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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64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64

 

부처님 지혜(智慧) 가운데서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 지혜입니까. 모든 것이 비었다 하는 바로 그 모든 것이 제법(諸法)이 공()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항시 외우는 반야심경(般若心經) 도리가 내내야 모든 것이 비었다는 도리 아닙니까. 모든 것이 비었다 하는, 우리가 보는 것이 사실은 비었다 하는 그 진리를 우리가 딱 느껴야 씁니다. 그래야 적어도 부처님 법문(法門)에 우리가 귀의 했다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실은 비어있는 것인데 있다고 보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때는 우리가 번뇌가 나오고 인생고가 안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원래 없거니 내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내 몸뚱이가 사실은 텅 비었거니 어떻게 내 물건, 내 존재가 무엇이 있습니까. 내 존재가 아닌 것을 내 것이다 이러니까 결국은 거기에서 싸움이 안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에 그렁저렁할 때 상식적으로만 살아도 무방할 때는 모르거니와 현대 산업사회(産業社會)에서 복잡다단할 때는 그렇게 상식만 가지고 못 살아갑니다. 사물을 바로 봐야 쓰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 또는 공()이요. 이것보고 우리 불교(佛敎)에서는 사정견(四正見)이라, 네 가지 바른 견해(見解)라 합니다. 사정견이라,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우리 불자님들은 사정견을 분명히 외이시기 바랍니다. 네 가지 바른 견해란 말입니다.

 

인생은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거니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 같거니 인생은 고()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선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비롯해서 가지가지 고() 뿐입니다. ()이라 하는 것은 내내야 우리 고()에서 우러나오는 잠시간 하나의 거품 같은 것이지 사실은 완전한 안락(安樂)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 무상(無常)이요, 또는 무아(無我), ()이요. 이것이 네 가지 정견입니다. 적어도 정견을 딱 가져야 불교인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할 때는 앞서 제가 말씀드린바 화택고해(火宅苦海)라 인생고해(人生苦海)를 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본 다 할 때에 고()요 무상(無常)이요 또는 무아(無我)요 공()인 것이지 정다웁게 그때는 그야말로 참 궁극적(窮極的)인 철학적(哲學的)인 의미, 궁극적인 종교(宗敎)의 의미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공()도 역시 아직은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진리(眞理)가 못 됩니다.

 

다만 과학적인 객관적인 진리로 봐서 고()요 또는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요 공()인 것이지 정다웁게 실상지혜(實相智慧), 실상지혜로 봐서는 그것은 아직은 완전무결한 진리가 못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중도실상지혜(中道實相智慧). 이런 지혜로 봐서는 그때는 공이나 무상이나 또는 무아나 그런 것을 초월(超越)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궁극적인 도리는 뭣 인고 하면 제법(諸法)이 실상(實相)이라. 모든 법이 모두가 다 부처님의 청정미묘(淸淨微妙)한 공덕(功德)으로 충만(充滿)된 지혜란 말입니다. 부처님 지혜는 이러한 공덕으로 충만된 지혜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불성(佛性) 부처님 광명(光明), 모든 행복(幸福)과 지혜(智慧)라든가 자비(慈悲)라든가 일체공덕(一切功德)이 충만(充滿)한 경계(境界), 충만한 가르침 이것이 이른바 중도실상의 지혜 입니다. 따라서 중도실상의 지혜를 우리가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도실상의 지혜를 얻지 아니하면 인생의 화택고해를 못 면합니다. 허무(虛無)를 못 면합니다.

 

우선 아까 제가 말씀드린 네 가지 정견, 과학적으로 봐서 객관적인 네 가지 정견, ()요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 ()을 느꼈다 하더라도 이것만 가지고서는 참다운 행복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무상을 느끼고, 허무를 느끼고, 잘못은 좀 안 저지른다 하더라도 참다운 영생(永生)의 행복, 불멸(不滅)의 행복은 못 느낍니다. 따라서 그것은 불교의 근본적인 목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신 가장 큰 뜻이 무엇인가? 가장 대사(大事)가 무엇인가?

