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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96)

화두 놓고 염불하세(96)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8. 궁금증 풀고 정견(正見)으로 정진(精進)하세(8)

 

 

4) 선종과 교종

 

말세에 강설()하는 사람들은 으레히 선종을 말하기 좋아하오. 그래서 그 말을 듣는 청중들이 대부분 말에 따라 겉돌기 마련이오. 그러나 내 생각에, 선가(禪家)의 기어(機語: 논리나 뜻으로 풀이할 수 없는 機微의 언어)는 어떠한 의미도 전혀 없소. 오직 찾아오는 기미(機微)에 대하여 향상(向上 선가의 지극한 곳)의 길을 가리켜 줄 뿐이오. 이러한 기어는 단지 참구할 수 있을 뿐이거늘, 어찌 강설할 수 있단 말이오?

 

만약 이와 같이 경전을 강설한다면, 오직 격식을 초월하는 최상근기의 서비만 이익을 얻을 수 있소. 그 나머지 중하류의 범부 중생들은 모두 오히려 그 병폐(부작용)를 받기 마련이오.

 

선종에서는 기봉전어(機鋒轉語: 근기에 따라 날카롭게 내던지는 말, 화두)를 힘써 참구할 줄은 모르고, 망령되이 자기의 논리와 의미로 풀이하려는 폐단이 많소. 또 교종에서는 실제의 이치와 사물을, 자기가 몸소 경험한 경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믿지 않고, 그것이 단지 비유적인 의미로 불법을 표현한 것이라고 오인하는 경향이 크오. 그러면서 교종으로 선종을 공격하고, 선종으로 교종을 공격하고 있소. 그래서 근래 종파 간의 갈등과 비판은 전에 없이 막대하오.

 

조계(曹溪: 육조 혜능이 주석한 곳으로 이곳에서 선풍을 크게 드날렸다)이후에 참선의 도가 크게 일어나,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不立文字)는 말이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소. 그래서 (화두를 뜻으로 이해하려는 길이 날로 넓혀지면서, 깨달음의 문은 거의 막혀 닫힐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남악(南嶽)이나 청원(靑原) 같은 여러 조사들은 모두 기어(機語)로써 사람들을 맞이하였소.

 

설사 부처님이나 조사들이 나타나 말씀을 하신다고 해도, 그 질문에는 전혀 대꾸할 길이 없소. 정말로 딱 들어맞게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 말은 짐작도 할 수 없는 것이오. 이걸로 시험해 보면, 황금과 투석(石金과 비슷한 自然銅精品)이 금방 구별되고, 옥과 돌이 확연히 구분되오. 그래서 가짜로 대충 법도(法道)를 흉내를 낼 수가 없는 것이오. 이것이 바로 기봉전어(機鋒轉語: 화두)가 생겨난 유래라오.

 

그 후로 이러한 선종의 법이 날로 치성해지면서, 선가의 선지식들이 행세하며 남들의 화두를 답습하면, 판에 박힌 격식으로 전락하여, 수행자들을 잘못 이끌고 선종의 가풍을 어지럽힐까 염려되었소. 그 결과 기어(를 갈수록 날카롭고 준엄하게 쓰게 되었소. 그래서 근기에 따라 내던지는 화두가 일정한 방향 없이 변화 무쌍하여, 사람들이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을 꾸짖고 조사를 욕하는가 하면, 경전과 교법을 배척하고 정토와 염불을 부정하기에 이르렀소. 이와 같은 작용은 남악(南嶽) () 대사의 두 구절에 확연히 나타나 있소.

 

超群出眾太虛玄 초군출중태허현

指物傳心人不會 지물전심인불회

무리를 빼어나고 대중을 벗어나니 큰 허공이 그윽하고

사물을 가리켜 마음을 전하나 사람들이 알지 못하네.

 

그러나 이러한 말을 실제 법()으로 오인하면, 그 죄가 오역(五逆)과 같게 되오. 이러한 말은 사람들의 감정과 선입견을 도려내고, 논리적 사고와 지식적 이해의 길을 막아 버리는 것이오. 근기가 뛰어나고 인연이 무르익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가리키는 뜻을 알아채고, 향상()의 이치를 철저히 깨달을 수 있소. 또 근기가 좀 살아있는 자는, 진실되게 참구에 힘써 반드시 확철 대오하고야 말 것이오.

 

당시에는 선지식이 많았고, 사람들의 근기도 아직 괜찮았으며, 교리(도 분명하고, 생사 해탈에 대한 마음도 간절하였소. 때문에 설령 그 자리에서 곧장 훤히 깨닫지는 못할지라도, 비천한 열등심은 결코 내려고 하지 않았다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 어려서부터 유가의 글을 공부하여, 세상의 이치도 잘 모르고 불법의 교리도 알지 못하면서, 처음 발심하면서부터 곧장 선종의 문에 들어가기 일쑤요. 선가의 선지식이라는 분들도 단지 자기 문중을 지탱하면서 옛사람들의 거동을 흉내낼 뿐, 전법과 불도의 이해득실은 따지지도 않고 있소.

 

또 그 밑에서 공부하는 수행자들도 진실된 의문의 감정을 내지 아니하면서, 하나하나 실제 법()인 걸로 생각하고 있소. 더러는 요즘 사람이 내던진 말이나 모든 옛사람들의 기록 가운데서, 자기 생각으로 조그만 이론 체계를 그럴듯하게 꾸며 본다오. 그게 결국은 문자에 따른 의미 해석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데도, 스스로 궁극의 향상(向上) 이치를 완전히 깨달아 더 이상 참구할 게 없다고 자부하고 있소.

 

그리고는 선지식의 행세를 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고 문중을 지키는 것이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자신을 통달한 대가가 아니라고 볼까 두려워하여, 참선과 강설을 함께 펼치는구료. 참선과 교법을 아울러 통달했다고 일컬어지기 바라는 것이오.

 

그런데 참선을 말할 때는, 고승 대덕들이 궁극의 향상(向上)을 가리킨 말()에 대해서, 문자상의 뜻이나 풀이하는 말을 지껄이는 게 고작이오. 또 교법(敎法)을 말할 때는, 여래께서 원인 자리를 닦아 과보의 지위를 얻은 도(: 진리)에 대해서, 도리어 형식적인 표면상의 법이나 상징적인 비유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