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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67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67

 

참선은 지금은 꼭 해야 씁니다. 인류문화(人類文化)가 지금까지 20세기 동안 이와 같이 문명사회(文明社會)가 되었지마는 문명사회 가운데서 가장 고도한 인간의 본래면목을 찾는 자리, 인간의 본래면목을 찾는 가장 수승한 수행법 이것이 참선입니다. 따라서 우리 현대인들은 참선을 꼭 알아야 쓰는 의무가 있습니다. 이렇게 문명사회의 모든 모순(矛盾)을 지양시키는 유일한 법이 참선인데 말입니다. 불법문중에 참선 모르면, 불법문중에 그런 가치가 없습니다.

 

이렇게 정견 정사유 정념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가부좌(跏趺坐)를 안 틀어도, 걸어가면 입선(立禪)인 것이고, 누우면 와선(臥禪)인 것이고, 앉으나 서나 누우나 말하나 또는 말 안 하나, 밥을 먹으나 모두가 그때는 참선이 됩니다. 마음만 그 자리 마음만 실상자리에 안주(安住)하면 그때는 참선입니다.한데 지금 말씀이 너무 장황히 됩니다마는 몇 말씀만 더 부언(附言)해서 그만둘까 생각합니다마는 지금 또 문제시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은 참선(參禪)과 염불(念佛)은 그건 다르다. 이렇게 말한단 말입니다.

 

저한테 와서 우리 불자님들이 스님네나 또는 일반 재가불자님들이나 공부에 관해서 가장 질문이 많은 것이 무엇인고 하면은 참선 염불의 차이란 말입니다. 보통은 다 염불(念佛)은 저만치 하근중생(下根衆生)이 하는 방편(方便)인 것이고, 참선(參禪)은 저만치 고도한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한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내 본바탕이 부처고 말입니다. 일체중생(一切衆生) 그대의 본바탕이 다 부처거니 모든 존재의 본 실상이 부처거니 말입니다. 본바탕을 생각하는 것이 염불 아닙니까. 생각할 염()자 부처 불()자 말입니다. 부처라는 것은 본바탕에 대해서 한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一物) 또는 부처(), 극락(極樂), (), 진리(眞理), 진여(眞如), 법성(法性) 똑 같은 뜻입니다. 법성, 부처, , 진리, 하나 말입니다. 주인공(主人公)도 같은 뜻입니다. 모두가 다, 주인공을 참나를 대명한 것이 부처거니 말입니다. 관음보살(觀音菩薩)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모두가 다 참 나를 대명한 대명사(代名詞)입니다. 참 나를 대명한, 내가 부처님을 외이는 것이 염불인데 내가 참 나를 외이는 것이 염불인데 내가 참나를 생각하는 그것이 염불인데 말입니다. 우주의 본바탕을 생각하는 것이 염불인데 그 염불이 왜 방편이 될 수가 있습니까? 방편일 수 없습니다.

 

다만 방편이 될 때는 까닭이 있습니다. 부처가 나나 우주의 본바탕이 아니고 그냥 저만치 내 밖의 어디가 계시다가 우리가 간절히 바라면 기도 모시면 그때는 우리를 돕는다. 그 정도로 생각하는 부처 같으면 그때는 참다운 공부가 못 돼요. 그렇게 생각 할 때는 참선은 저 위에고 염불은 밑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염불의 본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내 본질을 재인식하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도 우리가 종송(鐘頌) 할 때 말입니다. 일십일만구천오백(一十一萬九千五百) 동명동호대자대비아미타불(同名同號大慈大悲阿彌陀佛)이란 말입니다. 도마죽위무한극수(稻麻竹葦無限極數), 마치 삼대같이 저 벼논에 있는 벼 포기 같이 말입니다. 들에 있는 벼 포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와 같이 많듯이 대밭에 대의 포기가 많듯이 말입니다. 그와 같이 많듯이 천이나 억이나 일십일만 구천오백이라 동명동호란 말입니다. 그와 같이 많지만 동명동호라, 다 같은 이름, 김 아무개 박 아무개 또 누구누구 서양사람 동양사람 이와 같이 천차만별(千差萬別)로 있다 하더라도 동명동호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똑 같은 모두가 다 같은, 참다운 이름에서는 같은 이름의 부처님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하는 염불은 바로 그것이 참선입니다. 이것보고 염불선(念佛禪) 그래요 염불선 말입니다. 염불선이라, 이런 염불이 어떡해서 무자 화두나 이뭣꼬 화두나 그런 화두 하고 차이가 있겠습니까. 무자 화두나 이뭣꼬 화두도 역시 모두가 다 내 본래면목을 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을 자기 생명 자기 자성 자기 본바탕으로 생각할 때는 그때는 화두나 염불이나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원효(元曉)스님이나 의상(義湘)스님이나 서산(西山)스님이나 보조국사(普照國師)나 대각국사(大覺國師)나 그런 분들은 사실은 대부분 다 염불선(念佛禪)을 하신 분들 입니다. 또는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달마(達磨)스님 때부터서 육조혜능(六祖慧能)까지는 제가 생각할 때는 여러분들이 나중에 연구해 보십시오마는 특히 4조 도신(道信)스님 같은 분들은 분명히 염불선(念佛禪)을 한 분입니다.