 

우리 중생은 조그마한 소사(小事), 작은 일만 가지고 평생 취생몽사(醉生夢死)하고 말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은 그런 자그마한 것에 머물지 않고 대사, 일대사, 가장 큰일을 말씀한 것입니다. 가장 큰 일은 뭣인고 하면은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일체중생의 본 실상(實相), 가상(假相)이나 허망상(虛妄相)을 떠나서 본 실상을 우리가 증명(證明)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해야 만이 우리가 제법실상, 모든 존재의 바른 모습을 볼 것인가. 모든 존재의 바른 모습을 못 보면 아까 말씀마따나 인생의 참다운 청량지, 극락세계의 행복은 얻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길로 가나 얻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현대와 같이, 난마(亂麻)와 같이 이렇게 혼돈스러운 때는 특히 부처님 가르침 같은 제법실상(諸法實相)같은 구경적(究竟的)인 지혜(智慧), 조금도 방편성이 안 깃들여있는 근본적인 본질지혜 이것이 아니고서는 구제(救濟)할 길이 없습니다.

 

공자님 가르침이나 노자님 가르침이나 또는 예수님 가르침이나 다 선()을 권장하고 악()을 없애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그 분들의 본뜻은 다 제법실상, 모든 것의 본 참모습을 다 말씀 하셨겠지만 그 당시는 사회가 하도 미혹해서, 사회가 무지하기 때문에 가장 고도한 법문은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자님 가르침이나 노자님 가르침이나 예수님 가르침이나 모두가 대체로는 악을 떠나서 선을 행한다는 윤리적(倫理的)인 면에서 그쳐버렸던 것입니다. 우주(宇宙)의 본 실상을 바로 말씀한 법문이 별로 없습니다.

 

그 분들은 성인(聖人)이기 때문에 알으셨다 하더라도,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우주의 실상을 바로 가르쳤단 말입니다. 우주의 실상을 바로 가르친 그런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종교(宗敎)가 이와 같이 다양하고 모든 문제가 이렇게 복잡하고 혼돈스러운 때는 각기 자기가 옳다고 내세우고 각종 이데올로기가 서로 이렇게 착종(錯綜)해서 혼란스러운 때는 가장 긍정적인 가르침, 모두를 하나로 뭉쳐버리는, 모두를 하나로 해결 시켜버리는 그런 원리를 모르면은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앞으로 몇십년 몇백년을 더 고생고생 하고 서로 싸우고 분열투쟁을 한다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구제할 길이 없습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은 부처님 가르침만이 다양한 모든 복잡한 문제, 복잡한 종교, 복잡한 이데올로기 이것을 다 하나로 딱 합해가지고서 그야말로 참 뜨거운 화롯불에 눈 몇 송이가 내려지면 금방 녹아버리듯이 사실은 부처님의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진리만 가지면 어떤 것이나 다 녹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어째서 그런 것인가, 부처님의 중도실상의 진리로 봐서는 이것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질성(異質性)인 것이 아무것도 없이 모두가 다 동일성(同一性)이라 동일률(同一律)이란 말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로 뭉쳐버리는 것입니다. 하나의 진리는 그냥 다만 하나의 진리가 아니라 모든 다양한 것을 다 포함하고 말입니다. 선이나 악이나 또는 시()나 비()나 어떤 것이나 다 포함한 하나의 진리(眞理)란 말입니다. 하나의 진리는 하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의 행동은 인연(因緣) 따라서 또 무수한 다양한 것을 창조(創造) 할 수가 있고 또는 분출(噴出)해 낼 수 있는 그런 하나란 말입니다.

