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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5. 원통불법의 요체

원통불법의 요체(95)

원통불법의 요체(95)

 

 

6. 實相觀실상관念佛禪염불선은 어떤 관계인가?

 

이란 가상假相과 가명假名을 여의고 불심佛心 곧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본체를 참구參究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본 체성體性을 여의지 않으면 비단 화두참구話頭參究뿐만 아니라 관법觀法이나 염불念佛이나 주문呪文이나 다 한결같이 참선參禪입니다. 따라서 근본 체성을 떠난 공부는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중도실상 곧,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경계를 관찰하고 상념하는 염불이 바로 실상염불實相念佛인데 그것이 또한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참구하는 염불선念佛禪인 것입니다.

 

일체 모든 화두도 이러한 본래면목 자리, 진여불성 자리를 분명히 참구하고 그 자리를 증득하고자 하는 의단疑團이 되어야 합니다. 앞에서 선과 염불에 대해서 대강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성미타自性彌陀 유심정토唯心淨土, 우리 본래면목이 바로 아미타불이요 마음이 청정하면 현실세계 그대로 극락세계이니 염불도 근본 성품을 안 여의고 한다면 곧바로 참선이요, 참선과 염불이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른바 진여眞如, 실상實相이나 중도실상의 본래면목 자리는 상대적으로 분별하는 경지가 아닙니다. 헤아릴 수 없는 부사의한 부처님 광명이 충만한 경계입니다. 그것은 바로 진여실상의 경계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업장이 녹아짐에 따라서 점차로 진여불성의 광명이 밝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도 한결 밝아지고 어두운 표정도 말끔히 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가행정진加行精進을 계속하면 업장의 멸진滅盡에 따라 본래 부처인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7. 공부 境界경계에 대하여

 

공부 경계境界에 대해서 질문하셨습니다. 공부할 때에는 여러 가지 경계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 마음은 바로 우주의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마음 가운데에는 지옥도 있고 아귀도 있고 축생도 있고 천상도 있고 또는 극락이 다 잠재해 있는 것입니다. 십법계十法界 곧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성문연각보살부처 등 일체 만법이 우리 마음 가운데에 본래로 다 갖추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닦아 나가면 잠재의식에 들어 있던 업의 종자들이 업장 따라 그에 상응한 경계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과거 전생에 경험했던 것도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불쑥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더러는 우리 영식靈識이 맑아져서 방안에 있는데도 저만치 바깥까지 투시해서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영식이 맑아지면 누구나가 가지가지의 경계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경계라도 집착하면 병이 되고 나쁜 경계라도 집착하지 않으면 무방한 것이니 자성自性 곧 진여불성을 여의지 않고 정진해 나가면 필경에는 불생불멸한 진여법성을 깨닫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8. 無明무명始初시초는 무엇인가?

 

그다음에 무명無明의 시초始初는 무엇인가?

무명이란 원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명이라는 것이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다만 우리가 진여불성을 깨닫지 못해서 무명이 생깁니다. 무시무명無始無明이나 근본무명根本無明이나 같은 뜻입니다. 근본무명은 시초에 분별하는 한 생각입니다. 부달일법계고不達一法界故 홀연염기忽然念起 명위무명名爲無明이라, 평등무차별한 청정법계의 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문득 일어나는 분별심을 무명이라 합니다. 따라서 무명은 일체 현실세계의 온갖 번뇌와 망상과 생사윤회의 근본입니다. 우리 인간의 근본번뇌인 무명은 정견正見 곧 반야바라밀에 의해서만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9. 宗祖종조에 대하여

 

종조宗祖 문제입니다. 보조(普照1158~1210) 국사가 조계종의 종조인가?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 국사가 종조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저는 이런 우리 공부에 조도助道가 되지 못하는 문제 등으로 시비를 가릴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는 양쪽 다, 종조로 결정하는 문제는 반대 입장입니다. 저는 석가모니 한 분을 교주敎主로 하고 달마達磨 스님이나 또는 6조 혜능慧能 스님이나 또는 보조국사 태고선사를 위시하여 역대 정평 있는 도인들을 모두 다 위대한 선지식으로 숭상을 합니다. 어느 특정인을 또 중국에 가서 누구한테 법을 받고 안 받고 하는 그런 문제가 저한테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후대인들이 보조국사가 더 법이 높은가? 또는 태고 보우 선사가 높은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원효 스님이 높은가, 의상 스님이 높은가, 우리는 지금 추상적으로 단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만을 명명백백한 우리 교조로 하고 그 외에는 우리의 소중한 선지식으로 숭배하고 배울 것만 배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10. 金陀금타 스님의 行化행화?

