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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100)

화두 놓고 염불하세(100)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8. 궁금증 풀고 정견(正見)으로 정진(精進)하세(12)

 

 

7) 유교와 불교

 

무릇 사람이 숙세에 정말 착한 뿌리(善根)를 심었다면, 학문을 하든 도를 닦든 간에, 세상을 벗어나는 큰 일의 새싹이 될 수 있소. 그런 사람에게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 따위의 번뇌와 미혹이나, 질병 · 사고 같은 악보(惡報), 모두 생사윤회를 벗어나 불법에 들어가는 인연이 될 수 있소. 다만 본인이 스스로 되돌아 볼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소. 스스로 되돌아 볼 수 없다면, 그저 보통 평범한 일반인처럼 세간의 관념에 구애되고 말 것이오.

 

예컨대 회암(晦庵: 朱熹의 호. 1130~1200) · 양명(陽明: 王守仁. 1472~1528) · 정절(靖節) · 방옹() 등은 비록 학문과 행실이 모두 남달리 탁월한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러나 궁극에는 자기 마음을 철저히 깨달아 생사윤회를 해탈하지는 못하였소. 그들의 학문과 행실의 경지가 비록 더할 나위 없이 미묘한 도(無上妙道)의 기초가 될 수 있었지만, 스스로 되돌이켜 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불도에 들어가는 장애가 되고 말았소. 그러니 불도에 들어가기는 정말로 하늘에 오르기보다 훨씬 어려운 걸 알 수 있소.

 

부처가 보면 중생이 모두 부처이고, 중생이 보면 부처도 모두 중생이라오. 부처는 중생을 모두 부처로 보기 때문에, 근기와 인연에 따라 설법을 해주어, 중생들이 망상과 업장을 소멸하고 본래 지닌 성품을 몸소 증득하게 이끈다오. 그렇게 해서 일체 중생이 모두 궁극의 열반을 얻더라도, 부처는 결코 자기가 제도했다거나, 중생이 제도받았다고 보지 않소. 중생들이 본래 부처이기 때문이오.

 

반면 중생은 부처도 모두 중생으로 보기 때문에, 서역(인도)95종 외도(外道)나 이곳(중국)의 자잘한 유생들이, 마음과 힘을 다해 온갖 방법으로 비방과 훼손을 일삼아 왔소. 기필코 불법이 완전히 끊어져 아무런 소리나 자취도 없이 사라져야 비로소 마음이 후련한 자들이오.

 

그러나 찬란한 태양이 하늘 한복판에 떠 있는데, 어떻게 한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겠소? 그래 봤자, 오히려 불법의 광명만 더욱 떨치고, 아울러 자기의 비천함과 고루함을 드러내기에 안성맞춤일 뿐이오. 물론 숙세에 선근善根)을 심은 사람은 불법을 비방하고 배척한 인연으로, 마침내 불법에 귀의하여 불제자가 되고, 부처님을 대신해 불법을 전하기도 하오.

 

하지만 숙세의 선근이 없는 사람은, 비방한 업력으로 영원히 아비지옥에 떨어지게 되오. 그 업보가 다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랜 과거에 부처님 명호를 들었던 선근이라도 피어나면, 그제서야 비로소 불법에 들어와 점차 선근을 심어 가다가, 업장이 다하고 감정이 텅 비게 되면, 본래 지닌 성품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는 것이오.

 

그러니 부처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넓고 깊은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소. 부처님 명호 한 구절이 귀를 통해 정신에 배인 것이 영원토록 도의 씨앗(道種)이 되는 것이오. 마치 독약 바른 북 소리를 들으면 원근의 사람이 두루 목숨을 잃고, 금강(金剛)은 조금만 먹어도 결코 소화시킬 수 없는 이치와 같소. 이와 같이 믿음을 내는 것이 바로 올바른 믿음(正信)이오.

 

불법은 크게는 포괄하지 않는 것이 없고, 작게는 관련되지 않는 게 없소. 마치 비가 한번 내리면 대지를 두루 적셔, 모든 풀과 나무가 함께 무성히 자라는 것과 같소. 불법에는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 친민(親民) 같은 유가의 도도 갖추어지지 않은 게 없소.

