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설법(6) -청화(淸華)대종사
또한 동시에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라, 고집멸도(苦集滅道) 이것은 사제법문(四諦法門)인데 부처님 일대 가르침을 가장 체계 있게 말씀하신 가르침 이것이 이제 고집멸도입니다. 사제법문 아닙니까.
아시는 분들은 다 외워가지고 있는 법문 아닙니까. 사제법문 말입니다. 고집멸도라, 고 이것은 인생고입니다. 즉 생로병사, 인생고 가운데서 가장 무거운 것은 생로병사 아닙니까. 낳고 늙고 병들고 죽고 말입니다. 태어났다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미운 사람과 만나는 고통, 구해서 얻지 못하는 고통, 이런 등등의 것이 인생고인데 우리가 바로 보면 사실은 고통뿐인 것입니다. 안 늙는 사람 누가 있고 또 평생 한 번도 안 아픈 사람 누가 있습니까. 따지고 보면 결국은 고통뿐이다 말입니다.
고통뿐인데 사람들은 고통이 아니라 안락이다. 안락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니까 그때는 조금만 고통스러우면 그냥 고생스럽다고 생각하고 짜증을 내곤 한단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삶 이것은 사실은 고통뿐인 것입니다. 인생은 고다. 인생은 고다. 이것이 고집멸도의 이제 맨 처음입니다. 허나 인생이 고면 고의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가 어디가 아프면 아픈 근원이 있겠지요. 고(苦)의 원인(原因) 이것이 집(集)입니다.
집(集)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은 탐(貪)·진(嗔)·치(痴) 삼독심(三毒心)과 우리의 행위(行爲;業)란 말입니다. 우리가 탐심(貪心)부리고 우리가 성내고 우리가 사물을 바로 못보고 그런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가 행하는 행동 그것이 여기 집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인간(人間)이 어리석음이 없고, 탐욕심도 없고, 분노가 없다고, 그러면 고도 없단 말입니다.
인간으로 우리가 어찌 태어났는가? 우리가 정말로 번뇌가 없다고 그러면 사람이 태어날 수가 그때는 없는 것입니다. 극락(極樂)에 올라가서 그야말로 영생(永生)해 버린다 말입니다. 또는 그렇게는 못 된다 하더라도 천상 가서 안락스럽단 말입니다. 허나 사람 정도의 결국은 탐욕심과 사람정도의 인제 분노심과 사람정도의 무명이 있단 말입니다. 사람정도의 그 어리석음, 탐욕심 또는 분노 이런 것이 아직 있기 때문에 이런 업에 끌려서 그때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모한테 우리 영혼(靈魂)이 -업식(業識)이- 즉 말하자면 업에 가린 그런 우리 영혼이 부동(浮動)하다가 거기에 알맞은 부모를 만나가지고 딱 거기에 인제 엄마 태안에 들어가서 그때는 잉태한단 말입니다. 이와 같은 업이 없으면 극락으로 가면 영생하는 것이고 또는 천상으로 가서 안락스러울 것인데, 업이 무거워서 탐심도 많고 또 성내는 마음, 바로 못 보는 어리석은 마음, 이런 업이 무겁기 때문에 인간 정도로 무겁기 때문에 결국은 인제 인간 정도에 맞는 그 정도에 맞는 부모 만나가지고 그때는 딱 거기에 붙어 가지고 인제 인간으로 태어난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는 여실(如實)하게 그것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지금 그 현대 생리학 보다 훨썩 더 세밀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즉 이와 같이 인생고라고 하지만 고는 그냥 우연한 고가 아니라 아까 말씀마따나 인간의 탐심, 진심, 그리고 어리석은 마음 즉 치심 아닙니까. 이것과 여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행동 이것이 즉 말하자면 집(集), 고를 모으는 원인이단 말입니다. 불교는 이와 같이 인과(因果)가 분명합니다. 고(苦)라는 과(果)가 있으면 반드시 그 원인(原因)이 있단 말입니다. 원인을 집이라 하는 것이고, 그러나 인생이 고와 집만 있다고 하면 인생이라는 것은 결국은 바로 죽음만 같지 못합니다. 안 태어난 것만 같지 못하고 말입니다.