 

일반 중생은 본질이 하나인 것을 모르니까 나요 너요 구분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것을 분명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의 것을 그냥 이론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와 딱 합일 되어버리는 그런 계기에서는 그때는 구분 할 래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부처님 가르침이 유포(流布)가 돼있는 지금 현대 사회에서 우리 같이 이와 같이 청정한 법의(法衣)를 입고 있는 분들도 역시 모순을 이야기합니다.

 

그건 어째 그런 것인가. 그 분들도 방금 제가 말씀마따나 모든 것을 다, 모든 걸 하나로 통일 시키는 하나의 진리를 압니다. 이른바 간혜지(乾慧智)로 해서는 바싹 마른 지혜로서는 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체험(體驗)이 안 되었기 때문에 하나의 진리와 자기와 온전히 융합(融合)이 안 돼서 체험이 안 되었기 때문에 그때는 실천을 못 하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은 더 낫습니다. 아는 것이 더 낫다 하더라도 아는 그걸로 해서는 우리가 실천(實踐)으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 하기 때문에 모순적인 행동은 그대로 지양(止揚)을 못 시키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이도 역시 말은 꼭 자기한테 유리한 말을 합니다. 행동 역시 알기는 알지만은 결국은 다 체험을 못 해 놓으면은 자기한테 유리한 행동 밖에는 못합니다. 그런데 있어서 참선(參禪)이나 염불(念佛)은 뭐 때문에 하는가 하면 그러한 우리가 아는 것을 실지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체험을 하기 위해서 염불도 하고 참선도 하고 주문(呪文)도 외이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다.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가 오직 하나의 진리로 통일 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생각하고 하다보면 결국은 처음에는 그럴 런지 모르겠구나. 석가모니께서 말씀했으니 그럴 런지 모르겠구나. 이와 같이 긴가민가하다가도 차근차근 하나 되는 쪽으로, 본래 구분해있는 다양한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 되는 쪽으로 자기 마음이 차근차근 모아지는 것입니다. 수행(修行)해서 도()가 깊어지고 수행력(修行力)이 높으면 높을수록 하나라는 진리 나와 남의 모서리를 떠나버려서 하나의 진리로 차근차근 모아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공부하면 할수록 유연선심(柔軟善心)이라. 부드러울 유(), 연할 연()자 말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그냥 강강하니 나와 남이 둘이 있고, 또 내 것, 네 것이 있거니 하마 자기 것 빼앗길 새라 경계하고 긴장하고 합니다마는 나와 남이 원래 둘이 아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차근차근 모서리가 무디어온단 말입니다. 모서리가 무디어오면 그때는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유연선심이라, 부드러울 유(), 마음도 더 부드러워지고 연할 연()자 마음이 상냥해지고 말입니다. 착할 선()자 마음 심()자 유연선심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부가 되면은 될수록 사람이 유연선심이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가다가 참말로 익어지면 그때는 우주의 참다운 진리 불성(佛性)과 하나가 딱 돼서 그때는 완전히 깨달아 버린단 말입니다. 재가불자님들은 이와 같이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신다 하더라도 오로지 잘 못 하십니다. 일상생활에서 허다말다 허다말다 하시니까 알기는 좀 알지만, 우리가 잘못 봤을 때는 모두가 있지만 조금 더 우리가 객관화 시키면 그때는 고()요 공()이요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 이와 같이 알기는 알지만 그것을 넘어서 참다운 것은...

 

그야말로 참 모두가 다 부처님뿐이다. 모두가 중도실상, 우주의 실상은 모두가 부처님뿐이다. 이와 같이 알지만은 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것은 뭣 인고 하면은 이른바 오로지 염불도 하고 참선도 해서 우리의 마음의 습기(習氣)나 번뇌의 뿌리가 못 녹아서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입이나 몸이나 생각이나 모두가 부처님 진리 천지우주(天地宇宙)는 부처님의 불성(佛性)뿐이다 하는 진리쪽으로 옮길라면은 자꾸만 우리가 되풀이해서 공부해야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