 

예로부터 지금까지 문장이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날리고 공적이 우주에 찬란히 빛나는 사람들이나, 또는 지극히 효성스럽거나 어진 사람들을, 우리는 천추가 지나도록 우러러 존경하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그 위인들의 자취만 알 뿐, 위대함의 근본은 잘 궁구하지 않소. 만약 위대함의 유래와 맥락을 상세히 살펴본다면, 위인들의 정신과 지조, 절개는 모두 불법을 공부하여 배양한 것임을 알 수 있소.

 

다른 것은 거론할 필요도 없이, 송나라 유학자들이 세우고 밝혀 놓은 성인의 심법(聖人心法: 朱子學으로도 불리우는 性理學을 가리킴.) 같은 것만 보아도, 불법을 바탕으로 모범 체계가 형성된 것이오. 하물며 다른 것은 말할 필요가 있겠소? 다만 송나라 유학자들은 기질과 도량이 편협하고 작았던 탓에, 성리학을 순전히 자기네 지혜로 세웠다고 후세 사람들이 칭송해 주기를 바라는 욕망에서, 마침내 스스로 불교를 배척하는 주장까지 내세운 것이라오. 이야말로 자기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는 격이 아니겠소?

 

송나라부터 시작해서 원나라를 거쳐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러하지 않음이 없었소. 세심히 살펴본다면, 과연 누군들 불법에서 자신의 이익을 얻지 않겠소? 정좌(靜坐: 坐禪에 해당)를 말하거나 참구(參究)를 말하는 것은, 공부(수행)하는 게 드러나는 곳이며, 임종에 때가 된 줄 미리알고서 말하거나 웃으며 앉은 채로 서거하는 것은, 마지막 끝맺음이 드러나는 곳이오. 이러한 종류의 설화나 행적은 성리학 전기(傳記) 가운데 한두 번 나오는 게 아니오. 불법을 공부하는 게 어찌하여 사회의 근심이 된단 말이오?

 

유교와 불교의 본바탕은 진실로 둘이 아니오. 유교와 불교의 수행 공부는, 보통으로 얕게 논하자면 자못 같은 점이 많지만, 전문으로 깊이 논하자면 천양지차가 난다. 왜 그런가 하면, 유교는 정성()을 근본으로 삼지만, 불교는 깨달음()을 으뜸으로 삼기 때문이오.

 

정성은 곧 밝은 덕()이오. 정성으로 말미암아 밝음이 일어나고, 밝음 때문에 정성을 내게 되므로, 정성과 밝음은 하나가 되어(誠明合一) 바로 밝은 덕을 밝히는(明明德) 게 되오. 깨달음에는 본래 깨달음(本覺)과 처음 깨달음(始覺)이 있소. 본래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처음 깨달음이 일어나고, 처음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본래 깨달음을 증득하게 되니, 처음 깨달음과 본래 깨달음이 하나가 되면 곧 부처가 되는 것이오.

 

여기서 본래 깨달음(本覺)이란 유교의 정성()이고, 처음 깨달음(始覺)은 유교의 밝음()에 해당하오. 이렇게 본다면, 유교와 불교는 전혀 다르지 않소. 그래서 공자를 배우나 부처를 배우나, 이치상으로는 대학(大學)의 제 1장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틀림없이 확실한 견해라오. 이것이 보통으로 얕게 논한 유교와 불교의 관계라오.

 

그러나 수행하여 증득하는 공부의 수준(정도)을 나타내는 단계의 구분에 이르면, 비록 근본이야 같다고 하겠지만, 증득하고 도달하는 과정과 경지는 아주 크게 다르다오.

 

유교에서 밝은 덕을 밝힌다(明明德)는 것이, 부처님께서 세 미혹(三惑見思惑 · 塵沙惑無明惑)을 완전히 끊고 두 장엄(二嚴: 智慧莊嚴 · 福德莊嚴)을 원만히 갖춘 경지와 같을 수 있겠소? 아니면 법신을 증득한 보살이 무명(無明)을 차례로 깨뜨리고 불성(佛性)을 차례로 보아 가는 경지에 해당하겠소? 그도 아니면 성문이나 벽지불이 보는 미혹(見惑)과 생각하는 미혹(思惑)을 완전히 끊는 경지에 속하겠소?

 

물론 세 단계의 경지 가운데, 보고 생각하는 미혹을 완전히 끊는 성문의 단계가 가장 낮지만, 그러나 이미 여섯 신통을 자유자재 로이 얻은 경지라오. 그래서 자백(紫柏) 대사도 "만약 그 자리에서 범부의 감정만 잊을 수 있다면, 산의 암벽도 그냥 통과할 수 있다.”고 말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