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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5. 원통불법의 요체

원통불법의 요체(93)

원통불법의 요체(93)

 

3. 極樂世界극락세계西方서방에만 있는 것인가?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6조 혜능 스님 말씀이 서방西方 정토淨土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관해서 비판적인 말씀을 하신 대목이 있습니다. 동쪽에서 죄를 지으면 참회정진의 공덕으로 서쪽의 안락세계에 태어날 것인데 서쪽에서 죄를 짓고 참회정진한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 동방은 극락세계가 아닌데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내용의 법문입니다.

 

서방, 동방에 대해서 우리가 집착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도인들이 이런 것을 몰라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다만 우리 중생들이 상에 집착하여 본질적인 도리를 이해하기 어려우니까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서쪽을 지명했던 것인가? 그것은 동쪽은 해가 뜨는 방향이니 만물의 시초를 상징하고 서쪽은 해가 지는 방향이니 모든 것의 결말, 성취를 상징하여 이상화理想化하여 말한 것입니다.

 

정토경전淨土經典이 이백부가 넘을 정도로 방대합니다. 본래는 내 자성自性이 부처고 삼천대천세계가 바로 부처님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방대한 정토 법문이 다 한결같이 실상세계인 극락세계의 장엄과 중생성불을 위한 거룩한 법문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토경전의 내용이 절대로 진실이고 사실인 것인데 다만 중생이 미혹되어 그저 마음이 부처다고 해서는 알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지방입상指方立像이라, 중생 차원의 방위를 가리키면서 형상을 세워서 중생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정토경을 보면 아미타불의 키는 육십만 억 나유타 유순由旬이라 하였는데 그야말로 한도 끝도 없이 크다는 말이며 극락세계 또한 무량무변한 세계입니다. 그러기에 극락세계의 생명적 인격화가 바로 아미타불이며 부처님의 부사의 공덕으로 중생교화의 선교방편 따라 그때그때 크고 작게 장엄신을 나투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등의 정토경을 보면 같은 경 내에 방편과 진실이 아울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방편만 집착해서 진실을 알지 못합니다. 관무량수경에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바로 법계신法界身이라, 시방여래는 바로 법계를 몸으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법계를 몸으로 하나, 여래의 심심 미묘한 부사의 공덕과 자비원력으로 필요한 때는 바늘 구멍만한 모양으로 나투기도 하고 동시에 수억 수만의 화불化佛을 나투어서 우리 중생에게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명을 다하여 공부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활연히 마음이 열리면서 부처님의 광명신光明身을 증득證得함과 동시에 자기 스스로 광명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부처다, 마음 밖에 부처가 따로 없다는 말에 국집하는 사람들은 부처님 상호를 말하면 상에 걸린다고 굉장히 비판을 합니다마는 부처님 경계라는 것은 그러한 상호까지도 바로 부처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부처란 원래 이름도 없고 상도 없는 바로 우주의 생명 자체이지만 인연에 따라서는 무한의 가상假相을 나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사의 하고 무량공덕 아니겠습니까?

 

 

4. 정토종淨土宗의 문제

 

제가 이제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을 막 번역해가지고 어느 아는 스님한테 가져가 한 권을 드렸더니만 스님은 정토종이오?” 이렇게 묻는다 말입니다. 그래서 웃기만 하고 말은 안 해버렸습니다만 우리는 정토종이라고 해서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극락세계極樂世界 우리 이상세계가 극락세계 아닙니까? 우리 사무친 이상향 그 자리는 역시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 제대로 다 밝혀있다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나가 상에 집착하지 않는 범위에서 꼭 보시고 참 인 동시에 바로 우주자체인 부처님한테 보다 더 간절히 흠모추구 하는 갈앙渴仰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우리 공부를 틀림없이 비약시킵니다. 불안의식을 제거하고 비약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정토종으로 굳어버리는 것은 반대합니다. 꼭 자기들 식만 아니면 안 된다는, 정토종만 필요하지 다른 종은 필요 없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왜 그런가하면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부처님은 다 통해 있다 말입니다. 원통무애圓通無礙하여 법집法執을 떠나 있는 것인데, 가사 일본 진종은 염불念佛도 자기들 식으로 꼭 아미타불 이름을 불러야 된다. 다른 것은 안 된다. 이렇게 하면 벌써 그마만치 마음이 좁아집니다.

 

불교라는 것은 마음을 여는 공부 아닙니까? 마음을 열어 놓고서 티끌 하나에도 걸릴 필요가 없다 말입니다. 부처하면 다 부처인데 하필이면 아미타불만 꼭 부를 필요가 있습니까. 다만 총 대명사이기 때문에 가장 보편적인 이름이기 때문에 부르는 것은 좋지요 좋으나, 지금도 저한테 오는 신도님들 만나 보면 여태까지 관세음보살을 십년 정도 했는데 어느 절에 스님이 지장보살地藏菩薩로 바꿔야 공덕功德이 더 많다고 해서 애쓰고 바꿨는데 자기도 모르게 십년 동안 한 관세음보살이 나온다는 것이어요. 우리는 이렇게 회통會通을 못시키고 간격을 둘 필요는 없습니다.

