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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85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85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가르침은 그냥 덮어놓고 남을 사랑하라. 또는 자기 것을 무주상(無住相)으로 보시(布施)해라. 그런 말씀을 부처님은 하신 적이 없습니다. 꼭 다 모두가 깊은 철학적인 깊은 도리가 전제가 되어 있습니다. 나와 남이 본래로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나와 남이 본래 둘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는 자동적으로 남한테 해꼬지 할 수 없는 것이고, , 나와 남이 둘이 없거니 자기만 위해서 이득을 취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아까도 플라톤의 비유를 말씀을 했습니다 만은 역시 우리 중생들은 지금 동굴 속에서 동굴의 어두운 가운데서 시야도 없고 바로보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철인(哲人)들이라든가 깨달은 분들이 할 일은 무엇인고 하면은 동굴에 들어 있는 그런 중생들을 위해서 바른 견해, 동굴에 들어있는 그대들이 보는 것은 바로 보는 것이 아니니까 바로 봐야 된다. 바로 보기 위해서는 동굴에서 나와서 태양광선에 비추어서 밝은 세상에서 바로 봐야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이른바 깨달은 분들이 철인(哲人)들이 할 일이라고 플라톤이 말씀을 했어요.

 

헌데 역시 우리 중생(衆生)들은 현상(現象)만 가지고 따집니다.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상()만 가지고 따진단 말입니다.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섭상귀체(攝相歸體), 섭상귀성(攝相歸性)이라, 모든 상()을 거두어서 본체(本體)로 가는거란 말입니다. 일반 중생과 깨달은 분들은, 중생은 상만 가지고서 상()의 범주(範疇)내에서 시야비야하고 갈등합니다만은 깨달은 성자(聖者)들은 성품(性品)을 깨달아서 성품에 입각해서 모두를 다 제자리로 하고 판단도 하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상 이것은 근원적으로 본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제법이 공이라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본원적(本源的)인 도리기 때문에 제법공(諸法空)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라는 상, 너라는 상 또는 곱다는 상, 밉다는 상, 이런 것은 모두가 다 사실은 허망(虛妄)하단 말입니다. 허망한 것을 우리는 즉 말하자면 속아 사는 것입니다. 속임수에 그대로 우리가 속고 있단 말입니다.

 

금강경(金剛經)에서 있는 법문(法門) 아닙니까 만은 아상(我相)이나 나라는 상이나, 인상(人相)이나 너라는 상이나, 중생상(衆生相)이나 중생이라는 상이나, 또는 수명(壽命)이 짧다 길다하는 수자상(壽者相)이나, 이런 상은 모두가 다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 허망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상이 있으면은 그때는 중생(衆生)인 것이고 범부(凡夫), 이런 상이 없어야 그래야 비로소 성인(聖人)이고 부처란 말입니다. 그 명백히 금강경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은 쉬운데 우리 중생들은 사실은 그렇게 보지 못하지 않습니까. 지금 상 가운데서 그때그때 자기 마음이 내키면은 그때는 그냥 조금 자기 스스로 기분도 좋고 모다 그럴것이지 만은 상에 보이는 것이 자기한테 해로우면은 그냥 또 진심(嗔心)을 내고 우리 마음으로 갈등을 일으킨단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佛敎)를 공부하는 분들은 어떻게 해서 상()을 없앨 것인가? 그것이 중요한 불교의 수행력(修行力)이 되겠지요. 오랜 동안 우리가 염불(念佛)도 하고 참선(參禪)도 하고 또는 경()도 보고 하면은 차근차근 상이 줄어지기는 하겠습니다.

 

그러나 단박에 어떻게 하는게 상이 없이 할 것인가? 이런 문제는 스님네 뿐만이 아니라 우리 불자들 또는 일반사람들도 모두가 다 굉장히 마음으로 간구해서 마지않는 중요한 문제 안 되겠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이 말로만 하는 이른바 불교말로 하면은 문자(文字)적 갈등이라. 또는 시비분별(是非分別)하는 아주 차별적(差別的)인 그런데서 머물러 버리면은 참다운 불법(佛法)이 될래야 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냥 우리 중생들이 이론적(理論的)으로만 느끼라는 그런 가르침은 아니지 않습니까. 꼭 교행증(敎行證)이라, 부처님 가르침이 있으면은 또 우리가 가르침대로 실천(實踐)하고 또는 그다음에는 반드시 증명(證明)해야 한단 말입니다.

