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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768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768

 

달마스님도 관심론(觀心論)에서 초범증성(超凡證聖)이 목격비요(目擊非遙), 범부를 넘어서 범부를 초월해 성인 되는 것이 눈 깜짝할 동안에 있도다. 어찌 센머리 날 때 까지 우리가 수고해야 하리오. 이렇게 말씀했던 것입니다. 절대로 먼 길이 아닙니다. 참선공덕은 아까 말씀마따나 공덕총림이라, 지혜(智慧)도 원만(圓滿) 자비(慈悲)도 원만(圓滿) 공덕(功德)도 원만(圓滿)입니다. 정말로 원만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미처 성불까지는 못 간다 하더라도 거기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때는 우리가 공덕(功德)이 차근차근 증장해 오는 것입니다. 지금 과학자는 누군가? 원소(元素)를 발견하고 또는 원자핵(原子核)을 발견하고 소립자(素粒子)를 발견하고 이분들도 우리 참선(參禪)하는 사람 이상으로 현미경(顯微鏡)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오로지 잡념을 떠나서 그야말로 응집하고 말입니다. 관찰하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과학자가 소립자나 원자나 이런 것을 보는 것도 역시 부처님의 불성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하나의 공덕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도 불성과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성 가운데 있는 어느 정도 상대적인 공덕인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자의 현미경을 우리가 빌려 쓰는 그런 것은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제한을 못 벗어납니다. 참다운 순수에너지 과학적인 여러 가지 기기로 해서 못 보는 순수한 생명 이것은 마음 깨달아서 참선이나 염불이나 그런 마음 깨달아서 공부하는 청정한 마음에서 밖에는 못 보는 것입니다.

 

과학이 원자를 봤거니 앞으로는 과학이 불성도 볼 것이 아닌가 절대로 못 보는 것입니다. 번뇌가 없는 성자의 견해 아니면 참다운 불성 우주의 본바탕인 순수한 생명을 못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을 닦아서 불성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원자력 가지고 하는 컴퓨터나 레이더나 말입니다. 어떠한 기계문명(機械文明)보다도 훨썩 더 고성능한 신통지혜(神通智慧)를 다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과학시대의 모든 막힌 점, 과학시대의 모든 갈등 이런 것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지금 도인들은 정말로 공부해서 그와 같이 불성을 증명을 딱 해서 아까 용수보살같이 말입니다. 그와 같이 불성을 내보이는 그런 힘이 있어야 쓰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틀림없이 그런 분들이 많이 나오시리라고 저는 확신을 합니다.

 

헌데 그러면은 참선은 앞서 말씀마따나 부처님이 뭣인가? 나와 부처가 뭣인가 말입니다. 우주의 본질 이른바 정견(正見),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성불의 길인 팔정도(八正道)는 항시 우리한테 다만 한순간도 잊을 수가 없이 있어야 쓰는 것입니다. 팔정도의 정견(正見)이란 말입니다. 정견 이것이 부처님 참다운 실상, 부처님이 바로 보신 것입니다. 부처밖에 없다는 생각, 이 생각을 해야 그래야 이것이 정견인 것입니다.

 

그러면 정념(正念)은 뭣인가, 바른 생각은 뭣인가 말입니다. 이것도 역시 부처 밖에 없다는 견해를 보다 더 우리가 깊이깊이 심화(深化)를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념(正念)이라, 바로 보고 또는 바른 생각 하고 말입니다. 바른 기억, 바른 억념하고 이렇게 하므로 해서 우리가 정정(正定)이라, 바른 참다운 삼매(三昧)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삼매라는 것은 이것은 참선이나 삼매나 모두가 다 대동소이(大同小異)한 말인 것입니다. 조금은 약간 뉘앙스의 차이는 있습니다.

 

정견하고 정사유하고, 정사유는 바른 생각 아닙니까. 정념은 그 생각을 보다 더 그야말로 사무치게시리 우리가 명심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므로 해서 그때는 정정이라, 참다운 삼매가 온단 말입니다. 따라서 정견 바른 견해 또는 바른 생각 바른 억념 바른 기억 이렇게 안 되면은 참다운 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루종일 이뭣꼬 이뭣꼬 한다 해도 역시 그런 정견이 앞서지 않으며는 이것이 뭣인가? 본질이 뭣인가?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이것이 뭣인가? 이것의 본질은 부처란 말입니다.