 

그 뒤에도 우리 한국에서 신라 때 간 무상(無相)스님, 무상스님이 중국 들어가서 세운 종파가, 자기는 짐짓코 종파를 안 세웠지마는 그 후대에 이루어진 것이 정중종(淨衆宗)이라. 저기 지금 정중당(淨衆堂)이라고 있습니다. 정중당 그 이름은 사실은 애초에 제가 알고 지은 것은 아닙니다마는 무상스님이 지은, 무상스님 때문에 이루어진 종파가 정중종인데 정중종도 역시 염불선입니다.

 

또는 남산 염불종이라, 이것도 역시 염불선입니다. 또는 그 뒤에도 송나라 때나 특히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때 말입니다. 당나라 때나 또는 송나라 때까지는 일반 선이 좀 많이 있었으나 송나라 때 이후부터서 적어도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때는 딴 방법도 있었으나 대체로 가장 많이 한 즉 다시 말하면 그 당시에 있어서 임제선이나 조동종이나 가장 그 시대를 주름 잡던 위대한 선사들이 한 것이 뭣인가 하면은 주로 염불선이란 말입니다.

 

제가 이름 하면은 그야말로 참 청료장노(淸了長蘆)라 중봉명본(中峰明本)이라 자백진가(紫栢眞可), 운서주굉(雲捿株宏)이라 또 감산덕청(敢山德淸)이라, 이런 그 당시의 임제종(臨濟宗) 조동종(曹洞宗) 그런 종파들을 그런 선종을 이끌어 가는 그 분들이 모두가 다 주로 염불선(念佛禪) 쪽으로 했던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무슨 문화나 시대가 걸러지고 고도로 발달되면 그때는 종합적으로 지향돼 갑니다. 지향성이 다 종합되어 갑니다. 그런데 같은 행법도 원융적(圓融的)인 즉 말하자면 원통적(圓通的)인 행법을 취할 때는 필연적으로 염불(念佛)쪽으로 안 갈 수가 없습니다.

 

원불교(圓佛敎)나 또는 무슨 불교나 종파가 많이 있으나 대체로 염불하는 수행법은 다 무시를 못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가장 많이 말씀한 법문이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한국에서나 또는 중국에서나 인도에서나 가장 많이 한 분들이 내내야 그것이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염불하는 수행 방법인데, 그 염불도 방편염불(方便念佛)은 그것이 저만치 참선보다 못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지만 말입니다. 염불의 뜻을 바로 알 때는 바로 그것이 염불선(念佛禪)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정견을 가지면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부처거니 우리가 염불을 할 필요가 뭣이 있는가 가만있으면 쓰겠지. 천지우주가 부처거니 새삼스럽게 부처이름을 부를 필요가 뭣이 있는가 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면 좋습니다. 즉 그렇게 하기 때문에 조금도 문제성을 문제의식이 없이 모두가 부처거니 하고서 묵조(黙照)하는 잠자코서 하는 참선도 좋습니다.

