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설법(1) -청화(淸華)대종사
반야(般若)란 무엇인가?
반야(般若) 이것은 참 지혜(智慧)입니다. 우리 인간이 축적한 지식이 아니라 깨달아서 번뇌를 떠나버린 성자의 참다운 마음에서 우러나온 지혜가 반야입니다. 따라서 일반 중생한테는 사실은 반야는 없고 성자한테만 반야가 있습니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있습니다. 반야(般若)는 인도말로하면 ‘prajna' 그래서 인도 말을 따서 한자로 일반 반[般]자, 같을 야[若]자, 이것은 원래 인도 음인데 한 문자로 해서 반야라고 합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참 지혜‘ ’해탈의 지혜‘라고 합니다.
마하(摩訶:mahã<대(大)다(多)승(勝)묘(妙)>) 이것은 ‘위대하다’ ‘거룩하다’ 는 뜻입니다. 위대하고 거룩하단 말입니다. 따라서
마하반야(摩訶般若) 이것은 거룩한 지혜입니다.
바라밀(波羅蜜)이라는 것은 이것도 역시 불교에서 많이 씁니다만 ‘도피안(到彼岸)’이라, 이를 도(到)자, 이쪽은 차안(此岸)이고 저쪽은 피안(彼岸) 아닙니까. 가사 강이나 바다가 있으면 바다 건너 저쪽이 피안입니다. 반대로 이쪽은 차안이라 하고, 다시 풀이해서 말씀하면 우리 중생이 사는 - 번뇌에 쌓인 중생이 사는 - 세계는 차안에 해당하고, 중생이 고해(苦海)를 건너서 저쪽 언덕 이것은 피안 즉 해탈(解脫)의 경계 극락세계(極樂世界) 이것이 피안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바라밀이라는 것은 도피안이라, ‘피안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피안에 도달한다는 말입니다. . 따라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한꺼번에 풀이를 말씀드리면 ‘피안에 이르는 거룩한 지혜의 가장 골수인 경’이란 말입니다.
심경(心經) 이것은 경 가운데서 제일 골수(骨髓) 제일 중심(中心)이 되는 즉 말하자면 정수(精髓)가 되는 경을 심경이라고 합니다. 피안에 이르는 즉 말하자면 ‘영생의 해탈에 이르는 거룩한 지혜의 가장 귀중한 경’ 이것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입니다. 부처님 경전은 무슨 경(經)이든 소중하지 않는 경이 있으리요만 반야심경(般若心經)은 가장 짧은 동시에 불교의 모든 철학을 거기에 함장을 시켜 있단 말입니다.
이 짧은 시간에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전부 다 풀이할 수는 없습니다만 여기에 써놓은 이것만 풀이하면 나중에는 그냥 술술 자기 스스로 풀이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반야의 골수이기 때문입니다. 내용 풀이를 합시다.
앞서 말씀과 같이 피안에 이르는 - 영생의 해탈에 이르는, 우리 중생은 지금 죽고 살고 헤매고 번뇌를 일으키고 하는 지금 차안에 있는데, 중생의 그런 고생스런 고생 바다를 건너서 영생의 저 언덕, 영생의 피안에 이르는 거룩한 경이 즉 말하자면 가장 귀중한 경이란 뜻입니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똑 같습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을 보다 더 의미로 깊이 세길 때 관자재보살이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이나 성자나 우주만유를 모든 것을 자재롭게 조금도 막힘 없이 원만무결(圓滿無缺)하게 관찰(觀察) 할 수 있는 보살(菩薩)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볼 때 따지고 분별하지만 막히곤 합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막히지 않고서 상대유한적이지 않고서 절대적이고 말입니다. 부처님 같이 모든 것을 다 할 수가 있고 다 알 수가 있고 천지 우주를 다 통달하는 - 일체를 다 아는 자재(自在)로운 지혜 또는 자재롭게 모두를 다 관찰(觀察)하는 보살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도인(道人)이 아니면 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원칙은 관세음보살은 우리 중생을 구제(救濟)한다는 자비로운 보살이라는 거기에만 국한이 안 되고 일체만유(一切萬有)를 다 알아서 일체 모든 것을 다 알고 생사를 초월(超越)할 수 있는 지혜를 알아가지고 일반 중생을 영원의 저 언덕으로 인도하는 그런 보살 이것이 인제 관세음보살입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모든 고난 소리를 다 들어서 말입니다. 고난 소리를 듣고서 그대로 알맞게시리 제도하는 보살이 관세음보살인데 우리가 의미로 풀이할 때는 일대사를 자유롭게 조금도 막힘이 없이 통달무애(通達無礙)하는 그러한 지혜를 갖춘 보살이 ‘위대한 도인이’ 그 말과 같습니다.