 

어떤 것이나 본바탕은 부처입니다. 붉은 것이나 누런 것이나 강가나 김가나 박가나 모두가 다 결국은 본질은 부처란 말입니다. 따라서 정견은 부처라는 생각, 조금도 흠축이 없이 부처라는 생각을 떠나면은 그때는 정견은 못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뭣인가 하는 이뭣꼬 선도 역시 이뭣꼬가 그냥 아무렇게나 우리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그 뭣인고가 아니라, 오직 불성이 뭣인가 하는 말입니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뭣인가 하는 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들어야 이뭣꼬 선()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화두(話頭)나 다 모두가 그와 같이 화두 의심할 때는 본래면목이 뭣인가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을 대변해서 무()자요 뭣이고 있는 것이지 딴 것이 아닙니다. 판때기 이빨이요 또는 뭣이고 다 있지마는 결국은 내내야 본래면목자리란 말입니다. 본래면목이라는 정견 떠나버리면 그때는 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건 느껴야 쓰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사 의심(疑心)도 않고 딴 것을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정견, 정사유, 정념에 입각할 때는 그때는 참선이란 말입니다. 참선 공부가 따로 있고 기도는 우리가 별도로 모셔야만 복이 있다. 꼭 천배 만배 해야 우리가 복이 있다. 우리 불법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절을 많이 하고 그럴 때는 우리 마음이 하나로 딱 모아 지겠지요. 모아지기 때문에 우리가 공()을 더 받고 공부도 빠른 것이지마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설사 절을 한 번도 안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동요가 없이 불심 자리에서 안 떠나고서 순수하니 불심을 지키면 벌써 그것이 우리가 그만치 공부도 잘됨과 동시에 그때는 복도 많이 받는단 말입니다.

 

불성 가운데는 제가 아까 말씀마따나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 불성은 무한공덕(無限功德)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불성에 접근되면 되어 갈수록 무한공덕이 우리한테 오는 것입니다. 무한공덕이 말입니다. 사실은 바른 사람이 있으면 바른 사람 때문에 그 주변은 정화(淨化)된단 말입니다. 방안이 찌쁘듯 한다 하더라도 공자 같은 그런 도인들이 딱 계시면은 그때는 그야말로 참 푸근하니 온화한 분위기가 생긴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여기가 계시면은 이쪽에 있는 악귀가 저리 다 몰려 가 버립니다. 못 배기고 말입니다. 그 대신 호법선신(護法善神)들은 또 부처님 계신대로 다 모여든단 말입니다.

 

부처님뿐만 아니라 착한 사람들 바른 생각하고, 같은 염불한다 하더라도 바른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냥 신장(神將)들이나 우주의 가장 으뜸 성령(聖靈), 신장 가운데 가장 본래 성령은 내내야 부처님 아닙니까. 부처님까지 미처 못간 그런 신장이나 호법선신들이 많이 있습니다. 헌데 그런 선신들은 몸이 우리 같은 오염된 몸이 아니기 때문에 많이 본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도 보고 우리 행동도 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신장이나 뭣이나 모두가 다 본바탕은 부처입니다. 곤충이나 말입니다. 자동차나 또는 뭣이나 비행기나 본바탕은 다 부처입니다. 모두가 말입니다.

