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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84

 

 

부처님 법()은 특별히 우리가 들추어내서 이것이다. 이렇게하기 이전에 부처님 법은 바로 우주(宇宙)의 법입니다. 부처님 법을 떠나서 근본원리의 우주의 법이 없는 것이고 우주의 도리를 떠나서 부처님 법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씀들 합니다만은 불교(佛敎)에서 이른바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라. 대총상법문이란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대총상법문이란 것은 그 어느 것도 본체론(本體論)적인 의미라든가 또는 현상적(現象的)인 의미라든가 모든 실존적(實存的)인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는 가르침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또 중생(衆生)의 그릇 따라서 시기상응(時期相應)한 법문이라, 시기상응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그 시대 적합한 법문(法門)인 동시에 각기 중생의 그릇 따라서 거기에 알맞은 법문이라는 뜻이 시기상응한 법문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은 그러면은 시기상응한 법은 어떠한 구도로 되어있는가? 이것은 흔히 경전(經典)에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만은 3시기, 부처님 법의 심천(深淺)따라서 세 가지 시기로 구분해서 말씀을 합니다.

 

맨 처음에 가장 정도가 낮은 것은 이른바 유교(有敎). 있을 유(), 가르칠 교(), 유교입니다. 유교라는 것은 우리 중생들이 보는, 중생들의 견해(見解) 따라서 이해할 수 있는 그러한 정도에 맞추어서 중생들은 나도 있고 너도 있고 또 중생들의 감각에 따라서 거기에 대상(對相)적으로 비추어지는 세계(世界)가 있지 않겠습니까. 자연계(自然界)라든가 여러 가지, 가지가지의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범주(範疇)에 속해있는 그런 법, 이것이 이른바 유교, 있을 유(), 가르칠 교(), 유교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유교 이것은 하나의 상식적(常識的)인 이른바 소박(素朴)한 그런 가르침이 되기 때문에 우리 중생들이 미처 깊은 심오(深奧)한 가르침을 모르고서 상식적인 상대유한적인 범위에 있을 때는 해당이 되지만은 좀 더 심오한 가르침을 위해서는 이것은 유교로 해서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른바 과학적(科學的)으로 깊이 탐구(探究)를 한다든가 또는 철학적(哲學的)이나 종교적(宗敎的)으로 깊이 명상(瞑想)을 한다든가 그런 차원(次元)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유교는 거기에 합당한 가르침이 못됩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공교(空敎), 이른바 빌 공(), 가르칠 교(), 공교말씀입니다. 우리가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든가 금강경(金剛經)이나 반야 600부나 그런 가르침은 대체로 공교의 가르침을 주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제법공(諸法空)이라든가 또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든가 그러한 금강경에 있는 공()도리 말씀들은 공교에 해당한 셈인데 이 공교도 역시 우리가 상식적인 견해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 중생들 소박한 생각으로 해서는 분명히 있는 것이고 자타(自他)의 구분이 있는 것인데 그 모든 것이 본래로 공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은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눈에 보이는 존재를 차근차근 분석해서 나중에 끄트머리에 가서 다 비어버리는 분석할 석(), 빌 공(), 석공(析空)이 있는 것이고 그런가 하면은 당체즉공(當體卽空)이라.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반야심경도 내내야 색즉공(色卽空)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당체, 당체가 바로 공이라는 이런 것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중생들이 느끼는 분석(分析)해서 알아차리는 석공에 대응해서 체공(體空)이라. 몸 체(), 빌 공(), 체공이라고 그럽니다. 반야심경 공()이나 금강경 공()이나 그런 공들은 모두가 다 체공인 셈입니다. 그래서 그 공을 석공과 아울러서 보다 근원적인 공()도리 체공과 이런 도리를 말씀한 법문은 이른바 공교(空敎)에 해당하고 그러나 부처님 말씀은 공교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제가 허두에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을 말씀을 했습니다만은 그 근원적(根源的)인 부처님의 제법실상(諸法實相) 도리, 부처님께서 조금도 방편(方便)을 쓰시지 않고서 그대로 말씀하신 제법(諸法) 그대로 중도실상(中道實相) 아님이 없다. 이런 도리를 말씀한 그러한 법문은 이른바 중도교(中道敎), 따라서 중도교가 부처님께서 하시고 싶은 본원적(本源的)인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제 말씀도 이러한 세 차원으로 해서 소박한 우리 중생들이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견해(見解)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유교(有敎), 그런가 하면은 본래로 비어있는 자리, 제법이 공 도리로 말씀해있는 그런 공교(空敎) 그와 동시에 이른바 대총상법문이라고 하는 조금도 방편이 없이 방편가설(方便假說)이 없이 법의 실상 그대로 말씀한 중도교, 이러한 것을 가려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비유담으로 보면은 삼수도하(三獸渡河)라고 그래서 삼수도하라, 토끼나 말이나 소나 이러한 덩치로든가 능력으로 3가지 종류의 짐승이 시냇물을 건너는데 인도에서 비유를 들었으니까 주로 갠지스강이 되겠지요. 갠지스강을 건너는데 토끼란 놈은 가볍고 덩치도 작고 그러니까 물에 둥둥 떠서 건넌단 말입니다. 그래서 법에 비기면 마치 중생들이 느끼는 상대유한적인 그런 차원에서 말씀하신 법문이 토끼가 물에 둥둥 떠서 물에 깊이는 헤아리지도 못하고서 그냥 겉으로만 진리(眞理)를 느끼는 그러한 이른바 아까 말씀드린바 유교라, 그런 것에 해당할 수가 있는 것이고,