모든 것을 다 깨달은 도인이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에 깊은 깊을 심(深)자, ‘아주 깊은 피안에 이르는 지혜를 행할 때’ 말입니다. 반야 이것은 지혜입니다. 중생이 따지는 그런 지식이 아니라 이것은 참다운 해탈(解脫)의 지혜 이것이 반야입니다. 반야하고 지식과는 구분해야 합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일반 중생이 축적한 여러 가지 알고 모르는 이것은 지식에 불과 한 것이고 반야 이것은 참다운 영생(永生)의 지혜입니다. 위대한 도인이 맨 처음에 이와 같이 영생의 피안에 이르는 영생의 지혜를 닦을 때 행할 때에 관자재보살이 깊고 깊은 영생에 이르는 즉 우리 중생의 고난을 떠나서 해탈에 이르는 다시 바꿔서 말하면 성불하는 지혜를 닦을 때에 어떻게 했는고 하면,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 비출 조(照)자, 볼 견(見)자, 다섯 오(五)자, 쌓는다는 뜻의 쌓을 온(蘊)자, 다 개(皆)자, 빌 공(空)자, 오온(五蘊)이, 다섯 가지 쌓여있는 것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추어 본단 말입니다. 오온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추어 본단 말입니다. 오온(五蘊)은 무엇인가? 오온 이것은 불교말로 하면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입니다.
색(色) 이것은 빛 색(色)자, 이것은 물질(物質)을 의미합니다. 수(受)는 받을 수(受)자, 우리 감각(感覺)을 말합니다. 상(想) 이것은 생각할 상(想)자, 이것은 우리 상상(想像)을 이르는 말입니다. 행(行) 이것은 우리 의욕(意慾)하는 힘 의지(意志)를 말하는 것이고, 식(識) 이것은 우리 의식(意識)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시 말씀 드리면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이것이 오온인데, 색은 이것은 물질에 해당하고 수상행식 이것은 정신(精神)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물질과 정신을 한 번에 말할 때 오온(五蘊)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에서는 천지 우주의 모든 것을 우리 중생이랑 통 털어서 유상(有相) 무상(無相), 유정(有情) 무정(無情) 다 털어서 한꺼번에 말할 때 오온 그럽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 안 보이는 것 하여튼 다 털어서 말할 때에 오온 그런단 말입니다. 그런데 관세음보살 같은 그런 위대한 도인들이 영생에 이르는 그런 지혜를 닦을 때에 맨 먼저 정신과 물질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춰본단 말입니다.
불교라는 것은 언제나 ‘내가 없다’ 또는 ‘물질이 공이다’ 하는 공 지혜를 떠나서는 불교가 성립이 안 됩니다. 좋다 궂다 또는 너다 나다 하는 그런 것이 있을 때는 불교는 깊은 의미를 우리가 음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내 앞에 네가 있고 내가 있고 또 선(善)이 있고 악(惡)이 있고 하더라도 그런 것은 중생 차원에서 보는 것이지 사실은 관세음보살이나 도인들이 볼 때는 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의 업장(業障) 정도로나, 중생의 업장 정도로 보니까 지금 밉다 곱다 귀엽다 하는 것이지 정다웁게 청정한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것이 없단 말입니다. 여기까지 못 느끼면 불교를 알 수가 없습니다.
즉, 우리가 보는 것은 결국은 다 비었다고 봐야 합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가 가사 이렇게 분자(分子)를 볼 수 있는 현미경(顯微鏡)을 쓰고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분자를 볼 수 있는 현미경을 쓰고 본다면 천지 우주는 다 분자로만 보입니다. 원자(原子)를 볼 수 있는 현미경을 쓰고 본다면 천지 우주는 그 때는 원자로만 보입니다.
부처님 같은 불안(佛眼)이라, 부처 불(佛)자, 눈 안(眼)자, 부처님의 안목(眼目)은 그 때는 천지 우주를 광명(光明)으로 보는 것입니다. 천지 우주의 근본 근원은 어떠한 물질이나 무엇이나 다 순수한 광명 에너지가 꽉차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현미경으로 알 수 있는, 현미경을 이용하지 않으면 전자(電子)도 못 보고 분자(分子)도 못 본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쓰는 안목 이것은 아시는 바와 같이 불교에서 말하는 삼독심(三毒心)이라, 탐욕(貪慾)이나 또는 성내는 그런 불룩거리는 마음이나 또는 어리석은 마음이나 이런 독심(毒心)에 가려서 바로 못 본단 말입니다. 바로 못 보기 때문에 꼭 나와 같은 존재가 있다. 네가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벽을 세워버립니다. 그런 경계에서 보는 것이니까 자꾸만 시비(是非)가 생기고 여러 가지 견해가 생긴단 말입니다.
헌데 참다운 진리를 아까 말씀마따나 영생의 해탈에 이르는 성불하는 그런 반야지혜를 우리가 얻을 라고 생각할 때는 맨 먼저 무엇이 중요한가? 아무리 내가 귀엽지만은 결국은 나를 비롯해서 천지 우주가 다 비어 있다는 것을 비춰 봐야 쓴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 만이,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인생고(人生苦)의 생로병사(生老病死)나 일체의 고액을 다 면할 수가 있다 말입니다. 다 비어 있다고 못 보는 한에는 절대로 인생고해를 못 면합니다. 권력이나 또는 지위나 어떤 그야말로 참 특수한 물질이나 이런 걸로 해서는 인생고해(人生苦海)를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순간순간 조금 마음만 있을 뿐인 것이지 근본적인 해결은 못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참다운 영생의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또는 인생고를 떠나기 위해서는 먼저 오온이, 오온 이것은 색수상행식 즉 정신과 물질을 말합니다. 정신과 물질이 다 비어 있다는 것을 비춰 봄으로서 비로소 일체고액을 제도할 수 있고 우리가 떠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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