 

그다음에는 금타(金陀 1898~1948) 화상의 행적이라던가, 공부 경계라던가, 또는 열반상이나 그런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저도 금타 스님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러나 대략 말씀드리면 스님께서는 이십 세 이전에 장성 백양사白羊寺의 송만암(宋曼庵 1876~1957)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습니다. 송만암 스님은 종정을 지내셨고 또 불교전문학교 교장도 지내신 분입니다. 그래서 근래에 종정을 지낸 서옹西翁 스님의 사형師兄이 됩니다. 출가한 뒤 강원講院도 졸업하고 그 당시의 불교 전문대학을 졸업한 뒤 이십육 세경 과학이나 수학 등 신학문新學問을 공부하여 현대사회를 제도한다는 포부를 가지고 잠시 동안 환속하였다고 합니다. 삼십 세 때 재 입산하여 오십 세에 입적入寂하였습니다. 삼십구 세에 내장사 벽련암碧蓮庵에서 깨달음을 얻고 읊은 오도송悟道頌도 남아 있습니다.

 

그 뒤 내장사 벽련암에서 백양사 운문암雲門庵으로 옳겼는데 금타 스님은 개성個性도 출중한 분이고 소신所信이 확실한 분이기 때문에 은사 송만암 스님과는 법에 대한 견해 차이로 약간 불편한 관계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운문암 생활은 순수하게 참선參禪을 위주하여 일체 불공도 사절하고 식생활은 아침 죽 공양, 점심 때 공양하고 철저한 오후불식午後不食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체 경비는 대중 전원 탁발托鉢로 충당하였습니다. 금타 스님의 열반涅槃은 대중들이 탁발 나간 부재중不在中에 시봉 몇 사람만 남아있을 때 열반에 들게 되었습니다. 금타 스님 사리舍利에 관해서는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물 항아리를 묻고 장치를 해야 하는데 전혀 그럴 만한 계제가 되지 못하여 유감스럽게도 사리는 수습하지 못하였으며, 백양사 큰절 스님들 말로 화장터에서 사흘 동안이나 베폭 너비의 서기瑞氣가 하늘로 뻗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금타 스님께서 부처님 정법正法을 여법하게 수행修行하고 여실如實하게 증득證得하여 부처님 법의 정수를 시기상응時機相應하게 기록으로 정리하였다는 사실에 우리 후학들은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금타 스님의 유저遺著금강심론金剛心論[스님의 유고를 모아 편집함]에는 근본불교의 핵심으로서 견성성불見性成佛에 필수적인 근본선정根本禪定인 구차제정九次第定의 역설과 각 경론經論의 모든 수행법과 수행의 위차位次를 종합 회통會通하여 해탈십육지解脫十六地로서 수행차서修行次序를 정립하였으며 동서東西 문자를 종합하여 자행화타自行化他에 요긴한 조도助道가 되는 관음문자觀音文字를 창제하였고 그리고 현대의 역사적 위기인 유물풍조와 기술 만능시대에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물심일여物心一如의 유심적唯心的 불교 우주관의 확립 등의 독창적인 희유한 교설들은 비단 우리 후학들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수도법문이 될 뿐만 아니라 앞으로 두고두고 인류사회의 지도 원리로서 찬연히 빛나게 될 것입니다.

 

11. 淸華청화 스님에 대하여

 

그리고 저한테 대해서 어떻게 살아 왔는가? 어떻게 공부했는가? 물어 왔는데, 저는 내세울게 사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선 저는 수행자로서 아직 대각大覺을 성취하지 못했으며 세속적으로도 무슨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고 사람이 잘난 것도 아니며 두드러진 경륜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이산 저산으로 다니면서 참선 공부만 했다는 사실 밖에는 없어서 내세울 것은 정말로 없습니다.

 

그리고 공부하는 경계에 관해서는 불가향인설不可向人說이라, 자기 공부하는 경계는 스승한테 경책받기 위해서가 아닌 한, 다른 이에게 말하지 말라는 불조佛祖의 경책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점검 받을 때만 필요한 것이지 부질없이 얘기하면 망언妄言이지요. 따라서 구태여 망언을 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장장 7주야晝夜 동안 참, 지루한 동안인데 횡설수설한 제 말씀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분도 빠짐없이 경청傾聽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한 자리에서 대담對談하는 것도 오백생五百生 인연이라는데 여러분과 저는 필시 다생겁래多生劫來로 동수정업同修淨業한 소중한 도반道伴들이시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희유한 인연에 대하여 다시금 감사의 합장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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