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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765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765

 

참선은 우리 불교 가운데서 가장 고도한 수행법입니다. 불법의 가르침이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인간의 가장 대사(大事) 인간의 행복을 이어온 가장 근본적인 문제, 인간의 본질을 파헤치는 밝히는 가장 근본적인 진리인데 그러는 가운데도 역시 부처님의 진리를 밝히기 위해서 가장 지름길 가장 첩경(捷徑)이 참선입니다. 무서울 정도로 많은 종교 또는 여러 가지 각 주의나 사상 이런 가운데서 불법의 가르침이 가장 우수한 가르침 아닙니까. 여기 계시는 분들은 다 그렇게 믿기 때문에 불교를 믿으시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가장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일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복을 위한 최고 지상의 말씀을 했던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이 불교 아니겠습니까.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우리가 부처가 돼가는 하나의 진리를 깨닫는 지름길 이것이 참선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참선 이것은 인류의 60억 가까운 우리 인총 가운데서 최고 지상의 문화적(文化的)인 수행법(修行法)입니다. 이보다 더 고도한 문화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는 일 가운데서 제일 좋은 일, 제일 높은 일, 제일 기쁜 일, 이것이 이른바 참선(參禪)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번에 공부하는 동안에 참선을 해가지고서 참선의 목적인 성불(成佛)까지는 미처 못 가신다 하더라도 참선은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이 정도는 분명히 아셔야 씁니다. 참선이 뭣인가? 참선이 뭣인가 말입니다. 참선이 뭣 인가는 우리 불교인들이 언제나 문제로 하는 것이고 또는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불교인 뿐 만이 아니라 지금 현대 문화인들은 자기들의 긴장감 현대의 불안감 상대적인 인간(人間)의 문명(文明)은 발전되면은 될수록 사람 마음은 더욱더 갈등(葛藤)지고 불안(不安)스러운 것입니다.

 

이런 불안스러운 마음 어떻게 해소(解消)해야 쓸것인가? 불안스러운 마음을 해소를 않고서는 인간의 행복은 없습니다. 갈등이나 분열이나 또는 인간의 증오(憎惡), 지금 현대적으로 문제시 하고 있는 그런 문제는 다른 방법으로는 해소시킬 방법이 없습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은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다른 종교나 그런 가르침은 모두가 상대적(相對的)인 문제를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서 참선 이것은 꼭 누구나가 현대인들이 한사코 해야 쓸, 아니 하시면 인생고(人生苦)를 면할 수 없는 긴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꼭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보통은 참선 좀 하면 머리가 좋아지고 몸도 개운해지고 여러 가지로 상대적인 공덕(功德)을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분명히 있습니다. 참선을 잘 하면 그야말로 참 가슴도 시원하고 몸도 시원하고 머리도 시원합니다. 따라서 판단도 빠르고 이러한 유위적(有爲的)인 상대적인 그런 공덕이 분명히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만 가지고도 참선하는 공덕이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는 기독교의 피정(避靜)도 다 이런 것을 말씀했고, 요새 요가라든가 또는 초월적(超越的) 명상법(瞑想法)이나 마인드 컨트롤이나 이런 것도 역시 상대적인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은 불교의 참선은 이런 것과 어떠한 특징이 있는가? 이 특징을 꼭 아셔야 씁니다. 그래야 나중에 돌아가서라도 참선을 별로 부담 없이 하시는 것입니다. 참선 이것은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굉장히 어렵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사실은 가장 쉬운 것입니다.

 

참선이 가장 쉬운 것입니다. 어째서 가장 쉬운가 하면 자기 몸도 우주(宇宙)의 근본순리(根本順理), 근본이치(根本理致)에 맞추어 있단 말입니다. 마음도 역시 우주의 근본도리(根本道理)에 맞추어 있습니다. 참선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이나 자기 마음을 천지우주의 도리에 딱 맞추는 것입니다. 인간이 버릇이 잘못 들어서 우주의 도리에 맞출라면 어려운 것이지 버릇만 잘 들여놓으면 사실은 우주의 근본도리에 맞추는 데에 참선(參禪)이 제일 쉽단 말입니다.

 

우리 생각은 우선 참선을 생각하면 어떤 생각인가. 참선은 그냥 묵묵하니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사람들은 이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무엇인가 의심(疑心)해야 참선이다. 의심하는 화두(話頭)를 안 들면 참선이 아니다. 이렇게 참선을 좁게만 봐서는 참 곤란스럽습니다. 의심하는 것도 하나의 참선의 방법이지만 그것만이 참선은 아닙니다. 우선 참선하려면 참선의 마음 자세, 내내야 마음이 주인(主人)이기 때문에 참선의 마음 자세가 확립이 돼야 바른 참선이란 말입니다.

 

마음 자세가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천지우주(天地宇宙)의 도리(道理)에 딱 맞아야 쓴단 말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천지우주의 도리에 맞는 것인가. 천지우주의 도리는 무엇인가 말입니다. 천지우주의 도리는 앞서 제가 언급을 했습니다마는 일반 중생은 번뇌(煩惱)에 가리어서 미처 계합(契合)도 못 하고 못 느끼고 있다 하더라도 조금도 차별이 없이 평등(平等)하고 무차별(無差別)인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부처 불(), 성품 성(), 천지우주(天地宇宙)라는 것은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불성입니다. 평등무차별의 미묘청정(微妙淸淨)한 불성입니다.