 

저번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주가 원래 관음보살 이름을 타고 나온 것입니까? 우주가 원래 하나의 생명이라 말입니다. 부처란 이름도 결국 우리가 지은 것이지 부처란 이름이 타고난 것입니까? 따라서 우주가 하나의 진여불성 순수생명이라 말입니다. 그 가운데 무한공덕無限功德을 다 갖추고 있는데 그 공덕이 하나 둘 같으면 이름 하나 둘만 붙이면 되겠지만 무량공덕이기 때문에 하나의 개념으로 표현을 못한다 말입니다. 따라서 무량공덕을 자비로운 쪽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 관세음보살이고 또는 지혜로운 방면으로 볼 때는 문수보살文殊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고 말입니다. 또는 우리 중생 영혼을 그런 극락세계나 천상이나 인간이나 좋은 쪽으로 그렇게 인도할 때는 지장보살地藏菩薩,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입니다. 약사여래藥師如來나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나 모두 다 공덕 따라서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을 외운다 하더라도 무장무애한 진여불성을 생각해야 됩니다. 벌써 보살지위 그런 자리는 무장무애입니다. 아미타불 여기 있고 지장보살 저기 있고 그래버리면 불교는 다신교多神敎가 되지요. 무장무애이기 때문에 관세음보살 본심미묘진언 옴마니반메훔을 한다고 해도 무장무애한 진여법성자리에 마음을 두고 해야 된다 말입니다.

 

지금은 무슨 공부를 하던지 간에 근본적인 진여불성 본체를 안 여의어야 됩니다. 그래서 염불도 실상관實相觀을 꼭 해야 된다. 부처님 상호相好를 관찰해야 된다. 또는 이름만 불러야 된다.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본체本體에다 안주를 시켜야 합니다. 본체에다 안주시키기가 쉬운 문제는 아니겠지요. 어떻게 하면 안주를 시킬 것인가 아무 상이 없는 무량무변한 허공 가운데 상상을 초월한 순수생명인 진여불성 광명이 충만한 자리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한도 끝도 없는 라는 것도 비어있고 라는 것도 비어있고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텅텅 비어 있는데 다만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량무변한 그 세계에 진여불성 광명만 충만해 있다 말입니다. 사실 그런 것이고 말입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훌륭한 물리학자들이 말한바와 같이 우주는 하나의 장 에너지가 충만해 있습니다. 결국은 장뿐이라 말입니다. 물리학적으로 본다고 할 때 방사광放射光을 내고 있는 그런 광명, 만이 충만해 있습니다. 그런 장위에 인연因緣이 있으면 거기서 돋는다 말입니다. 그 장의 순수한 상태가 진여불성자리 이른바 부처님의 광명이라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체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여러분들은 실상염불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때는 공이라, 이고 가라 중도中道라 그렇게 해도 감도 안 잡히고 말입니다. 따라서 라는 것이 분명히 빈 것인데, 나도 비고 모두가 비어있는 이른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텅텅 비었는데 그러나 다만 빈 것이 아니라 그 자리는 진여불성, 상상을 초월한 행복과 자비와 지혜와 모든 공덕을 갖춘 광명만 황홀하게 충만해 있다 말입니다. 그런 자리를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실상염불實相念佛인 것이고, 화두도 그렇게 하면서 참구해야 합니다.

 

이뭣고, 시삼마是甚麽화두가 그런 자리에서 나왔다 말입니다. 어떤 화두나 시삼마 화두가 근거가 돼야 한다 말입니다.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하늘을 받치고 땅을 받치고, 내내야 천지우주를 말하는 것이지요. 밝기는 해와 달보다 밝고 보통 그런 광명이 아니라 말입니다. 검기는 칠보다 검다는 건 명암을 초월한 거라 말입니다. 그런 것이 나와 더불어 있는데 내가 미처 거두어 얻지 못하는 그것이 무엇인가그런 그것이 무엇인가지 공연히 이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무엇인가는 화두가 아니라 말입니다.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 또는 부처가 무엇인가, 또는 본분사가 뭣인가, 본래면목이 뭣인가 그런 물음에 대응해서 화두가 나왔습니다. 조주趙州가 그대들 무, 의심해라 그렇게 말했습니까. 조주 화두가 많이 있지만 의심하라는 말씀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그러나 의심도 제일의제第一義諦를 의심하면 훌륭한 공부지요. 그냥 이렇게 저렇게 상대적으로 의심하면 공연히 마음만 바쁩니다. 그래서 투철하게 본체를 참구參究하는 의심을 해야 됩니다.

 

염불도 본체를 떠나지 않는 진여관眞如觀 실상관實相觀 말입니다. 실상자리는 이렇게 저렇게 구분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끝도 갓도 없는 하나의 진여불성 광명이 충만한 자리입니다. 그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 업장이 녹아지면 차근차근 광명이 밝아 옵니다. 검은 얼굴도 맑아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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