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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5. 원통불법의 요체

원통불법의 요체(76)

원통불법의 요체(76)

 

2. 구해탈俱解脫

 

그러면 우리가 삼계三界에서 어떻게 해탈을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지상 명제가 되는 셈 아니겠습니까? 해탈解脫에는 지혜해탈慧解脫과 선정해탈定解脫이 있는데 두 가지 해탈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합하여 구해탈俱解說이라 합니다. 따라서 참다운 성자는 지혜에 걸림이 있는 즉, 견혹見惑을 타파하고 또는 우리가 선정에 들어서 사혹思惑 또는 수혹修惑 , 일체 사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번뇌를 여의는 정해탈定解脫을 성취하여야만 합니다.

 

사혹 즉, 수혹은 참선이든 기도이든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길 외에는 어떻게 여의려야 여읠 길이 없습니다. 지혜로서는 일초직입一超直入 여래지如來地, 바로 번연히 깨달아서[幡然開悟] 본래 내가 부처구나하는 확신이 오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정작 우리가 만사에 자재自在하는 해탈의 경계에 달하려고 할 때는 꼭 선정에 들어가야 합니다. 선정에 들어가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래야 사혹 즉, 수혹을 여의고 우리의 심리와 더불어 생리가 맑아오는 것입니다. 이른바 환골탈태가 된다는 말입니다.

 

혜해탈慧解脫은 일체제법이 본래 청정하고 평등 일미하여 일체 공덕을 구족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해탈이 못되면 이른바 보임수행保任修行을 닦지 못해서 습기가 녹지 않으면 참다운 선정해탈禪定解脫이 못됩니다. 그래서 정해탈이 되려면 꼭 멸진정滅盡定을 성취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공부하는 출가사문들은 한사코 혜해탈의 근거 위에서 선정해탈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부처님의 말씀을 옮길 정도지 자기 스스로 우러나와서 부처님의 무량 법문과 자재신통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절 해탈解脫의 과정過程

 

그다음에는 4가행, 4선정, 멸진정 등 앞에서 다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해탈에 있어서 꼭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물론 누차 말씀했듯이 근기에 따라 점차로 가는 사람도 있고 단번에 뛰어넘기도 합니다.

 

사가행四加行은 사선근四善根으로서 우리가 미처 견도見道를 못할 때는 아직 범부지이니까 수행을 애쓰고 한다고 해서 가행加行이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름 결제結制하고 겨울 결제하고 또는 백일 동안 기도하는 것은 모두 다 가행정진加行精進입니다. 그냥 그렁저렁 하는 것이 아니라 간단없이 해야 가행이라고 합니다. 그런 한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했다 말았다 하는 것은 가행이 못됩니다. 참선 좀 했다고 나와서는 함부로 하고 그만 두어 버리면 바로 후퇴가 됩니다. 우리는 지속적인 가행정진을 해야 난법煖法에서 정법頂法으로 인법忍法으로 공부가 깊어집니다.

 

마땅히 공부 기운이 흩어지지 않도록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안상安詳이라, 부처님이나 수도인의 거동을 안상으로 표현합니다. 부처님께서 탁발하고 오셔서 안상히 앉고 또는 선정에 드셨다가 안상히 일어서고 한다는 말씀이 경에 나옵니다. 안상이란 편안하고 조용하고 조금도 무리가 없고 자연스럽고 자상하게 하는 자세가 안상입니다. 이렇게 정진해야 명득정明得定을 빨리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애쓰고 공부해도 난법상에 미처 못 들어가는 분도 있는데 그것은 수행법이 근기에 맞지 않아 무리가 되어서 못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고 또는 과거 업장이 무거운 소치이기도 함으로 법당에 가서 몇 천배 절을 하는 것도 참 좋습니다.

 

의상(義湘 625702) 대사는 중국에 들어가서 화엄종 삼대三代 현수(賢首 643712) 대사와 같이 동참 수학하고 또 화엄경을 통달하여 법성게法性偈를 지은 분이니까 굉장히 위대한분 아닙니까? 그렇게 했어도 결국은 선정 해탈은 미처 못 했던가 보지요. 그래서 낙산사洛山寺 홍련암紅蓮庵에서 관음 기도를 모시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라는 아의 근본 번뇌가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자기라는 아가 끊어지는데, 의상 대사도 자기를 점검해 보니 아상我相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죄 덩어리인 몸뚱이 차라리 몸을 바꾸어야겠구나!’ 하고 홍련암 바위에서 바닷물에 몸을 던졌습니다. 몸뚱이를 버리는 그 찰나 활연히 깨닫고 관세음보살이 몸을 안아 안전하였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님 몸이요, 부처님 마음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사무치면 반드시 부사의한 도움이 있습니다. 기도든 공부든 모든 정당한 소원은 꼭 성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삼매에 들기 위해서는 4선근四善根의 행으로서 우선 닦아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비약적으로 가기가 어려운 문제 아닙니까?

