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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66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66

 

우리가 닦아서 자기 본바탕을 깨닫는 이것이 분명히 닦고 증 하는 것이 있습니다마는 오염즉부득(汚染卽不得)이라. 오염은 내내야 더러움 즉 더럽히는 것 아닙니까. ‘오염해서는 안 됩니다.’ 란 말입니다. 그러면 오염이란 건 어떤 것인가? 깨달아버리면 깨달아버렸지 오염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오염 이것은 뭣 인고 하면은 번뇌, 번뇌(煩惱)가 바로 오염(汚染)입니다.

 

또 번뇌는 뭣이 번뇌인가. 우리가 번뇌 할 때는 좋은 생각은 번뇌가 아니고 나쁜 생각만 번뇌다. 남을 자비심(慈悲心)으로 이끌고 또는 그야말로 좋은 생각 이것은 번뇌가 아니라고 하지만은 엄격한 의미에서는 좋은 생각 나쁜 생각 다 두리뭉실해서 분별시비(分別是非)하는 것은 모두가 다 번뇌입니다. 우주의 진리가 하나의 진리로 해서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미묘청정(微妙淸淨)한 하나의 진리(眞理)로 해서 뭉쳐있는 것인데 여기다 대고서 그냥 좋다 궂다 말입니다. 옳다 글타 하는 시비분별(是非分別)하는 그때는 모두가 다 번뇌(煩惱)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오염이란 말입니다.

 

범부(凡夫)가 있고 부처가 따로 있고 중생(衆生)이 있고 성자(聖子)가 있고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청정미묘한 다 불성(佛性)뿐이다. 이런 자리에서는 중생이고 성인이고 부처고 범부이고 그때는 차이가 없습니다. 범부고 중생이고 부처고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부처거니 어따 대고서 부처요 중생이고 또는 선()이고 악()이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도 역시 그때는 다 부처고 말입니다. 악도 역시....

 

겉만 현상적인, 사실 있지 않은 허망무상(虛妄無常)한 현상적인 그런 면에서 이것이 나쁜 것이지 악도 없단 말입니다. 강도(强盜) 역시 어쩌다가 인연 따라서 겉만 강도의 모양을 취한 것이지 알맹이는 부처란 말입니다. 따라서 겉만 보고 속 알맹이 불성을 못 볼 때는 그냥 미운 놈은 분명히 밉단 말입니다. 나쁜 놈은 분명히 밉습니다. 나쁜 놈은 그냥 곧 때려죽이고 싶단 말입니다. 그러나 역시 속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알맹이를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생명(生命)이 하나거니 저절로 그때는 동체대비(同體大悲). 같은 몸에 우러나오는 참다운 자비(慈悲)가 나온단 말입니다. 남한테 우리가 아무리 보시(布施)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나와 남의 구분을 딱 세우면 그때는 상()이 있습니다. 상이 있는 보시는 해탈(解脫)의 법문이 못 되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거니 자타(自他)가 둘이 아니거니 하는 그 동일성을 분명히 우리가 느끼고서 상을 털어 버려야 해탈의 법문이 돼서 참다운 보시란 말입니다. 참다운 자비입니다.

 

우리는 다 범부니까 마땅히 그야말로 성불(成佛)은 저만치 높고 우리는 여가 있다. 이와 같이 부처는 높고 난 여가 있다. 부처한테 올라가려면 보살 십지(十地), 또는 몇 지요, 이와 같이 한계가 많이 있다. 이렇게 차별 분별 하는 것은, 잘 외워두십시오. 이런 것이 아주 그 공부를 많이 해본 분들이 아니면 별로 취미가 없는 문제입니다마는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취미가 없더라도 바른 실상(實相), 바른 실상을 우리가 못 느끼고 못 깨달으면 그때는 우리가 바로 못 살아 간단 말입니다.

