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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63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63

 

여러 불자님들 우리는 세간제일락(世間第一樂)이라. 인생(人生)의 행복(幸福) 가운데서 가장 제일 안락(安樂)스러운 길을 압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열반제일락(涅槃第一樂)이라. 열반락(涅槃樂)은 안락한 행복 가운데서 가장 최상(最上)의 행복(幸福)인 것입니다. 재산(財産)이나 또는 기타 이성(異性)이나 여러 가지가 있다 하더라도 역시 그런 것은 허망(虛妄)한 거품 같은 것에 쾌락(快樂)에 불과합니다. 허나 열반제일락(涅槃第一樂)이라. 우리가 마음 깨달아서 불성(佛性)을 증명(證明)한 그러한 것은 최상의 안락입니다.

 

우리 불자는 여기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우리 불자입니다. 우리가 가사 향()을 쌌던, 지금 여러 신도님들 덕으로 해서 오늘은 참 그 귀한 향들을 많이 피워서 향훈(香薰)이 풍깁니다만은 향을 쌌던 종이를 만져 보고 우리가 냄새 맡아 보면은 비록 향은 거기에 없다 하더라도 향을 쌌기에 향이 거기에 훈기(薰氣)가 훈습(薰習)이 돼서 향기(香氣)가 풍긴단 말입니다. 그러나 어쩌다가 우리가 어디서 이렇게 쓰레기통을 들고 와 가지고서 그 쓰레기통 안에 생선이나 고기를 쌓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비록 고기는 없다 하더라고 그 쓰레기통 안이 고기를 쌓았다는 하나의 훈습이 되어서 비린내가 풍긴단 말입니다.

 

그러한 것은 우리의 태도나 우리 마음의 심행(心行)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 법을 행한다고 하면은 마치 그것은 향을 싼 종이 모양으로 우리 몸은 분명히 향기가 풍기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마음 청정(淸淨)하고 또는 계행(戒行) 청정한 스님네나 또는 여러 우리 신도분 옆에 가서 보십시오. 이상하게 향기(香氣)가 풍기는 것입니다.

 

또는 그 반대로 계행을 무시하고 말입니다. 나쁜 것을 많이 먹고 그런 분들 옆에 가서 보십시오. 그냥 또 악취(惡臭)가 풍기는 감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도 그렇거늘 하물며 사람보다도 더 많이 볼 수가 있고 후각(嗅覺)도 예민하고 그런 존재가 본다 할 때는 즉 다시 말하면 귀신(鬼神)이나 말입니다. 선신(善神)이나 그런 존재가 본다 할 때는 그때는 훨썩 더 예민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한 번 먹기에도 아까 말씀마따나 그 마음 따라서 우리 몸이나 전체 분위기가 향()도 나고 또는 빛도 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가장 보다 더 광범위하게시리 우리한테서 향내가 풍기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이러한 것은 역시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 이름을 외이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주 그냥 보통은 지성사회(知性社會), 지성적인 세계(世界)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때는 불교(佛敎)를 우리가 신앙(信仰)을 한다 하더라도 신앙을 바로 믿어야 씁니다. 이론적(理論的)으로 딱 체계(體系)가 서야 만이 우리 신앙이 동요(動搖)가 안 됩니다.

 

비록 좀 어렵다 하더라도 역시 불교는 불교, 기독교는 기독교의 원리를 딱 드러내야 씁니다. 그렇게 한다고 그러면은 성자(聖者)의 길은 같은지라 그때는 별로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저는 정평 있는 도인(道人)들의 글을 아주 흥미 있게 봅니다. 본다 그러면은 서산대사(西山大師)나 사명당(四溟堂)이나 또는 보조국사(普照國師)나 원효대사(元曉大師)나 정평 있는 도인, 그런 도인들은 절대로 한 법문에 안 치우칩니다. 허나 미처 정평 있는 도인이 못된 어설픈 사람들, 어설픈 스님들, 그런 분들은 자꾸만 치우칩니다. 자꾸만 하나의 편벽되고 맙니다.

 

참선(參禪)이 옳다. 염불(念佛)이 옳다. 또는 주문(呪文)이 옳다. 화두(話頭)가 옳다. 뭣이 옳다 말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모두가 다 소중한 것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그때는 높고 낮은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가 본질(本質)만 깨닫고서 본질만 바로 느끼고서 자기가 닦는 수행(修行) 방법에 따라서 자기 최선을 다하면 쓰는 것입니다. 염불(念佛)한 사람들은 내 본질(本質)이나 천지우주(天地宇宙)의 본바탕인 부처님을 분명히 느끼고서 염불만 하면 쓰는 것이지요. 화두(話頭)한 사람들은 또 마찬가지예요. 역시, 자기 본 생명(生命), 자기 생명의 본질, 우주의 본질인 부처님을 느끼고서 화두만 들면 쓰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마따나 지금 고도(高度)의 지성적인 사회입니다. 조금만 빗나가면 그냥 시야비야 이렇게 혼란스럽습니다. 여러분들 지금 우리 사회 한 번 보십시오. 따라서 우리는 먼저 간단명료하게 내 생명(生命)의 본질(本質), 즉 말하자면 제일원인 말입니다. 원자(原子)나 분자(分子)나 또는 개나 소나 돼지나 모두의 근본 본질, 이것이 바로 불성(佛性)입니다. 요놈, 딱 깨닫고 불성 가운데는 일체공덕(一切功德)이 다 포함돼 있다. 이 놈 깨닫고 말입니다. 우리가 그걸 깨닫기 위해서 그걸 증명(證明)하기 위해서 닦으면 쓴단 말입니다.