그러나 난법상煖法相 닦아서 명득정明得定이라, 가슴도 머리도 온몸이 시원해 온다 하더라도, 나와서 번잡스러운 일들로 흔들어 버리면 결국은 어디에 간 곳이 없이 공부가 퇴타退墮하게 됩니다.

 

정법상頂法相 곧 명증정明增定이라, 이는 밝음이 더 증장增長한 경계를 말합니다. 처음에는 앞이 컴컴하다가 난법상에서 부터는 온몸이 맑아 와서 정법상이 되면 뿌여니 달 같은 것이 비쳐오는 것입니다. 이 경계를 욕계정천欲界頂天이라 하는데 벌써, 정법은 욕계의 꼭대기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다시 파계무참破戒無慚한 짓을 한다거나 그렁저렁 방만하게 지내면 다시 후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닦아 나가야 비로소 인법忍法 경계가 옵니다.

 

인법忍法은 무엇인가 하면, 내 몸뚱이나 물질이나 또는 명예나 지위나 모두 다 허망하여 실답게 여기지 않는 마음이 깊이 박혔다는 말입니다. 인법상忍法相이 되면 함부로 행동을 못합니다. 물론 완전무결하게 계율을 다 지킬 수는 없겠지만 벌써 맑고 선량한 기운이 몸과 마음에 깊이 배어져 눈이 샛별같이 빛나오므로 망상이나 혼침이 어디에 붙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도 그만 두면 후퇴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 쉬고 지속적으로 나아간다면 이른바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 범부 세간에서는 여기가 제일 높은 곳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번뇌 때문에 시달리지 않고 분별 시비가 안 나오니까 분별 시비를 몰아내기 위해서 작위作爲로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번뇌가 사이에 끼일 수가 없어서 견도見道 곧 견성見性하는 그 자리와 간격이 없으므로 무간정無間定입니다. 이 자리에 머물게 되면 필연적으로 견도에 나아가게 됩니다.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 맑은 거울이나 고요한 물 같으니 모두를 보면 다 그립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간정에서 '내 마음을 반조反照해 보니 무간정이 되었구나, 공부가 이 정도 같으면 거의 다 하지 않았겠느냐' 하고 흔들어 버리면 결국은 또 견도에는 못 들어갑니다.

 

따라서 이런 차서를 잘 모르면 정진 중에 재미가 좋고 또는 무슨 빛이나 별난 경계가 나타나게 되면 공부가 다 되었다고 자만심을 느낍니다. 대체로 빨리 깨달아야겠다고 하는 성급한 분들은 이런 위험성을 범하기가 쉽습니다. 무간정에서는 가장 근원적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완전히는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상사각相似覺이라 하여 거의 비슷하게 깨달은 단계입니다.

 

무간정에서 초선정에 들어갈 때는 벌써 욕계를 초월하니까 오염된 몸뚱이가 청정한 몸뚱이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른바 소조사대所造四大가 능조사대能造四大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 범부 몸뚱이는 오염된 지수화풍인 소조所造사대입니다. 그러나 선정을 발득發得해서 초선정에 들어갈 때는 오염된 사대가 청정한 능조能造사대로 바뀌기 때문에, 바뀌는 가운데 2, 48이라 8촉이 나옵니다.

 

