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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71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71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를 다 하나의 생명으로 우리가 볼 줄을 알아야 그래야 안심입명(安心立命)이 됩니다. 우리 마음이 어디가 근원적인데 의지가 딱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누구하고 싸우고 누구하고 겨루고 한다 하더라도 굳건한 의지가 있으면 우리가 안심하고 싸울수도 있는 것이고 믿고서 할 수가 있는 것인데 의지가 없으면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존재(存在)가 의지할 것은 일체존재(一切存在)의 근원(根源)자리 성품(性品)자리 우주의 성품자리인 그 불성(佛性)에다가 의지해야 비로소 안심입명이 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불성자리를 바르게 이해를 하고 거기다 의지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한테는 불안은 없습니다. 불안은 절대로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죽을 염려도 없고 또는 실패한다 하더라도 내내야 겉만 허망(虛妄)한 겉만 변동이 있는 것이지 참다운 성품자리에서는 손해 볼 것이 없단 말입니다. 변동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재산으로 해서 우리가 지독한 손해를 봐가지고서 재산의 여러 가지 손해 때문에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겠지요. 형제간에 재산가지고 싸우는 분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은 하나의 변화(變化) 무상(無常)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야말로 꿈이나 허깨비 같은 것입니다. 참다웁게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결국은 모두가 다 불교(佛敎)적인 의미에서 보면 다 공()인 것입니다. 제법(諸法)이 공()이란 말입니다. 인연(因緣)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다 공이란 말입니다. 인연이 흩어지면 그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나무를 준비해 가지고 하나의 집을 짓는다고 생각을 해도 인연이 다해서 집을 해체 할 경우에 기둥을 떼 내고 서까래를 떼 내고 다 떼 내버리면 나무만 남지 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와 똑같이 물질이라는 것은 그때그때 조건부로 해서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사실은 존재(存在)하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참말로 존재하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바 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님들 우리 종교인(宗敎人)들은 진여불성에다가 우리 마음을 항시 못 박아 둬야 됩니다. 진여불성에다가 못 박아둬야 진여불성하고 가까워진단 말입니다. 진여불성하고 가까워져야 우리 생명이 비로소 진화가 되고 생명이 비로소 그때는 보다 더 본래 고향(故鄕)과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을 모르면은 다 모두가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상실한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시 불안스럽지요.

 

밥을 먹으나 또는 어떤 경우에 우리가 지독한 고생 속에 있으나 어느 때나 인간이라는 것이-그 인생은 고(),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이별도 더러는 해야 되는 것이고, 구부득고(求不得苦). 우리가 제아무리 애쓰고 구한다 하더라도 구한 것을 다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참다운 성품(性品)을 구하고 불성(佛性)을 구하고 진리(眞理)를 구한다고 생각 할 때는 한번 생각하면은 한번 생각 한 만치 진리로 차근차근 우리가 다가서 갑니다만은 물질이라는 것은 그렇지가 않단 말입니다.

 

물질은 한계가 있어놔서 자기가 많이 가질라고 하면 옆에 사람들 하고 반드시 갈등이 온단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 할 때는 우리 인생이 참 그야말로 재미지고 인생이라는 것이 아주 행복스러운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되지만은 깊이 생각하면 생각해볼수록 인생은 참 고생 바다입니다. 조금 행복스러운 것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 밑바닥은 다 고생의 원인입니다. 그러기에 참다운 불교인들은 윤회(輪廻)를 그렇게 싫어하고 윤회를 피할라고 애쓰지 않습니까. 윤회라, 윤회는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생명이 과거(過去)에서부터 금생(今生)으로 금생에서 내생(來生)으로 항시 이와 같이 뱅뱅 돌아간단 말입니다.