 

또는 말이라는 놈도 덩치도 좀 크고 무게가 무겁고 하니까 그러니까 상당히 물에 잠겨서 그 시냇물의 바닥까지는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가운데쯤이나 중심을 차지 해가지고서 건너는 그런 정도란 말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공교(空敎)에 해당하고, 또는 소나 코끼리나 그런 덩치가 크고 무거운 것들은 대체나 그때는 바닥을 뚜벅뚜벅 바닥까지 닿도록 까지 걸으면서 걷는단 말입니다.

 

그것은 이른바 법의 깊이로 말 하면은 토끼가 걷는 것은 법의 표면이니까 이른바 소승적(小乘的)인 또는 범부(凡夫)적인 그런 차원(次元)을 말하는 것이고 또는 가운데 만침 중간쯤이나 그렇게 떠서 건너는 말 정도는 이것은 이른바 공교(空敎). 모든 존재가 본래로 비어있다는 그런 정도의 가르침을 말씀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코끼리나 소나 그런 것이 강바닥을 제대로 밟고 건너는 것은 마치 법의 근원적인 것을 조금도 방편가설(方便假說)이 없이 오로지 중도실상(中道實相)의 그런 이치(理致)를 깨닫는 그런 정도의 법문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부처님 경전(經典)의 말씀을 하면은 삼수도하라, 토끼라든가 또는 말이라든가 소나 코끼리나 세 가지 동물의 법()의 심천(深淺)을 깊고 옅은 것을 상징하면서 시냇물을 건너가는 그런 것을 비유담으로 말씀을 했습니다. 헌데 우리가 흔히 말씀을 하기를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그런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대도무문이라, 대도(大道) 큰 도는 본래 일정한 고유한 문이 없단 말입니다.

 

스님들도 대도무문이란 말을 더러 가끔씩 쓰지 않습니까. 그러나 대도무문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쓰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대도무문이라는 것은 모든 법()을 총망라해서 조금도 흠절이 없는 원만(圓滿) 무결(無缺)한 그런 뜻을 가리켜서 대도무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대도무문에 따르는 말씀은 무문관(無門關)이라는 선()의 참선(參禪)의 논장(論藏)에 가 있습니다만 무문관에 있는 것을 보면, 대도무문(大道無門) 천차유로(千差有路). 대도라 하는 것은 큰 진리(眞理)라 하는 것은 본래 문이 없지만은 또 인연(因緣)이 따르면 그때는 천차유로라, 천 가지 만 가지의 길이 있단 말입니다.

 

투득차관(透得此關) 하니 그 대도의 무문이란 문이 없다는 관문을 두드려서 통과를 할 라고 생각할 때는 건곤독보(乾坤獨步), 건곤이라는 것은 천지(天地) 아닙니까. 독보라, 홀로 독(), 걸을 보, 천지를 조금도 장애(障碍)없이 천지만물(天地萬物)이 모든 것에 조금도 막힘이 없이 무장무애(無障無礙)한 그러한 경계(境界)가 이른바 건곤독보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그런 대도라는 것은 끝도 갓도 없이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것이고 또는 무량(無量)의 공덕(功德)을 갖춘 자리인데 그건 저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무문관이라 하는, 요새 우리 승가(僧家)에도 무문관을 지어가지고서 가서 6개월 코스로 공부도 하고 1년 코스로 독방에서 공부도 하고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아무튼 무문이란, 본래 문이 없는 그러한 도리를 우리가 통과한다고 생각 할 때에 건곤독보라, 모든 것에 막힘이 없단 말입니다. 즉 다시 말씀드리면은 제법공(諸法空) 도리, 제법공 도리를 깨닫는 것이 무문관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제법공 도리를 통과하지 못하면은 무문관을 통과를 못하는것이 되겠지요. 그러면 제법공 도리는 어떠한 것인가? 아까도 얼핏 언급을 했습니다만은 사실은 제법공도리 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논리적(論理的)으로 우리가 사견(私見)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체험(體驗)으로 해서 아는 것이 몸 체(), 빌 공(), 바로 체공(體空)이란 말입니다. 현대과학(現代科學)적으로 물질(物質)을 분석(分析)해서 원소(元素)가 되고 원자(原子)가 되고 소립자(素粒子)가 되고 한 것은 하나의 석공(析空)적인 것이 되겠지요. 사실 물질(物質)을 언급했으니까 말하는 것이지 물질이라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본래로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