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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5. 원통불법의 요체

원통불법의 요체(94)

원통불법의 요체(94)

 

5. 호흡법呼吸法에 관해서

 

호흡법은 지금 여러 가지 법이 나와서 호흡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호흡법만 해라. 그러면 다 된다. ‘이것은 육조의 정통이다이렇게 혜명경慧命經이 육조의 정통이라고 고집합니다만 그것은 육조가 낸 것은 아닙니다. 화양선인華陽仙人 이라는 분이 냈습니다.

 

외도外道와 정도正道의 구분은 정도는 항시 마음을 앞세웁니다. 외도는 마음을 앞세우지 않고 우리 몸뚱이나 호흡이나 테크닉을 앞세웁니다. 따라서 호흡법도 우리 마음 자성자리를 견지하면서 해야 됩니다. 초보 때는 이것저것 한 번에 하려면 복잡하니까 수도 헤아리기도 하고 그래도 되겠습니다마는 종당에는 역시 관조觀照로 진여불성을 참구하는 선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호흡법의 대표적인 경론은 안나반나경安那般那經입니다. 안나는 입식入息이라 호흡을 들이마시는 인도 말로 안나, 반나는 출식出息이라 호흡을 내쉬는 것으로 반나입니다. 호흡경이나 같은 뜻이지요.

 

거기에는 육묘문六妙門과 십육특성이라고 있습니다. 육묘문이란 여섯 단계로 호흡을 해나간다는 말입니다. 십육특성은 분석하면 번쇄해지니까 생략하고 육묘문은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선사도 역설을 많이 했으니까 얼핏 상만 얘기합니다.

육묘문은 수식數息이라 수를 헤아리고 말입니다. 그다음은 따를 수자 수식隨息이라, 그칠 지자 지식止息이라, 그다음은 볼 관자 관이라, 다섯 번째는 돌아올 환자 환이라, 그다음은 맑을 정자 정이라 이와 같이 수, , , , , 이렇게 나갑니다.

 

그래서 맨 처음엔 우리 산심散心 산란한 마음을 억제하기 어려우니까 호흡을 하는 것이지 누구나가 필요한 것도 아니라 말입니다. 척 들어앉으면 참선이 잘되는 사람들은 호흡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래도 저래도 자꾸 망상이 나와 귀찮고 대처하기 어려우니까 호흡을 하는 것이라 말입니다. 호흡을 헤아리는 것이 화두를 참구하고 염불하는 것보다 좋다 이럴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다만 단전丹田이라는 것은 우리 몸의 중심입니다. 건강법으로도 단전에 힘이 안 찬 사람들은 마음도 심장에서 나오므로 피로가 빨리 옵니다. 그리고 단전에 힘이 안 차면 몸의 균형이 잘 안 잡히고 동시에 혈액순환도 잘 안 돼놔서 단전에 힘을 두는 것은 굉장히 좋습니다. 단전에 힘만 차면 상기上氣도 잘 안 되는 셈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호흡법을 초보인들이 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선 수를 헤아리는데 하나부터 백이고 이십이고 막 하는 것이 아니라 경전에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헤아리고 열에서 하나까지 다시 왔다가 또 되풀이하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많이 헤아리다 잊어버리면 공연히 산란심散亂心만 일으키게 되니까 열까지만 헤아려 올라가고 내려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어느 정도 고요해지면 그때는 헤아리는 것도 귀찮아지므로 호흡가는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들이마셔지면 지금 들이마시구나 또 내쉬면 내쉬는 대로 마음만 거기에 따라갑니다. 마음이 따라가야 산란심이 일어나지 않겠지요. 그러다가 더 익어지면 드디어는 호흡을 가만히 멈춰봅니다. 그러면 대저 마음이 고요해지고 그때는 몇 분 동안 쯤은 멈춰집니다. 호흡은 마음 산란과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마음이 산란하면 호흡도 거칠고 또 역으로 호흡이 고요하면 우리 마음도 고요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호흡을 정지하려면 그마만치 마음도 그에 상응돼서 고요해지고 산란심이 덜 나오지요. 이렇게 상관관계를 이용하면 편리합니다.

