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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92

 

-반야심경 설법(3) - 청화(淸華)대종사

 

사리자(舍利子)! 잘 들어라.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이와 같은 그러니까 같은 이 시()자 이지만 아까는 바로라고 풀이했던 것을 이것이라고 지정명사로 풀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제법공상, 이와 같은 모든 법이, 제법(諸法) 이것은 일체 우주의 만법을 얘기합니다. 제한 된 것이 아니라 일체 우주 만법을 제법 그럽니다. ‘이와 같은 모든 만법(萬法)이 다 비어 있는 상()에서 본다고 할 때는그 말입니다.

 

제법공상(諸法空相)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반야심경을 천만번 외워도 앞서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나 이런 중요한 대목을 놓치면 별로 의의가 없습니다. 인생고를 떠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오온이 - 정신과 물질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춰봐야 쓴다.

 

이와 같은 중요한 대문과 또한 동시에 모든 법이 즉 앞에서 말한 모든 법이 다 비어 있다는 그런 실존(實存) 실상(實相)에서 본다면, 우리 중생은 실상은 못보고 실존을 못보고 가상(假相)만 봅니다.

이와 같은 모든 법이 다 비어 있는 - 비어있는 그 실상 - 실상에서 본다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생도 없고 멸도 없단 말입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 그때는 영생하니까, 가상을 본다고 할 때 우리는 상대적인 것만 본다고 할 때는 - ()이 있고 사()가 있고 모다 분별이 있지만,

 

우리가 물질이라는 것은 결국은 우리가 봐서 물질인데, 물질도 내내야 결국은 마음이니까, 모든 법이 상대유한적인 그런 것들이 다 비어버려서 - 다 비어버린 실다운 모습 - 참다운 실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야말로 참 생()도 없고 멸()도 없단 말입니다. 이것은 영생(永生)과 똑 같습니다. 영생하는 가운데서 무슨 생()이 있고 멸()이 있겠습니까.

 

사람 몸뚱아리 몇 천번 나고 죽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생명은 죽지 않고 낳지 않습니다. 인연 따라서 몸뚱아리만 낳고 죽고 하는 것이지 생명 자체는 생도 없고 멸도 없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이와 같이 낳음도 없고 - 원래 생겨남이 없으니 멸도 없습니다. 우리 중생은 근원을 못 보고서 그냥 겉만 본단 말입니다. 겉만 보기 때문에 인제 부모님한테 의지해서 나오면 나온다 하고 모양이 없어지면 그때는 죽었다고 합니다. 사실은 생명은 죽음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해서 공부가 툭 틔어서 본질을 보면 그때는 격세즉망(隔世卽忘)이라, 그때는 한번 생을 바꿔도 바뀜이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수원수생(隨願受生)이라, 자기 원하는데 가서 자기 멋대로 태어난단 말입니다. 천상에 올라가려면 올라가는 것이고 인간으로 올려면 인간세상에 오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육근청정(六根淸淨)이라, 우리 눈을 비롯해서 우리 몸을 구성하는 요소가 청정해야지요. 청정하려면 오랜 동안 삼매(三昧)에 잠겨야 합니다. 오랫동안 삼매에 잠기지 안하면 우리한테 있는 찌꺼기가 안 녹습니다. 찌꺼기가 녹아버려야 앞서 말씀한 탐심 진심도 안 일어나고 동시에 나()라는 생각도 없고 동시에 우리 몸뚱아리나 물질을 떠나서 몸뚱아리나 물질을 구성한 근본 요소를 우리가 알 수가 있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텅 비어있는 모든 법이 공했다는 실상(實相)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생도 없고 멸도 없고, 또한 동시에

 

불구부정(不垢不淨)이란 말입니다. 아니 불(), 때 구(), 아니 불(), 맑을 정(), 더러움도 없고 맑음도 없단 말입니다. 상대를 떠나버려서 오직 영원히 청정한 것만 있다는 것입니다. 불구부정이란 말입니다. 또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 아니 불(), 더할 증(), 아니 불(), 감할 감(), 말입니다. 더함도 없고 또 감하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모든 중생이 다 불성(佛性)이 있다고 합니다만 잘못 생각하면 석가모니한테는 불성이 많이 있고, 우리한테는 불성이 적게 있고,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만 사실은 석가모니한테나 우리한테나 누구한테나 불성은 똑 같이 있습니다.

 

다만 발견하는 정도가 얼마만치 더 많이 발견했는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천지우주에 충만한 불성을 다 발견한 분이고, 우리 중생은 아직 다 발견을 못했단 말입니다. 그것뿐인 것이지 불성 자체에서는 석가모니한테나 독사한테나 강도한테나 있는 불성은 똑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불성은 사람 하나 죽는다고 해서 불성이 줄어드는 것도 아닌 것이고, 또한 석가모니가 열반(涅槃)에 든다고 해서 불성이 안 줄어듭니다. 천지 우주가 다 파괴된다고 해도 불성은 안 줄어듭니다.

 

원자폭탄 핵무기가 우주를 진멸시킨다 하더라도 불성은 조금도 더함도 덜함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거품 같은 물질만 변동하는 것이지 순수 에너지인 생명자체 불성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더함도 없고 감함도 없단 말입니다.

 

시고(是故)공중무색(空中無色)이라,

이런고로 모든 법이 다 비어있는 것을 비추어 보는 그런 안목에서는 무색(無色)이라, 물질이 없단 말입니다.

 

반야심경이 지금 들어보시니까 상당히 의미심장(意味深長)한 법문 아닙니까.

이렇게 좋으니까 매일 매일 외이곤 하는 것입니다. 특히 신중불공(神衆佛供) 모실 때 중단에서 많이 하는 것인데 반야심경 외이면 저급한 신들은 못 알아먹으나 고급 신들은 알아먹고서 굉장히 환희심(歡喜心)을 내고서 신들이 상()을 터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모두가 다 공()이라 했으니까 상을 안 털 수가 있습니까.

 

따라서 신들이 상을 털어버리면 그와 동시에 상을 턴 - 그 상이 없는 자비심(慈悲心) 때문에 - 자비심으로 해서 우리 중생을 굽어보고서 중생(衆生)을 가호(加護)한단 말입니다. 또는 어떤 우리 환경이 약간 기분이 사나울 때에 암울할 때는 반드시 우리 분위기가 오염되어 있습니다. 우리 분위기를 구성한 순수한 에너지가 그만만치 조건이 안 맞아서 오염되어 있어서 이런 때에 반야심경을 외우면 효험(効驗)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생명을 구성한 자기 가슴이 청정하게 되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우리 주변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불교 법문은 모두가 다 우선 나를 정화하고 남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구분은 어디가 있는 것인가? 악은 이것은 우선 자기를 훼손(毁損)하고 남을 훼손한단 말입니다. 선은 그 반대로 자기를 우선 정화시키고 남을 정화시킵니다. 반야심경이 길고 시간이 제한되어 놔서 제가 허두만 썼는데 여러분들이 가셔서 잘 읽고, 반야심경 번역본이나 주석본이 굉장히 많이 나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