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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70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70

 

우주(宇宙)의 도리(道理)에 따른단 말입니다. 우주의 도리에, 우주의 도리라는 것은 뭣인가? 이것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이 우리가 보고 안 보고 상관없이 천지(天地)는 오직 영원적인 부처님의 불성(佛性), 자비(慈悲)나 지혜(智慧)나 행복(幸福)이나 능력(能力)이나 다 갖추고 있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생명(生命)으로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런 생명은 온전히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나무도 풀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들은 그 순간 책상머리에서도 금색광명(金色光明)이 빛나고 말입니다. 또는 간시궐(幹屎厥)이라. 똥 마른, 똥 묻은 막대기에서도 금색광명이 빛난단 말입니다. 부처님은 그와 같이 완벽한 생명인지라 귀머거리도 아니고 또는 소경도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동을 바르게 하면은 생명자체인 부처님은 우리를 훤히 보신단 말입니다. 우리 행동을 잘 못하는 것도 훤히 보십니다. 우리가 부처님 하고 부르면은 오, 주여! 하고 부르거나 또는 알라를 부르거나 말입니다. 또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을 부르거나 이 뭣고 화두(話頭)를 하나 우주의 생명, 우주의생명인 동시에 내 생명은 다 아신단 말입니다.

 

또한 그 부처님은 무량의 신비로운, 신비부사의(神秘不思議)하고 절대적으로 가능한 그런 자리기 때문에 모든 능력을 다 갖춘 자리기 때문에 우리가 진정으로 부처님을 꼭 내가 봐야 쓰겠다. 내가 안 보이면 어떻게 될 것인가? 부처님이시여 저한테 신심(信心)을 좀 돋우기 위해서 꼭 모양 좀 보여주십시오. 이렇게 빈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날 그때는 불현듯이 부처님 광명(光明)이라든가 훤히 빛이 분명히 오는 것입니다. 분명히, 부처님이 소경이 아니고 바보가 아니거니 우리 정성에 안 통할 수가 있겠습니까. 안 통하면 그때는 바보겠지요. 꼭 우리가 정말로 구한 만치 거기에 응답이 있습니다.

 

바이블도 보십시오. 바이블도 그야말로 참 두드리면 문이 열리고 말입니다. 그마만치 구하면은 꼭 응답이 꼭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마태복음서 제가 좋아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서 62절인가 63절인가 합니다마는 그대의 손과 그대의 발이 죄를 범하면은 바로 찍어 내려라. 찍어 내려란 말입니다. 도끼나 칼이나 톱이나 그런 걸로 해서 바로 찍어 내리란 말입니다. 그대의 눈이 죄를 범하면은 그대의 눈을 떼내 버려란 말입니다. 그대가 병신인 채로 천국(天國)에 가는 것보다도 그대가 죄를 범한 채로 불구덩이에 던지는 것이 훨썩 더 불행하니라.

 

종교(宗敎)나 또는 철학(哲學)이나 무슨 신앙(信仰)이나 모두가 다 무서운 결단(決斷)이 필요합니다. 우리 습관(習慣)이 너무나 나쁜 습관이 많이 붙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같이 우리 중생(衆生)은 없는 것보고 분명히 있다 한단 말입니다. 없는 것보고, 미운 것도 없는 것이니까 하고 말입니다. 너무 좋다고 그래서 좋아 하는 것도 그것도 없는 것인데 우리가 그런단 말입니다. 자기 권속(眷屬)만 좋은 것도 아닌데 우리가 좋다 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본래로 없는 것입니다.

 

본래로 없는 것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 눈이 잘 못보고 우리 손이 지금 잘못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그 잘못 본 자기 눈을 그냥 떼내버린단 말입니다. 그런 결단, 그런 정도의 결단이 있어야 씁니다. 아무튼 자기라는 관념(觀念)이 가시지 않고서는 도()를 얻지를 못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귀머거리가 아니고 소경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하면 구한 만치 얻어집니다. 행복되기는 참 쉽습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의 도리에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사실대로 보고 사실대로 우리가 느끼면 쓰는 것입니다. 사실은 무엇인가? 사실은 부처님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참선(參禪)도 염불(念佛)도 그렇게 해야지 화두(話頭)를 애쓰고 의심(疑心)한다고 하면서 옆에 사람이 부시럭거려도 기분 나빠 가지고서 시비(是非)하고 그러면 그거 참선 태도 아니란 말입니다.

 

뭐 다소곳이 자기라는 교만심(驕慢心)이라든가 분별시비(分別是非)를 버려야쓴단 말입니다. 모순(矛盾)을 버려버려야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또는 애쓰고 공부하면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모서리가 떨어진단 말입니다. 아까 영운스님도 30년 동안이나 분별시비(分別是非)도 많이 하고 미웁기도 하고 사랑도하고 모다 했겠지요. 그러나 공덕(功德)이 쌓이고 쌓여서 말입니다. 공덕이 쌓이고 쌓여서 그것이 성숙(成熟)되니까 어느 날 30번이나 남어 보고 느끼고 모다 한 그런 복숭아꽃 봄으로 해서 퍼뜩 깨달아버렸단 말입니다.

 

우리가 공덕만 세워두면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만 배불리 먹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자기만 배불리 먹고 자기 이웃 사람이 굶는 것을 보는 것은 이것도 역시 잘 못 보는 것이고 잘 못 행동하는 것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의 도리(道理)라는 것은 이것은 조금도 사()가 없습니다. (), 자기만 옷을 잘 입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르게 산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 스웨덴보리나 또는 헬렌 켈러가 다 본 바와 같이 우리도 사()만 떠나면은 천사가 보이는 것입니다. 호법선신(護法善神)도 보이고 귀신(鬼神)도 우리한테 와서 꾸벅꾸벅 절하고 우릴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천지신명(天地神明)의 가장 기본적인 생명(生命)의 부처님께서는 오죽 하겠습니까. 중생(衆生)이 부처를 생각하면 부처는 바로 우리를 굽어보고 우리를 돕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우선 꼭 여실지견(如實知見), 바른 견해(見解), 바른 철학(哲學) 지금 바른 철학을 꼭 요청될 때입니다. 바른 철학이 없으면은 어느 분야에서나 바르게 못 합니다. 공장도 바르게 못 하고 기업도 바르게 못 하고 말입니다. 다 바르게 못 합니다.

 

바른 스승, 바른 부모, 바른 친구, 바른 아내, 바른 어버이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꼭 여실지견, 진리(眞理)에 맞게시리 도리(道理)에 맞게시리 바른 지혜(智慧)를 가지셔야 씁니다. 이렇게 하셔서 금생(今生)에 올 여름에 꼭 본래(本來) 갖추고 있는 그 자리 꾸어온 것도 아닌 것이고 값 주고 사온 것도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본래 그 자리를 성취(成就)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