 

이 말은 여러분들이 들으시면은 안 보이고 지금 감이 안 잡히니까 별로 재미가 없지만 이것은 몇천 번 되뇌여도 우리가 부족할 정도로 고맙고 감사한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안 보인다 하더라도 천지우주 도리라는 것은 평등무차별의 청정미묘한 불성이란 말입니다. 우주에 참말로 있는 것은, 나라는 것도 이것도 역시 허망 무상한 거품 같은 것이고 말입니다. 또는 모든 존재가 모두가 다 거품 같은 현상(現像)에 불과합니다. 나타날 현(), 형상 상(), 현상은 이것은 물 위에 뜬 거품과 똑같은 것입니다. 잠시간 존재하다가 마는 것이 그것이 오랫동안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순간도 있지 않은 것입니다. 순간도 있지 않은 것을 우리가 상식적으로 상만 보고서 내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사정견(四正見)을 되풀이해서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그야말로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요 공()입니다.

 

과학적(科學的)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 여러분들이 한번 각 소립자(素粒子)나 각 원소(元素)의 결합이나 또는 원자구조론(原子構造論)이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원자를 구성한 원자핵(原子核)이나 또는 원자핵의 주변에 도는 전자(電子)가 조금도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나 모두가 다 원자핵으로 해서 온 거 아닙니까. 헌데 원자핵을 구성 하는 양자(陽子)나 중성자(中性子)나 이것도 조금도 머물지 않고 또 그 핵 주변을 도는 전자 역시 어느 찰나 순간도 머물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동요부단(動搖不斷)하게 움직이고 이렇게 무상한 이런 것이 모여서 하나의 현상(現像)을 만든단 말입니다. 따라서 현상 역시 어느 순간도 같은 모습이 없습니다. 어느 순간도 같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조금 더 어려운 말로 하면은 어느 시간(時間) 어느 공간(空間)도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 인간이요. 우리가 사랑하는 자기 아내요. 사랑하는 자기 자식이고 남편이곤 합니다. 앞서도 말씀 드렸으나 과거에 상식적으로만 살 때는 모르거니와 현대와 같은 고도한 문명사회에 와서는 그런 상식만으로는 바로 못 사는 것입니다. 바로 못 사니까 가정도 찌욱 짜욱하고 사회도 혼란스럽고 하지 않습니까.

 

분명한 바른 지혜, 제일의(第一義)적인 바른 지혜, 다시 또 에누리 없는 지혜, 그런 참다운 실상지혜(實相智慧)가 아니고서는 바로 못 삽니다. 말이 또 옆길로 나가 버렸습니다마는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바른 정견(正見)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기 때문에 이와 같이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식(常識)의 범주(範疇)에서만 살고 있습니다. 상식의 범주에서는 우리의 행복은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화택고해(火宅苦海)는 면할래야 면할 수가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 지혜는 이른바 반야지혜(般若智慧)입니다. 참 지혜는 반야입니다. 반야라는 것은 공 지혜입니다. 참 지혜는 반야지혜입니다. 반야지혜는 모든 것이 다 공이고 실상은 천지우주가 청정미묘한 평등무차별의 불성, 불심,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제가 항시 말씀드리는 바와 같이 부처님이나 불성이나 불심은 똑같습니다. 마음으로 표현하면 그때는 불심(佛心)인 것이고 또 성품(性品)은 불성(佛性)인 것이고 생명(生命)이기 때문에 인격적(人格的)인 표현은 부처님이라 합니다.

 

참말로 있는 것은 불심, 불성, 부처님뿐입니다. 부처님뿐만이 그때는 실존(實存)합니다. 그 외에는 모두가 다 가상(假想)이고 현상(現像)이기 때문에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요 공()이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딱 느껴버려야, 이렇게 더운 때라도 마음이 개운합니다. 하찮은 이놈의 몸뚱이가 내 것이다. 하마 늙을새라 하마 아플새라 말입니다. 자꾸만 근심합니다. 하마 남한테 가서 우리가 미웁게 보일새라 말입니다.

 

참선은 아까 말씀마따나 가장 구경지(究竟地), 제일의제(第一義諦) 조금도 방편(方便)도 아니고 실상지혜(實相智慧)를 우리가 문제시해야 만이, 실상을 문제로 하고 참다운 자기 참 진아(眞我) 또는 대아(大我) 말입니다. 부처나 대아나 다 같은 뜻 아닙니까. 부처를 문제로 하고 제일 의제를 문제로 하고 말입니다. 참다운 나를 문제로 해야 만이 그때는 참선(參禪)이란 말을 붙이는 것입니다. 만약 참선을 한다 해서 모양은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별스럽게 긴장된 모습을 취하고 장엄스럽게 할망정 자기 마음이 제일의제 근본에서 어긋나버리면 그때는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마인드 컨트롤이나 일반 유루(有漏)적인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공덕(功德)을 바라는 그런 것은 하나의 모양은 좌선은 된다 하더라도 참선은 못 되는 것입니다. 일반 요가나 또는 마인드 컨트롤이나 기타 그런 정도의 정신통일법 하고 우리 참선하고는 엄격한 구분이 있습니다. 근본적인 근본 실상을 문제로 하고서 그 문제를 밝힐라고 할 때에, 생각할 때 비로소 참선이란 말이 들어간단 말입니다.

 

이 가운데도 혹시 기독교를 믿으시다가 들어오신 분들은 하나님 하면 좀 가까웁고 부처님 하면 좀 어쩐지 거부감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참선할 때 구태여 부처님이고 또는 이뭣꼬그와같이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대로 구하십시오. 하나님을 그대로 구하신다 하더라도 다만 하나님의 그 개념 내용, 의미 내용이 부처님의 법신(法身)부처님 같이 나나 너나 천지우주(天地宇宙)에 조금도 간격도 없이 충만해 있는 청정미묘(淸淨微妙)한 하나의 신성(神聖)이다. 이렇게 느끼시면서 해야 비로소 참선(參禪)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