 

본바탕은 부처기 때문에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그 자리를 딱 생각하면 말이요. 딱 생각하면 그 순간 신장들은 다 아는 것입니다. 안단 말입니다. 비행기를 구성한 순수한 생명도 안단 말입니다. 또는 자동차를 구성한 생명도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항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사 우리가 차를 타서 그 차를 이렇게 물리적인 힘으로 해서 전복이 될 때도 말입니다. 정말로 신심(信心)이 있는 분들 정말로 신앙(信仰)에 사무친 분이 딱 탔다고 생각할 때는 그 사람 때문에 신장들의 가호로 해서 그 차가 전복(顚覆)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수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운수가 나쁘면 그건 왜 나쁩니까. 운수가 나쁜 것은 우리 집안에 모다 삿된 기운들이 많이 모여 온단 말입니다. 내 마음에도 삿된 기운이 모여오고 내 남편한테도 삿된 기운이 모여오고 우리 집안에 삿된 기운이 많이 있단 말입니다. 집이 있으면 또 집을 지키는 신이 있는 것입니다. 집신도 집에 사는 사람들 불량하면 불량한 만치 집신도 그에 나쁜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 사는 사람들이 바른 생각하면은 바른 생각하는 순간 그때는 신장이 안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때는 집을 지키는 신도 역시 그만치 감화를 받는 것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다 부처다. 일체만유(一切萬有)는 다 부처님뿐이다. 이와 같이 생각 할 때는 신들도 가장 좋아 하는 것입니다. 신들도 내내야 자기들 신들의 본질도 부처니까 말입니다. 또한 동시에 부처님의 호념(護念)이라. 보호할 호(), 생각할 념(), 부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천지 우주가 부처거니 나는 나고 부처는 부처다. 이런 때는 부처님께서 부처님 기운이 우리한테 온전히 못 온단 말입니다.

 

허나 천지우주가 부처님뿐이다. 부처님과 나와 둘이 아니다. 이 생각은 천지우주의 참다운 생명인 나와의 통로를 놓는단 말입니다. 나와의 통로가 생깁니다. 부처와 나와의 사이에 중력이 자용해서 말입니다. 같이 이끌림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나 너나 모두가 부처뿐인 천지우주가 부처님 아님이 없다. 이 생각을 딱 한다고 생각할 때 이 생각만으로 해서 벌써 가피를 입습니다.

 

집안에 운수를 바라고 복을 바라시는 분들 절도 많이 하시고 염불도 많이 하십시오. 그러나 그렇게 하신다 하더라도 마음 자세는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참선하는 마음 자세 말입니다. 바른 정견, 바른 정견을 가지고 하셔야 공부도 속 빠르고 또 가장 많은 가피를 입고 복을 많이 받는 것입니다. 꼭 바른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념(正念)으로 해서 정정(正定), 정정은 정다운 삼매(三昧)입니다. 정다운 삼매가 되어야 우리 습기(習氣)를 녹여서 참다운 해탈(解脫)을 증()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 생명의 본 목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정다운 삼매가 못 되어 해탈을 못 하면은 우리 생명은 윤회(輪廻)한단 말입니다. 고생 바다에 윤회합니다. 우리 생명의 목적은 해탈에 있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번뇌(煩惱), 탐욕심(貪慾心) 또는 무명심(無明心) 분노심(忿怒心) 말입니다. 삼독심(三毒心)을 떠나지 못하면은 인간의 해탈은 없습니다. 참다운 해방은 없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무슨 제도나 물질이나 그런 걸로 해서는 하나의 기본은 될망정 인간의 참다운 해탈은 못 되는 것입니다. 참다운 복리는 못 됩니다.

 

우리는 지금 복잡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가치(價値)가 전도(顚倒)가 되어서 인간의 죄가 뭣인가 죄의 원인을 모릅니다. 인생고(人生苦)의 원인을 모릅니다. 인생고()의 원인은 분명히 사제법문(四諦法門)에 있듯이 말입니다. 인간의 번뇌에가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또는 무명심과 인간의 분노심과 이것이 인생고의 원인이란 말입니다.

 

나한테 너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번뇌 이것이 인생고의 원인이란 말입니다. 사회고나 인생고나 모두가 다 고의 원인은 우리 번뇌에 있습니다. 마땅히 번뇌의 반대가 바른 정견 아닙니까. 정견으로 해서 공부하시는 분들은 34일 동안에 부처님 마음 불심과 내 마음과 둘이 아닙니다. 분명히 둘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이 마음 바로, 이 마음 떠나서 부처가 아니라 이 마음 바로 부처입니다. 이 마음 바로 부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