 

불교(佛敎)도 바로 못 서고 또는 불교도 그때는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또는 현대도 역시 이러한 부처님의 진리가 아니고서는 현대적인 인생고(人生苦)를 해결을 못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범부가 따로 있고, 우리는 범부고 석가모니(釋迦牟尼)나 육조(六祖)스님이나 오조(五祖)스님이나 모두가 성인(聖人)인지라 성인과 범부의 차이는 있습니다.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그 차이도 우리 중생의 상대적인 그런 안목으로 보는 것이니까 범부가 있고 또는 석가모니가 있고 우리가 이와 같이 차이가 있는 것이지 참말로 본바탕에서 불성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도 차별이 없습니다.

 

고하(高下)도 없고 그땐 그야말로 범부(凡夫)와 성인(聖人)과 중생(衆生)과 또는 부처가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분명히 우리가 닦아서, 우리는 범부니까 성불(成佛)을 해야 하기 때문에 닦고 우리가 증명하고 하는 그야말로 이렇게 수증(修證)이 닦고 증명하는 것은 이것은 없지가 않습니다. 있다 하더라도 부처는 높고 난 낮잡고, 또는 부처한테 갈라면 오랫동안에 올라가야 하고 이런저런 구분, 이런저런 구분을 없애버려야 됩니다. 올라갈 때는 분명히 우리가 닦아서 올라갈망정 본래는 하나단 말입니다.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도 모두를 다 하나로 보는 것은 성자가 억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자(聖者)의 청정(淸淨)한 안목(眼目), 우주의 바탕을 바로 보는 청정한 안목에서는 나쁘게 안 보인단 말입니다. 모두가 다 불성으로 보이거니 어떻게 나쁘게 보이겠습니까. 중생은 없는 것을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사실은 없는 것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나쁜 것 좋은 것이 사실은 없습니다. 청정미묘한 모두를 바로 보는 불성 안목에서는 그렇게 안 보인단 말입니다. 그렇게 안 보이니까 본래에서는 성자고 범부고 선이요 악이 없다는 것이지 억지로 중생 때문에 없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범부지(凡夫地)에 있어서 당하 못 깨닫고 앞으로 오랫동안 공부해서 금생(今生) 내내에도 못 깨달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관념(觀念)은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안 나왔으면 모르거니와 석가모니가 나왔고 또 그 뒤에도 무수한 도인(道人)들이 나와서 본래 모두가 바로 보면 다 부처라고 했거니 부처란 자리 그 자리를 딱 지켜야 쓴단 말입니다. 부처란 자리를,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부처란 자리를, 그 자리를 딱 지키고서 그 자리를 이탈하지 않아야 쓰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이탈 않고서 공부하는 것이 이것이 즉 말하자면 오염(汚染) 되지 않는 공부란 말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애쓰고 아무리 공부하는 모양을 잘 취한다 하더라도 부처님은 저 위에 계시고 그리고 나는 여기 있다. 이렇게 자기를 낮잡게 해서 고하(高下)를 둘 것이 아니라 비록 내가 지금 이렇게 있다 하더라도 비록 내가 욕심(慾心)도 부리고 또는 진심(嗔心)도 부린다 하더라도 나의 본질이나 석가모니의 본질이나 조금도 호리(毫釐)가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마음을 깨닫지 못해서 내 본바탕을 당하 못 볼 뿐입니다. 따라서 지금 나라는 사람도 역시 석가모니가 보면 그때는 똑같은 부처입니다. 석가모니가 본 다고 생각할 때는 갑이나 병이나 을이나 박가나 김가나 다 석가모니와 똑같은 부처로 보여야 쓰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처님 도리란 말입니다. 우리 불교(佛敎)는 지금 이렇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탐욕심(貪慾心)도 많이 있고 곧 지금 욕심 부리고 한다 하더라도 역시 나는, 내 본질은 나한테 잠재해 있는 힘이라는 것은 석가모니와 똑같다. 이렇게 느껴버려야 그래야 참다운 불교인 입니다. 그렇게 말씀하니까 육조스님께서 육조(六祖) (),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차(只此), 다만 지() 이 차(), 아니 불(), 물들 염(), 더러울 오(), 모두 제(), 부처 불(), 갈 지(), 바 소(), 지킬 호() 보호할 호자, 생각 염(), 너 여(), 또 역(), 같을 여(), 이 시(), 이것은 옳을시 또는 이시라 합니다. 또는 나 오(), 또 역 (), 같을 여(), 이 시() 말입니다.