허나 불교에서는 이와 같이 인생이 고가 있고, 고를 모으는 여러 가지 삼독심 같은 번뇌나 우리 행위 업이 있지만 또한 동시에 영생하는 - 고를 떠나서 영생하는 행복이 있단 말입니다. 영원히 안락스런 행복 이것이 멸(滅)입니다. 즉 말하자면 번뇌를 다 멸해 버린 형태란 말입니다. 탐욕이나 진심, 아까 말한 분노하는 마음이나 또는 어리석은 마음이나 이런 것을 다 없애버리고서 안락스러운 그런 경계가 이것이 멸입니다. 멸이 없다고 하면 불교는 의의(意義)가 없지요. 따라서 멸 이것은 불교의 이상향(理想鄕)입니다.
불교의 이상향 이것은 멸입니다. 허나 다만 멸이 있다. 거기에 그쳐 버리면 불교는 그때는 불교가 못된단 말입니다. 멸(滅)에 이르는 영생의 극락 영생의 행복에 이르는 방법 수단 이것이 도(道)란 말입니다. 멸에 이르는 길 이것이 도입니다. 도(道) 이것은 여러분들이 대체로 들어서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삼학도(三學道)란 말입니다. 우리가 계율(戒律)을 지키고, 마음을 모아서 통일 시키고 말입니다. 또는 지혜(智慧)를 닦는 것이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계(戒)·정(定)·혜(慧)라, 계율 닦고 또는 마음을 통일 시키고 또는 지혜를 닦고 말입니다. 삼학도! 더 부연시키면 8정도 이것이 멸에 이르는 행복스런 영생에 이르는 길입니다. 삼학도 또는 팔정도 말입니다.
지금 이와 같이 우리 인생고와 인생고의 원인과 또는 인생고를 떠나버린 영생 안락의 그런 세계와 거기에 이르는 그런 방법을 말씀한 것 이것이 인제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문(四諦法門)이라. 넉 사(四)자, 진실한 체(諦)자, 그래서 인제 ‘사제’라고도 하고 ‘사체’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불교는 대승, 소승, 밀교, 현교 여러 가지 갈래가 많이 있으나 따지고 보면 내내야 결국은 사제법문의 뜻을 이렇게 저렇게 풀이한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분들이 사제법문을 잘 외워두면 무슨 법문을 보나 아, 이것은 어디에 해당하구나 이렇게 알 수가 있습니다. 인생고(苦)와 또 인생고의 원인인 집(集)과 영생의 행복인 멸(滅)과 또는 영생의 행복인 그런 해탈의 길, 인생고를 멸해버리는 길 이것이 도(道)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느껴야 할 것은 멸을 분명히 보고, 인생은 고라는 것을 인식하고서 그러나 인생의 참다운 목적은 멸이다. 영생의 행복이다. 이것을 분명히 우리가 느끼고서 멸에 이르기 위한 그런 흠모추구(欽慕追求)하는 멸을 그리워하는 그런 마음 밑에서 도를 행해야 씁니다.
계율 지키고, 도덕적인 행을 안 취하면 멸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술 많이 먹고 싸우기 좋아하고 음탕하고 말입니다. 아무렇게나 그런 문란한 행동을 취하면 멸에 이르지를 못합니다. 역시 철저한 도덕적 행동 밑에서 우리가 생활을 해야만 마음이 맑아 온단 말입니다. 함부로 행동하면 그때는 정신이 통일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정신을 딱 모아서 통일을 시켜야만 그때는 그야말로 참 우리 마음의 본 뿌리가 부처인지라 말입니다. 우리마음의 본 뿌리가 멸(滅)을 증(證)하는, 멸과 상응된 영생 극락이 그 자리인지라, 우리 마음을 딱 모아가지고서 자꾸만 마음 뿌리로 가야 씁니다. 마음저변으로 가야 씁니다.
우리 중생들은 마음의 겉만 가지고 삽니다. 마음 뿌리는 부처고, 마음의 겉에는 우리 같이 이와 같이 아까 말한 삼독심(三毒心) 부리는 마음인 것인데 말입니다. 따라서 삼독심 부리는 탐심부리고 진심부리는 그 마음을 자꾸만 억제하고 누르고, 억제하고 누르는 것이 행습이 되면 그것이 도덕적인 행위다 말입니다. 즉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오로지 부처님을 흠모(欽慕)하는 한마음, 화두나 염불(念佛)이나 주문(呪文)을 외는... 자꾸만 우리 마음의 저변으로 가야 쓴단 말입니다. 그 저변은 내내야 부처란 말입니다. 불성(佛性)을 인격화(人格化) 시키면 부처님인 것이고 말입니다. 성품으로 보면 불성인 것이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녹음 일부 손실.....