 

과거 전생에 죄를 많이 짓고 잘못을 많이 했으면은 금생에 또 잘 못되게 태어나는 것이고, 사람만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개나 돼지나 다른 걸로도 분명히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조금도 거짓이 없습니다. 금생에 우리가 마음 쓴 대로 내생에 가서 몸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처님을 믿는 분들은 그러한 금생에 우리가 태어나고 또 내생에 태어나고 그러한 뱅뱅 도는 것을 안 할라고 애쓴단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아까 말씀마따나 모두가 고생뿐이란 말입니다. 고생뿐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는 사랑하는 분들과 다 해어지고 그래야 되기 때문에, 금생에 잠시간 만나서 친한 경우도 슬프고 그럴 것인데 하물며 부부(夫婦)간되고 부자(父子)간되고 모자(母子)간 되고 이래 보십시오. 이런 분들이 해어질 때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큽니까. 그러나 우리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뱅뱅 도는 그런 업장 따라서 카르마 따라서 이렇게 옮아가는 그런 생활에서는 그런 이별이나 우리가 구해서 얻지 못하는 그런 고통이나 말입니다. 병이나 늙음이나 도저히 면할 수가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이제 80이 거의 다 되어 가니까 더러는 꼭 죽을라고 한번 해보고 또는 자연적으로 노령 때문에 찐이 빠지니까 꼭 죽음이나 마찬가지의 경우도 격어보고 했습니다만은 어느 누구나가 다 피할 수가 없어요. 저보다도 더 나이 젊은 스님들도 굉장히 많이 갑니다. 저보다도 부처님 일도 훨썩 많이 알고 똑똑하고 그런 스님들도 가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더러는 아이, ! 나 같은 사람이 너무나 늑장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가야할 것인데 지금 너무 오래 살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이따금 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가 인연 따라서 과거에 죽고 또 현재에 태어나고 내생에 가 태어나고 또 죽고 또 태어나고 -나고 죽고 나고 죽고 수천번 수만번 되풀이 되는 것이 이것이 윤회(輪廻)생활인 것입니다. 윤회라. 삼세윤회(三世輪廻), 인생에 있어서 좀 복이 있는 사람들은 인생이 재미지고 유쾌하고 그런 일도 많이 계시겠지요. 그러나 응당 닥쳐올 죽음을 생각 해 보십시오. 재미지고 뭣이고 그런 것은 어디로 간곳이 없단 말입니다.

 

슬픔과 고통과 아픔으로 해서 맞이할 수밖에 없는 그것이 우리 죽음인데,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삼세윤회 하는 여기서 죽고 또 태어나고 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그런 것을 우리가 초월(超越)할라고 애쓴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佛敎)가 또 그런 가르침입니다. 다른 종교(宗敎)도 내세(來世)나 또는 전생(前生)이나 그런 것을 아주 완전히 무시한 종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히는 잘 모른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만이 삼세윤회라.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우리 생명이 나고 죽고 하는 그런 도리를 분명히 안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佛敎)인들은 그런데 가서 우리 참 커다란 자량(資糧)이 있습니다. 인생을 그대로 불교는 다 보고 그대로 말씀한 법문(法門)이란 말입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는 분명히 과거에도 생명이 존재했고 금생에도 있다가 내생도 존재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나고 죽고 하는 이런 정도로 해서는 불교가 못 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하나의 기본적인 도리인 것이지 참다운 도리는 우리가 나고 죽고 하는 윤회를 우리가 떠난단 말입니다. 극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선(參禪)을 하고 염불(念佛)을 하는 것도 금생에 더욱더 잘살고 내생에 가서 천상(天上)에 가서 태어나고 또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더 잘나고 똑똑하고 재주 있고 이렇게 태어나게 시리 하기 위해서 참선하고 염불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본 근본적인 도리는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가 윤회를 극복한단 말입니다. 카르마의 구속을 벗어난단 말입니다.