 

그래서 지식止息이라 호흡을 딱 멈춰본다 말입니다. 여기 구참스님들은 다 경험 해보신 바와 같이 자기 호흡을 자기가 못 느끼게 됩니다. 내가 호흡을 쉬고 있는지 안 쉬는지 모른다 말입니다. 초심자들 옆에서는 호흡소리가 들려오지만 구참스님들 옆에서는 서로 피차 호흡소리가 잘 안 들려 죽었는지 살았는지 잘 모를 정도입니다. 그러다 고요해지면 관이라. 고요한 거기에 또 빠져버리면 무기無記에 빠지게 되니까 그때는 이른바 법성자리, 화두나 염불이나 기타 자기가 하는 대로 법성자리를 참구하는 관찰도 합니다. 의심도 근본적인 제일의제第一義諦를 의심하면 참구에 속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 본다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 혼침惛沈에 빠지지 않겠지요. 너무 좋아서 고요해지면 혼침에 빠져버리기 때문에 마음을 일으켜서 관조觀照를 해야 지혜智慧로 비춰본다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끝도 갓도 없는 맑은 세계 그와 동시에 거기에 찬란하게 들어있는 영원적인 행복과 지혜와 자유와 공덕을 갖춘 그 자리를 생각해서 마음을 일으킨다 말입니다. 그것이 관이라.

 

그다음은 대상적으로 빛을 보려하고 어디를 보려하고 그 마음도 하기가 싫어집니다. 이것저것 광명이고 뭣이고 다 놔버리고 그야말로 참 청정무애淸淨無礙, 생각을 떠나버린 그 자리에 가만 머문다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관찰도 하고 참구도 하고 그런 공부가 수련돼야 오는 것이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가사 공을 생각하고 이뭣고를 생각하고 그것도 분별이 아닙니까. 그런 질문을 한 분도 있습니다. 분명히 분별은 분별입니다. 그러나 맨 처음엔 이른바 이적인 여법한 분별은 해야 됩니다. 안하면 우리가 어떻게 잡을 것입니까. 화두를 참구하나 뭘 하나 따지고 보면 분별은 분별이지요. 따라서 원리에 맞는 여법한 분별은 해야 우리 마음이 자기암시가 돼서 차근차근 본 성품과 계합契合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보면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를 바라는 일상관日想觀이 있습니다. 뉘엿뉘엿 황혼으로 넘어가는 해를 상상하고 바라봅니다. 애쓰고 바라보면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떠오르지요. 그러나 마음이 차근차근 맑아오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부연이 밝아 오면서 정말로 빛나는 해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가 상 같지만 그런 상으로 해서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불성세계로 들어가게 유도를 하신 것입니다.

 

가사, 지상관地想觀이라 땅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땅을 어떻게 관할 것인가? 이렇게 상이 있는 행법行法을 뭐 때문에 말씀했을 것인가? 무슨 경전이나 상징과 비유가 있어놔서 한번 보면 잘 모릅니다. 어떤 분들은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을 보고서 신이 안 납니다. 마치 동화童話 같습니다.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만 자기 마음으로 진지하게 부처님 경전을 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안 보이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 중생들이 뜻을 알려고 할 때는 정말로 진지한 마음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땅을 보는 그것도 그냥 이런 흙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이른바 극락세계極樂世界의 땅, 실존적인 세계 광명의 땅입니다. 말하자면 그 땅은 영롱玲瓏하고 광명으로 빛나야겠지요.

따라서 지상관地想觀을 하는 그 땅은 광명으로 빛나는 영롱한 땅을 보는 것입니다. 본래가 영롱하게 빛나기 때문에 자꾸 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망상이 줄어들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들은 다 옳다고 이해하려 해야지 쥐꼬리만 한 자기 지식으로 시야비야是也非也 구분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공부하는 수행자는 철저히 겸허해야 됩니다. 겸허해야 우리 공부가 참회懺悔도 되고 동시에 부처님법문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아만심我慢心이나 기성관념旣成觀念으로 딱 차가지고 보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 관법觀法은 관심법觀心法의 준말입니다. 마음이나 부처나 법이나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지 않습니까. 마음을 관찰하는 법이 관법인데 다만 이사관理事觀이라 법성이나 원리를 관하는 것은 이관이고, 관은 서쪽에 떨어지는 해를 관 한다던가 또는 땅을 관조한다던가 하는 그런 것들인데 부처님 법은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을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해탈解脫로 이끌어 가는 방편지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함부로 비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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