 

또는 그러한 것을 다, 부처를 내가 못 봤거니 아미타불도 못 보고 관음보살도 못 보고 또는 우리가 불성을 못 봤거니 못 본 그것을 우리가 의단(疑端)을 해 가지고서 의심하는 행법도 물론 좋습니다. 다 좋지만 어느 한 가지만 옳다고 고집 하면 그건 좀 곤란스럽습니다. 고집하면 그건 부처님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평등무차별의 진여불성(眞如佛性) 가운데서 하나를 고집하면 벌써 고집하는 그것이 법집(法執)이 되어서 불성을 바로 못 보는 하나의 증좌입니다.

 

참선공부는 불교의 고도한 수행법이고 인류문화(人類文化)의 가장 최선의, 최상의 수행법입니다. 그러나 참선이 최선의 수행법이 되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마따나 바른 견해가 분명히 있어야 씁니다. 바른 견해가 있으면 여러분들은 지금 돈오(頓悟)를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 인식으로 바로 돈오를 하신 것입니다. 돈오를 해버려야 그래야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염불이고 참다운 선()인 것입니다. 아무리 모양은 좋아도 돈오를 못 하면은 바른 견해가 못 서면은 그때는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꼭 참선을 하셔야 씁니다.

 

참선을 하셔 가지고서 지금 갇혀있는 마음, 범부의 마음은 갇혀 있습니다. 범부의 마음은 지금 번뇌의 탐욕심(貪慾心)이나 번뇌의 여러 가지 그런 얽힘으로 해서 꽁꽁 묶여 있단 말입니다. 이 마음 없으면 우리는 성불을 못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식으로 해서 비록 내가 지금 당장에 부처는 증명하지 못 했다 하더라도 이 마음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여러분 마음 떠나서 부처가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과, 여러분 마음의 본바탕의 불성과는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의 본마음은 부처인 것이고 말입니다. 우리는 본마음을 못 봅니다.

 

어째서 못 보는 것인가? 우리 마음은 확신을 못 가지니까 못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말로만 인식가지고서는 간혜지(乾慧智)로 해서는 확신을 못 갖습니다. 확신을 갖게시리 하기 위해서 염불도 천 번도 헤아리고 만 번도 헤아립니다. 만약 염불을 헤아리는 것이 공()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그건 할 필요가 없지마는 아까 말씀마따나 부처님 법문을 우리가 확신하기 위해서 우리 마음이 맑지가 않으면 참다운 도리를 잘 인정을 못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흐리멍덩하면 흐리멍덩할수록 우리는 바른 신앙(信仰)이 못 되는 것입니다.

 

즉 그러기에 부처님 공부는 되풀이 되풀이 하는, 좀 지겹더라도 되풀이 되풀이 하는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되풀이 하다 보면 한번 하면 한 만치 하루 하면 하루 한 만치 맑아온단 말입니다. 그렇게 맑아오다가 종당에 가서는 온전히 하나가 되어버린단 말입니다. 온전히 하나가 못 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애써서 하나가 되고자 하는데서 우리 불자(佛子)의 참다운 사명(使命)과 의무(義務)가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 제가 해드릴 것이 뭣인고 하면은 우리는 지금 보통은 다 복()을 빕니다. 저한테 와서 말씀한 분도 공부를 어떻게 했으면 쓰겠습니까 묻는 분들은 십 분의 일도 못 되시고 십상 아홉쯤은 모두가 대부분 다 그와 같이 자기 운수나 그런 복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응당 그래야 할 것입니다. 어머니가 되고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되고 해놓으면 응당 책임감, 좋은 아버지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응당 복이 있어야 씁니다. 복 없으면 사실은 그때그때 우리가 고()가 더 많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참선하는, 자기 본바탕을 구하는 문제와 복 받는 문제와 길이 다르다고 생각할 때는 참 그러면 딱합니다. 복은 복대로 또는 공부는 공부대로 그래 버리면 결국은 불법의 참다운 뜻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다행스럽게도 우리 공부를 바로 하면은 복도 결국은 우리가 최상으로 받는단 말입니다. 그걸 꼭 명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