 

먼저 원인만 깨달으면은 아까 말씀마따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나 또는 옴마니반메훔을 부르나 또 하나님을 부르나 그땐 똑같습니다. 하여튼, 화두(話頭) 가운데는 아시는 바와 같이 똥마른 막대기 화두도 있습니다. 헌데 하물며 어떤 것이 공부가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다만 근본 원리만 딱 잡아 우리가 들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불심은 심심미묘(甚深微妙)하고 동시에 천지우주(天地宇宙)는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여불유인(與佛有因)이요, 원인도 우리와 더불어서 똑같고 말입니다. 또한 동시에 인연(因緣)도 역시 우리와 더불어서 똑같습니다.

 

가사 석가모니가, 석가모니(釋迦牟尼)같은 도인 그런 성자가 나와 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마호멧, 우리가 이슬람교를 믿으나 또는 하느님 믿으나 말입니다. 석가모니나 똑같은 인연이 있습니다. 어떤 누구도 딴 존재 모두가 같이 인연이 똑같이 있습니다. 다시 바꿔서 말하면은 천지우주는 모두가 다 부처님과 같은 인연, 부처님과 같은 연이 있습니다. 더 바꿔서 말하면은 천지우주는 바로 부처님뿐입니다. 단지 중생(衆生)이 어두워서 부처인 것을 못 보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는 별로 싸울 거리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하는 방법 때문에 모다 종파(宗派)가 이렇게 차별이 있습니다만 싸울 필요가 그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나 그때는 별로 하등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근본만 느끼고서 아까 말씀마따나 자기가 하는 것에 자기 최선(最先)만 다하면 쓰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서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은 분은 우리 범부(凡夫)가 성불(成佛)까지 가는 길목을 이렇게 다 한계를 알아야 쓰겠지요. 이런 문제는 전문적(專門的)인 문제니까 다시 공부해야 쓰겠습니다만 우리 불자님들, 오늘 우리 사부대중(四部大衆)의 또는 천지우주(天地宇宙)의 모든 연()들이 다 합해서 장엄(莊嚴)스런 만다라(曼多羅)법회를 이룩했습니다.

 

지금 우리 불교(佛敎)는 앞서 제가 말씀마따나 혼돈(混沌) 가운데 혼돈을 거듭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를 구제하기 위한 것은 역시 뭐라 해도 우리 스님네가 또는 스님네와 더불어서 우리 불교를 가장 바르게 믿는 지성적인 우리 불자가 앞서야 씁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사, 이러한 절이 중심이 돼야 합니다. 비록 중심이 된다 하더라도 그렁저렁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청정(淸淨)한 절, 어느 누가 와서 보나 사회에서는 볼 수 없는 청정한 절, 그 다음에는 일반 사회인들이 감히 같이할 수 없는 청정한 계율(戒律), 지금 같이 윤리(倫理)가 문란스러운 때가 있습니까?

 

따라서 일반 대중들은 미처 못 지킨다 하더라도 우리 스님네와 또는 불교를 선두에서 믿는 이끌어 갈 수 있는 그런 분들은 또 역시 가장 철저하게 윤리를 지켜야 씁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계율(戒律) 안되겠습니까. 또는 그런 윤리나 수행하는 방법을 용맹정진(勇猛精進)해서 성불(成佛)을 위해서는 자기 신명(身命)을 바쳐야 씁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만이 우리 불법은 사는 것입니다. 언제나 부처와 마구니, 또는 기독교 말로 하면은 하느님과 사탄 말입니다. 이러한 싸움은 항시 있습니다.

 

그러면 마구니나 악마나 사탄은 무엇인가? 이것은 인간의 욕망(慾望)입니다. 이것은, 성내는 마음 또는 욕심내는 마음 이것이 악마입니다. 요것이 오염이 돼서 생명이 되어 가지고 악마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항시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성불(成佛)하고자 하는 부처가 되고자 하는 간절한 서원(誓願), 그 서원을 이루지 못 하면은 그때는 우리는 몇 만생, 몇 만생 뱅뱅 헤매고 맙니다.

 

우리는 지금 몇 백만생을 헤매왔습니다. 지옥(地獄)으로 축생(畜生)으로 아귀(餓鬼)로 또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우리가 금생(今生)에 다행히 부처님 법 만날 때에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가 바로 못 닦으면 또 다시 죽어지면 지옥 아귀 축생 헤매고 마는 것입니다. 윤회(輪廻)하는 것도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살기 좋은 때, 또는 우리한테 정다운 진리(眞理)에 도전해 오는 여러 가지 안일함을 우리가 최파(摧破)하기 위해서라도 아까 말씀마따나 이런 절, 가장 청정한 절, 가장 계율 잘 지키는 절, 부처님 법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거는 그런 절, 이런 절 하나라도 더욱 더 빛내고 많이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몸이 빛나고 우리 마음이, 우리 마음의 청기(淸氣)가 더욱더 훈향(薰香) 할라면은 부처님 이름, 부처님 공부에 대한 간절한 갈증(渴症), 이것을 순식간도 놓치지 말고 사무치게 공부하셔서 하루빨리 윤회(輪廻)를 벗어나서 꼭 금생(今生)에 성불(成佛)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법문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