분별(分別) 시비(是非)해서 체계를 세운 것은 일반 지식인 것이고, 참다운 영원 해탈의 길, 해탈의 슬기는 그때는 반야인데, 지혜와 지식을 구분해서 일반 중생이 알아서 분별해서 아는 것은 지식에 해당하는 것이고, 참다운 해탈의 슬기 이것은 지혜인데 불교 말로하면 반야란 말입니다. 반야심경은 내내야 해탈의 지혜란 말입니다. 헌데 이와 같이 아까말씀한 바와 같이 지금 쭉 여러분들이 제법공(諸法空)이라는 것을 전제를 두어야 합니다. 제법공 밑에서는 이와 같은 것이 모두 없는 것입니다. 잃어버리면 그때는 안 됩니다. 제법공(諸法空) 안에서는 그야말로 참 이런 것이 모두 없고 또한 동시에
무지(無智)라, 지식(知識)도 없는 것입니다. 중생이 따지고 분별하는 일반적인 지식도 없단 말입니다. 또 역시
역무득(亦無得)이라, 얻음도 없단 말입니다. 얻음 이것은 참다운 지혜, 반야의 영생의 지혜의 얻음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불교 말로 하면 유위법(有爲法)이라, 또는 유루법(有漏法)이라 우리 중생이 보는 가사 권력이 좋아지고 돈이 많아지고 말입니다. 또 몸이 건강해지고 한다는 그런 상대유한적인 얻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적인 것을 구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비록 생활에는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마음 닦는 그 자리에서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법공한 자리에는 모든 법이 다 비어 있다는 그런 실상의 지혜로 본다고 할 때는 고집멸도(苦集滅道)란 그것도 사실은 번뇌가 있다고 했을 때에 고가 있고 무엇이 있는 것이지 번뇌가 다 없어져 가지고 텅 비어가지고 인제 아,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청정한 세계에 무슨 고가 있고 또는 고의 원인이 있고 또 갔다가 무슨 도(道)가 있고 그렇게 할 수가 없지요. 따라서 일반적인 그런 우리가 안다는 것도 필요가 없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상대유한적인 그런 어떤 얻음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이와 같이 소득의 얻은 바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예 고(故)자, 연고 고(故)자, 까닭 고(故)자, 이와 같이 상대유한의 얻음이 없단 말입니다. 오직 순수한 지혜만 더 빛나고 할 뿐이지, 상대유한적인 얻음이 없기 때문에,
보리살타(菩提薩埵), 보살 보(菩)자, 이끌 제(提)자, 보살 살(薩)자, 강할 타(埵)자, 이것은 보살이라는 뜻입니다. 인도말로 하면 보디살타(bodhi-sattva)인데 한문자 음역으로 해서 ‘보리살타’라 하는 것입니다. 인도 말을 제대로 옮기지는 못했지만, 보살은 이와 같이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제법공의 지혜를 여러분들이 염두에 딱 두어야 씁니다. 모든 법이 상대유한적인 법이 텅 비었다고 하는 그 자리를 본다고 하면 아까 말씀마따나 안계 눈으로 보는 것도 없는 것이고, 고집멸도도 없고 일반적인 지식도 없고 이와 같은 것들이 다 없기 때문에 따라서 다 몰아서 우리가 그런 얻은 것은 그런 상대유한적인 유루법의 - 유루법 이것은 우리 중생이 느끼는 세계의 모든 법이 유루법입니다. 또는 유위법이고 말입니다. 이런 것이 없기 때문에 이런 소득(所得)이 이런 얻은 바가 없기 때문에 보리살타 보살은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波羅蜜多故),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 고로’ 그렇게 됩니다. 어제 배운 바와 같이 반야바라밀다는 도피안의 지혜, 피안이라는 것은 해탈의 저 언덕이란 말입니다. 차안은 우리가 사는 이런 생사하는 죽고 살고 또는 죄도 짓고 하는 세계가 이 차(此)자, 언던 안(岸)자, 이쪽이고, 피안(彼岸)은 저 피(彼)자, 저쪽 언덕이라, 인생고해(人生苦海)를 떠나서 저쪽 즉 말하자면 영생(永生)의 안락(安樂)스러운 경계(境界)가 피안이란 말입니다.
헌데 이 풀이는 피안에 이르는 다시 말하면 영생해탈(永生解脫)에 이르는 다시 바꿔서 말하면 성불(成佛)하는 지혜(智慧), 성불하는 지혜 이것이 반야바라밀입니다. 반야(般若)는 참다운 지혜 아닙니까. 바라밀다(波羅蜜多)는 도피안(到彼岸), 피안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불을 성취하는 지혜’ 이것이 반야바라밀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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