 

증명해야 만이 우리가 이른바 생노병사(生老病死)라하는 한계상황을 넘을수가 있단 말입니다. 증명(證明) 못하면은 그때는 아무리 알기는 많이 안다고 하더라도 우리 범부의 그런 범주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내내야 끝끝내 범부라 하는 그런 자리를 벗어날 수가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만이 문득 깨달아서 범부(凡夫)의 자리를 비약적(飛躍的)으로 초월(超越)해서 깨달은 성자(聖者)가 될것인가? 우리가 생각할 때는 성자가 되는 것은 저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고, 출가(出家)한 분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지 일반 신도(信徒)는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 중생들이 지금 비록 범부 노릇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본래로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본래로 바로 부처라는 것이 굉장히 심수오묘(深邃奧妙)한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닦아가지고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다른 종교(宗敎)와 불교(佛敎)와의 차이는 거가 있습니다. 또는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의 차이도 거가 있습니다. 본래 부처라는 소식을 납득을 못하면은 사실은 대승이 못됩니다. 본래 부처라는 것은 우리가 공부하지 않고 그대로 준준무식(蠢蠢無識)한 그런 상태라 하더라도 근원적인 부처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 청정(淸淨)한 혜안(慧眼)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똑같은 부처란 말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뿐만이 아니라, 또는 석가모니로부터 28대 조사 달마(達磨)스님까지 그렇게 많은 훌륭한 조사(祖師)가 나오고 그 외에도 무수한 성자(聖者)가 많이 나왔지만은 그런 성자들이나 현재 우리 범부중생(凡夫衆生)들이나 그 마음상태, 우리 마음 상태는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核心)입니다. 이것이 본래 부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을 보면은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제불여래(諸佛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면 그 모든 부처님은 바로 우주(宇宙)를 몸으로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몸은 바로 우주입니다. 우주를 몸으로 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안 계신 데가 없이 다 계시는 것이고 보다 확실히 말하면은 우주 그대로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또 어떠한 것인가? 모양이 있는 허망무상(虛妄無常)한 모양이 있는 것도 그러는 것인데 하물며 우리 마음은 이것은 마음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존재(存在)의 가장 중요한 핵심(核心)이 우리 마음 아닙니까. 마음은 더구나 말할 것도 없이 마음은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아까 제가 물질(物質)론에 관해서 말씀을 드렸듯이 사실은 부처님 가르침은 물질이라는 것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제법(諸法)이 공() 자리에 어디 가서 물질이 끼어들 수가 있겠습니까. 옛날에는 미처 몰랐지만은 지금 현재는 현대과학(現代科學)도 물질(物質)이 없다는 것을 증명(證明)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부처님이 제자로 봐서는 굉장히 축복(祝福)된 일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다 비어있는 소식을 알려면 통해야 알 것인데, 이걸 증명해야지 비로소 다 비었구나. 스스로 비어있는 것을 훤히 봐져야 할 것인데 통하지 못하면서 우리가 빈 것을 아는 것은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의 공덕(功德)이란 말입니다.

 

물리학에서 증명했으니까 우리가 그때는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앞에 있는 탁자는 무엇인가? 이것도 물리학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다. 기체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액체나 고체나 모두가 다 움직이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제한된 눈으로 해서 보지 못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가 상식적(常識的)으로 알고서 다 알았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상식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에 우리가 통달무애(通達無碍)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성자(聖者)가 되는 길이란 말입니다. 성자가 우리가 안 되고 베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로 부처거니 금생(今生)에 못되면 또 저 내생(來生)에 우리가 몇 생을 윤회(輪廻)한다 하더라도 꼭 부처가 되고마는 것입니다. 게으름 부리면은 더 늣게 더 만생 천생 우리가 윤회해야 되겠지요.

 

그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라, 대총상법문은 우리가 조금도 방편가설(方便假說)이 없이 그대로 한 법문이 대총상법문입니다. 그래서 대총상법문에다가 조금더 부연(敷衍)을 시키면은 어떤 가르침이 되는고 하면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진여법성이라, 모든 존재는 진여불성이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진여불성이 들어가야 이른바 대총상법문이 됩니다. 진여도 역시 참 진(), 같을 여()자가 진여 아닙니까. 진여를 조금 더 부연해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진여법성(眞如法性)이다. 그런 말들을 하지 않습니까.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할아버지라는 분이 이른바 마명대사(馬鳴大師), 마명대사라는 분은 12대 조사입니다. 마명대사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라, 대승(大乘)의 신앙심(信仰心)을 일으키는 논장(論藏)을 냈단 말입니다. 거기에 진여법성(眞如法性)이란 말씀이 고구정녕으로 말씀해 있습니다. 우주란 것은 진여불성, 진여불성 이것이 우주의 본체(本體)란 말입니다. 또는 동시에 우리 마음의 본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중생(衆生)들이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진여연기(眞如緣起), 우주만유(宇宙萬有)는 다 진여불성 자체의 눈으로 해서 우주만유가 되었단 말입니다. 진여불성이 우주만유가 되었다는 그런 법문이 이른바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