 

윤회를 벗어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있으나 인제 우리가 흔히 가장 쉽게 아는 삼학도(三學道), 우리가 도덕적으로 완벽을 기하는 계율(戒律)을 지키고 말입니다. 윤리도덕(倫理道德)적으로 우리가 완벽을 취하는 계율을 지키고, 계율을 지키는 것은 우리 인간의 도덕인 동시에 하나의 우주(宇宙)의 도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생물을 죽이지 말라. 고기를 먹지 말라. 우리불자님들 고기를 대체로 많이 자시겠지요. 가급적이면 자시지 않아야 됩니다. 똑같은 생명입니다. 그걸 먹어서 사람의 꼭 피가 되고 살이 되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 계율(戒律)가운데 가장 허두의 중요한 것이 불살생계(不殺生戒) 아닙니까. 같은 생명을 내 생명을 본래는 다 같은 생명인데 나한테 있는 생명을 북돋우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우리가 해코지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기에 불살생계에서 나와 있는 부처님 법문을 보면 우리가 육식(肉食)을 하고 다른 생명을 죽인다고 생각할 때에 단불종(斷佛種)이라, 불종자를 끊어버린단 말입니다. 자비로운 종자를 끊어버립니다.

 

우리가 낚시질을 많이 해서 고기를 많이 잡고 고기를 많이 먹고 한 사람들은 다른 동물들이 보면 벌써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몰라도 모든 존재는 본래 불성이기 때문에 다 영감(靈感)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가 다른 생물(生物)을 함부로 하고 고기를 많이 먹으면 다른 동물들이 우리를 보고서 싫어한단 말입니다. 산에 가서 공부를 해봐도 정말로 계행(戒行) 잘 지키고 있으면은 그 묘한..., 까마귀나 까치나 모두가 옆에 와서 그렇게 친절히 해요.

 

우주(宇宙)란 것은 신비(神秘)에 가득 찬 것인데 우리 중생들이 잘 못살아서 그런 신비를 수용 못합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우리가 완벽을 기한단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금생에 서로서로에게 꼭 필요한 것이고 또는 동시에 우리가 윤회(輪廻)를 벗어나는 기회로 도덕적(道德的)인 생활 계행(戒行)이 꼭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 마음을 항시 진리(眞理)에 지향해서 우리 마음을 하나로 통일을 시킨단 말입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기본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지 우리 마음이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윤회를 벗어나는 참다운 성품을 아는 그런데 까지는 미치지 못한단 말입니다. 우리마음을 항시 부처님쪽으로 불성 쪽으로 우리 마음을 모은단 말입니다.

 

우리는 참선을 하고 염불을 많이 하는 그것은 상당히 어렵고 우리가 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할란가 모르겠습니다만은 사실은 제일 쉬운 것입니다. 제일 쉽습니다. 참선도 바르게 하면은 하면 할수록 몸도 마음도 가볍게 다 그러는 것입니다. 잘못 길들여서 억지로 해야 몸도 상하고 그러는 것이지 그 본래 불성 우리 불성(佛性)이라는 것은 만능(萬能)의 자리인데 그 만능의 자리와 우리가 가까워진다고 생각 할 때에 얼마나 우리 몸이나 마음에 좋겠습니까.

 

우리가 화두공안(話頭公案)을 든다 하더라도 단순히 그냥 억지로 의심(疑心)만 하면 참다운 참선(參禪)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부처님을 우리가 분명히 구해서 부처님 자리를 가고자하는 간절한 마음이 밑바탕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염불(念佛)도 그냥 노는 입에 단순히 염불이 아니라, 이른바 공염불(空念佛)이 아니라, 여기나 저기나 우주에 가득 찬 부처님을 우리가 생각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은 어디가 있고 어디가 없는 그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느 때 어디에나 존재하는 우주의 참다운 생명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을 그렇게 바로 믿어야 됩니다. 부처님은 그냥 그렁저렁한 하나의 성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는 또 만능의 자리란 말입니다. 만능의 자리, 그 만능의 자리란 것이 필요합니다. 어떠한 것이나 그 가운데는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