합니다. 기독교나 유교(儒敎)는 보통은 유교(有敎) 범주에 들어갑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또 물질도 있고 보석도 있고 그와 같이 그런 것이 유교이고, 허나 유교 이것은 실상(實相)을 바로 못 본단 말입니다. 가상(假相)만을 볼 수 있는 중생 차원에서 마친 교이기 때문에 이것은 참다운 것은 못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참다운 가르침을 설하기 위해서는 그때는 인제 지금까지 말씀한 유교는 이것은 참이 아니다. 일체 정신과 물질은 비어 있다. 그와 같은 법문 이것이 반야심경 같은 공교(空敎), 빌 공(), 가르칠 교(), 공교란 말입니다. 허나 텅 비어 있다는 공교 밖에 모르면 그때는 불교를 바로 또 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비어 있다 하더라도 텅 비어 있는 내용은 이것은 허무가 아니단 말입니다. 만약 불교가 텅 비어 있다는 그것밖에 몰라버리면 허무주의(虛無主義)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 분들이 더 깊이 못 들어가면 반야심경 정도에서 딱 그쳐버리면 자칫하면 허무주의에 빠져버린단 말입니다. 헌데 텅 비어 있는 그것이 아주 비어 있는 허무가 아니다 말입니다. 텅 비어 있는 그 가운데는 일체 공덕(功德)이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자비(慈悲)나 지혜(智慧)나 행복(幸福)이나 또는 기능(技能)이나 모두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일일이 다 우리가 열거할 수 없다 하더라도 간추리면 4가지 범주로 말합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항상 상(), 일체 부처님의 지혜, 공지혜(空智慧), ()에 들어 있는 생명이 그때는 영생한단 말입니다. 영생하는 그런 의미를 상()이라 합니다. 즉 말하자면 상주부동(常住不動)이라. 영생하는 그런 생명이 있다는 것이 상()인 것이고, 또는 낙()이라, 안락 할 낙(), 그 불성 가운데는 부처님 지혜 가운데는 일체 모든 행복(幸福)이 다 들어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치관(價値觀)의 전도(顚倒) 때문에 상대유한적인 물질 가운데 행복이 있다고 어거지를 씁니다만 사실 그 가운데는 없습니다. 순간순간 우리 정신의 혼미(昏迷)뿐입니다.

 

역시 참다운 행복은 불성 가운데 있는 -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 영원성 밖에는 없습니다. 그야말로 불변하는 불멸의 행복이 있단 말입니다. 불변의 행복 그것이 안락 낙(), ()입니다. 또는 나 아(), (), 아 이것은 그냥 우리 같은 작은 상대적인 아()가 아니란 말입니다. 일체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란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부가사의(不可思議)한 재주나 지혜나 기능을 부리는 아()란 말입니다. 불교 말로 하면 신통(神通)도 하고 기적도 부리고 말입니다. 그와 같이 신통 기적을 다 부릴 수 있는 그런 모든 재주를 다 부리는 것이 아란 말입니다. 나 아(),

 

또는 맑을 정(), ()이라. 이것은 조금도 번뇌가 없는, 흐림이나 또는 어떤 마음의 어둠도 없고서 조금도 번뇌의 흔적이 없는, 본래 청정한 그런 마음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영생하는 상()과 또는 행복이 다 갖추고 있는 락()과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아()와 또는 조금도 번뇌가 없는 청정무구(淸淨無垢)한 그런 청정한 정()과 이와 같은 이것이 불성 가운데 텅 빈 마음 가운데 꽉차있는 것입니다.

 

천지 우주는 다만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모든 것이 꽉차있단 말입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영생하고 또는 행복을 다 갖추고 있고 또 일체 것을 할 수가 있고 알 수가 있고 말입니다. 청정하고 이렇게 갖추고 있는 이것이 순수한 우리 마음 자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을 닦으면 원래 갖추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차근차근 그때는 이러한 것에 접근 되어 가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나 자고로 위대한 도인들은 이러한 사덕(四德)을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다들 증득(證得)한 분들이고, 중생은 아직 증득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항시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권력, 지위, 어떤 이성, 이것저것 갖추어진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속에 원래 갖추고 있는 역량이 방금 말씀한 상락아정이기 때문에 영생과 영생의 행복과 또는 일체 신통과 청정한 것이 원래 우리 마음의 본성이기 때문에 여기까지 못가면 우리는 항시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세상을 다 주어도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지구가 다 자기 것이 되어도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는 부처인 것입니다. 원래 모두를 갖춘 원만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원만한 부처가 못되는 한에는 항시 불안한 것입니다. 따라서 불안스러울 때의 행복은 행복이 아니지요. 따라서 성자만이, 저번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요한 복음서에도 예수님이 진리만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나니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실 진리만이 우리를 행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영생의 행복 또는 영생의 지혜 이런 것을 갖춘 것은 결국 우리 본성(本性) 불성뿐이다 말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불성에 가고자 하는 하나의 교언(敎言)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이 항시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허망한 것이다. 가상(假象)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보는 견해가 가상임을 바로 인식을 못하면 그때는 반성(反省) 못하는 것이고 참회(懺悔)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고 보는 것이 허망 무상한 불교말로해서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이걸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중생은 그림자를 쫓고 허망한 것을 쫓아서 생명을 낭비를 합니다만 우리 눈으로 보는 것도 허망함을 느껴가지고서, 허망한 것이 아닌 - 아닌 것은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영생하는 상() 또는 안락(安樂) 또는 신통자재하는 아() 또는 청정무비한 정(), 상락아정만 이것이 실존이고 영생의 지혜고 행복인 것입니다.

 

우리 본성이 바로 불성이고 지금 못 낫다 하더라도 우리 본성은 석가모니와 똑 같은 불성입니다. 그 가운데는 앞서 말한 상락아정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상락아정의 영생의 행복 지혜를 얻기 위해서 부지런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