팔촉八觸은 무엇인가 하면, 그때에 경험되는 동 등의 여덟 가지 경계입니다. 처음에 몸이 떨리는 동이라, 몸이 가려운 양이라, 몸이 가볍게 느껴지는 경이라, 몸이 묵직하게 느껴지는 중이라, 몸이 써늘하게 느껴지는 냉이라, 몸이 뜨겁게 느껴지는 난이라, 몸이 상어 가죽같이 깔깔하게 느껴지는 삽이라, 몸이 부드럽게 느껴지는 활이라 이런 증상들이 그때그때 교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증상뿐만 아니라 선정의 공덕으로 열 가지가 생깁니다. 십공덕十功德이란, 선심善心유연柔軟해탈解脫경계상응境界相應입니다. 처음에 공이라 몸이 가벼워서 자기 몸뚱이에 조금도 부담을 느끼지 않고 항시 공중에 뜬 기분이고, 그다음에는 명이라 마음이 밝아져서 경전에 대한 문제나 모든 의단疑團이 훤히 풀리게 되고, 다음 정이라 마음이 고요하여 선정에 들어가며, 또는 지라 성과 상과 체와 용에 대하여 걸림 없는 지혜가 발동하고, 선심善心이라 마음이 그지없이 선량해지고, 유연柔軟이라 심신心身이 유순하여 모든 인연에 수순隨順하며, 라 의식意識에 깨달음의 기쁨을 느끼고, 오식에 무분별의 즐거움을 느끼며, 해탈解脫이라 만사에 걸림이 없는 해탈을 느끼며, 경계상응境界相應이라 모든 경계에 막힘이 없이 수긍하게 되는 것 등이 이른바 초선정에 들어갈 때 증험하는 십공덕十功德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 몸이 뜨겁든 차든 간에 텅텅 비어서 자기 몸에 대해서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고 마음이 훤히 밝아 별로 모르는 것이 없이 이것이나 저것이나 보면 척척 풀리고, 이런 마음이 항시 기본적으로 따라야 초선에 들어가는 증상이 되겠지요. 그리고 2선부터는 이미 오염된 사대四大가 청정한 사대로 바뀌어 버려서 뜨겁고 덥고 그런 증상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욕계를 초월해서 초선정에 들어간다면 몸도 마음도 가볍고 부담이 없고 그지없는 행복감에 충만하게 되니 희락지喜樂地, 진정한 법락法樂을 느끼는 경계입니다. 이러한 법락을 느끼게 되면 세속적인 오욕락[五慾樂: 재물, 이성, 음식, 명예, 수면]에 대한 마음은 아예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다음 2선정에 들어가면 마음이 한결 청정해집니다. 왜 그런가하면 희락지에서는 아직 욕계 번뇌의 뿌리는 여의지 못했으나 2선정에서는 욕계 번뇌의 뿌리를 뽑아 버렸기에 마음이 훨씬 청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 초선정에서는 기쁨이 있다가 즐거움이 있다가 또는 더했다 덜했다가 하지만 그다음은 그냥 잠잠하니 희락이 안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법성法性에는 기쁨이나 즐거움의 희락도 없는 것이므로 따라서 선정이 더 깊어지면 마음은 더 총명해지고 더 맑아지면서 희락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3선정 경계인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 기쁨을 떠나고 묘락을 경험하는 경계입니다. 그리고 4선정에서는 희락을 다 떠나서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 모든 분별심을 여의고 청정한 마음만 지속되는 경계입니다.

 

그다음에 멸진정滅盡定4선정을 다 통과해서 일체 번뇌의 습기習氣 곧 번뇌의 종자를 다 완전히 없애는 삼매三昧입니다. 바라문이나 또는 힌두교나 일반 외도도 4선정까지는 닦아 증득할 수 있으나, 외도는 원래 해탈을 구하는 근기가 못되고 천상에 올라가서 신묘한 안락을 맛보려는 것이기 때문에 멸진정에까지는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해탈을 구하는 분들은 안락安樂이나 유위有爲 공덕은 문제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근기가 약하고 수승하지 못한 사람들은 초선에 올라가서 희락만 느껴도 공부가 다 되었구나 하고 또는 2선에 올라가서 희락에 잠기게 되면 거기에 머물러 버리는 것입니다. 불경에 보면 3선정에 들어갈 때 기쁨의 정도가 제일 좋다는 것입니다. 초선의 희락이나 2선의 희락이나 아직은 거친 희락이며 약간의 변동이 있으나 3선과 같이 동요를 떠난 묘락妙樂은 아주 신묘하기 때문에 불경에서도 기쁨과 즐거움의 절정을 표현할 때는 3선정의 묘락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멸진정은 기쁨이라든가 또는 즐거움 모두를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됩니다. 며칠이고 몇 년이고 이 몸뚱이 죽어도 좋다 하고 정진을 해야 멸진정에 들어갑니다. 사선정四禪定은 정도正道와 외도外道가 다 같이 닦으나 멸진정은 정도正道에 한해 있습니다. 또 정도正道라 하더라도 비약적으로 멸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늦게 되었든 빨리 되었든, 중간 차서를 뛰어넘든 뛰어넘지 못하든 간에 4선정을 닦아야 갑니다. 업장이 가벼우면 더 빨리 갈 것이고 업장이 무거우면 더디 가는 차이 뿐입니다. 마땅히 신명身命을 걸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해탈 공부는 자기 목숨을 바치는 공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사일번大死一番에 대활현전大活現前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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