 

지차(只此), ‘다만 이와 같이지금 그대가 말한 이와 같이 불염오(不染汚), ‘염오가 없다는즉 말하면 오염이 안 된다는비록 닦기는 닦는다 하더라도 고하도 안두고 시비도 안두고 차별도 안 두는 그런 툭 티인 마음에서 닦는 이것이 제불지소호념(諸佛之所護念)이란 말입니다. 석가모니나 또는 모든 부처님께서 다 생각하고 지키는 보호하는 그런 가르침이고 말입니다.

 

석가모니께서 말씀은 많이 했지마는 다른 방편설(方便說)은 그때그때 임시로 말씀하신 것이고 이러한 본래 오염이 없다.’ ‘본래청정(本來淸淨)’이라는 말입니다. ‘본래청정한 이런 법문은 삼세제불(三世諸佛)이 항시 지키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래야 만이 삼세제불 이것이 본뜻입니다. 즉 말하자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역(汝亦), ‘그대역시 그와 같이 말씀을 했고오역여시(吾亦如是), ‘나 역시 그와 같이 말씀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은 지금 우리 불교계에서 문제가 돼 있는, 즉 아주 가장 중대한 그야말로 참 이슈가 돼 있는 그것이 뭣 인고 하면은 우리 수행(修行)하는데 있어서 말입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란 말입니다. 이 말을 가지고서 시야비야 논쟁도 하고 또는 불법이 기다 아니다. 이것만 기다. 마치 어느 분들은 지금 운동권 학생들 모양으로 목소리가 굉장히 높단 말입니다. 이래야 할 것인가? 이럴 필요가 있는 것인가 말입니다.

 

어려운 문제니까 조금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또는 제 말씀이 난해(難解)하다 하더라도 이런 때 기억해 두셨다가 나중에 두고두고 비교도 해보시고 말입니다. 참고로 해 보시기바랍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란 말입니다. 공부할 때도 책을 좀 본 분들은 참선에 관한 책을 본 분들은 이것이 옳을 것인가 저것이 옳을 것인가 자꾸만 의단이 생기는 말입니다. 훤히 풀으셔야 씁니다. 그래야 막힘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돈오돈수라, 문득 깨닫고 문득 닦는다. 이렇게 말씀하신 그런 큰스님들 하고 말입니다. 또 한 가지는 문득 깨닫지만은 점차로 닦는다 하는 이런 말씀, 이렇게 주장하는 분들하고 논쟁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것인가 하면 마땅히 우리 어느 누구나가 점차로 오랫동안 걸려서 깨닫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기왕이면 빨리 깨닫고 싶은 맘은 누구나 있습니다. 다만 여건이 안 닿으니까 빨리 깨닫지 못 하는 것이지 문득 깨닫고 문득 닦는다이렇게 누구나가 하고 싶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응당 그래야 쓰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희망적인 상황에서는 응당 그래야 쓰겠지요.

 

그러나 사실 우리가 금생(今生)에 업장(業障)도 무겁고 과거업장(過去業障)도 무겁고 이런 중생(衆生)인지라 사실은 문득 다 공부를 해치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선 저 같은 사람 두고 보십시오. 이와 같이 승복 입고서 이 산으로 저 산으로 40년 동안 헤맸습니다. 그래도 역시 아직도 공부가 다 돼서 끝났다 하는 공부는 당하 멀었단 말입니다. 공부의 정상에 올라가려면 지금도 천리만리입니다. 40년 동안 집을 나와서 해도 이렇게 되거니 사실은 문득 되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물론 제가 미련하고 또는 게으름부려서 그렇다고는 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일반적인 차원에서는 문득 다 해치울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그러면 돈오점수가 옳을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꼭 돈오(頓悟)와 점수(漸修)만이 옳다고는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어폐는 아닙니다. 만약에 돈오와 점수가 옳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돈오와 돈수는 나쁘다고 봐야지요. 그런데 과연 큰스님들이 나쁜 말을 뭘하러 하겠습니까. 제가 생각할 때는 돈오돈수란 말도 옳고 돈오점수란 말도 옳습니다. 어째서 옳은고 하면은 이 구분을 잘 들으셔서 판단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돈오돈수란 말은 어째서 옳은고 하면은 말입니다. 비록 천지우주가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조금도 차이가 없고 흠축도 없고 아주 원만스러운 다 불성(佛性)뿐이다. 다 부처님뿐입니다. 천지우주가 원만스러운 부처님뿐이다. 이렇게 못 느끼면 그때는 돈오하고는 거리가 천리만리입니다. 마땅히 우리가 증명(證明)을 미처 못 했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은 거짓말이 아닌 것이고 무수한 도인(道人)들이 증명한 것이니까 우리는 믿어야 쓰는 것입니다. 종교(宗敎)는 신앙(信仰) 아닙니까. 안 본 것을 믿기 때문에 종교는 신앙이 아니면 그때는 종교가 성립이 못되는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고대로 믿어야 쓰는 것입니다.

 

비록 중생이 안 보인다 하더라도 천지우주를 바로 보는 정다운 정견(正見)에서는 천지우주가 평등무차별의 청정미묘한 다 불성뿐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자타시비(自他是非) 선악(善惡)을 다 떠나서 또는 부처와 중생과 이런 차별을 떠나서 모두가 다 평등무차별의 일체공덕(一切功德)을 갖춘 불성(佛性)뿐이다. 이렇게 분명히 느끼면 그때는 일차 돈오(頓悟).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비록 증명은 못했다 하더라도 간혜지(乾慧智), 인식적인 지혜라 하더라도 이렇게 분명히 느끼면은 그때는 돈오인 것입니다. 누구나 말입니다. 그러고 돈오가 아니면 참선이 못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 뒤에 따르는 돈수와 점수는 그 어떤 문제인가 말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가 닦아갈 길은 천리만리라 하더라도 부처님의 그런 정견에서 본다고 할 때에는 보살십지(菩薩十地)고 그야말로 참 사십육위(四十六位) 사만성불(四滿成佛)이고 또는 높고 낮잡고 말입니다. 부처와 나와 그런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높고 낮잡고 부처와 나와 차별이 없다는, 차별이 없다는 그 생각을 순간도 놓치지 않고 닦으면 그것이 바로 돈수(頓修)가 됩니다.

 

만약 부처와 나와 둘이 따로 있고 저 올라 갈라면 지금도 그냥 천리만리 아득하고 이와 같이 분별시비(分別是非)하고 고하(高下)를 두고, 고하를 생각하고 또는 방편(方便) 계제(階梯)를 위차(位次)를 우리가 설정하고 이러한 관념을 둔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이 점수(漸修)란 말입니다. 따라서 보조국사(普照國師)가 말씀하신 돈오점수란 말도 분명히 옳고 말입니다. 마땅히 우리가 그야말로 참 본래로 하나라 하더라도 역시 우리는 중생이니까 어느 한계는 느껴야 쓰겠지요. 따라서 일반 중생차원(衆生次元)에서 말할 때는 돈오점수(頓悟漸修)란 말이 옳을 것이고 말입니다. 또는 부처님의 참다운 정지견(正知見) 차원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시각적인 차이뿐인 것이지 어디가 글타 옳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