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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5. 원통불법의 요체

원통불법의 요체(78)

원통불법의 요체(78)

 

4. 장사경잠長沙景岑의 백척간두게百尺竿頭偈

 

다음은 우리들이 흔히 외우고 있는 게송입니다.

 

百尺竿頭坐底人 백척간두좌저인 백척간두 꼭대기에 주저앉은 사람아

雖然得入未爲眞 수연득입미위진 비록 도에 드나 참다움은 못되나니

百尺竿頭進一步 백척간두진일보 백척간두 그곳에서 한 걸음 더 내디뎌야

十方世界是全身 시방세계시전신 시방세계 그대로 부처님의 온 몸일세

* [百尺竿頭須進步라 쓰기도 한다]

-長沙景岑장사경잠-

 

장사경잠(長沙景岑 ?868) 스님은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 선사의 제자입니다. 마조도일(馬祖道一 707786) 선사 밑에 삼대 준족이라 하여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 남전보원, 삼대 선사가 가장 이름이 있고 훌륭한 분이라고 정평이 있습니다. 태안사泰安寺를 개산한 혜철(惠哲 785861) 국사는 그 가운데서 서당지장 선사한테 법을 받은 분입니다. 장흥 보림사寶林寺를 개산한 도의道義선사도 역시 서당지장 선사의 법을 받았고 남원 실상사實相寺를 개산한 홍척洪陟 국사 역시 서당지장 선사 법을 계승한 분입니다. 벽암록碧巖錄이나 무문관無門關을 보면 그런 분들의 공안이 굉장히 많습니다. 장사경잠에 따른 화두도 벽암록에 있습니다.

 

공부가 백척간두百尺竿頭까지 갔으니 이미 공부가 상당히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거기까지 가서 머물러 버린 사람, 백척간두에 올라가서 거기에 걸려 버린 사람은 비록 깨달았다 하더라도 아직 참다운 것은 못 된다는 말입니다. 비록 득입得入 되었다 하더라도 아직 참다운 것은 되지 못하니, 그러니까 공부를 해 가지고 어느 정도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로서 다 끝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백척간두에서 오히려 다시 더 한 발을 내딛으라는 말입니다. 세간법을 떠나서 출세간이 되고 공부가 익어졌으면 다시 무량 중생을 제도하려 내려와야 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면 보살이라 할 수가 없겠지요. 따라서 백척간두에서 한 발을 더 내딛어야 시방세계가 바로 참다운 자기요, 부처의 장엄법신이라는 게송입니다.

 

 

5. 장경혜릉長慶慧稜의 권렴견천게捲簾見天偈

 

장경혜릉長慶慧稜 스님은 설봉 대사의 제자입니다. 설봉의존(雪峰義存 821908) 대사도 벽암록이나 무문관에 이 분의 공안 화두가 있을 정도로 위대한 분입니다. 또 설봉 스님의 제자 현사사비(玄沙師備 835908) 스님도 위대한 선지식입니다.

 

현사 스님한테 어느 스님이 여하시불如何是佛이잇고부처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진시방세계盡十方世界 시일과명주是一顆明珠부처고 중생이고 우주만유가 바로 한 덩어리의 밝은 마니보주와 같은 보배구슬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깨달은 분상에서 본다면 온 세계 만법이 평등무차별한 영롱한 광명의 구슬과 같다는 말입니다. 어디에도 막힘이 없는 구슬과 같은 것이 온천지 사바세계요, 삼천대천세계라는 말입니다.

 

현사 스님의 출가 인연이 있습니다. 현사 스님은 어부漁夫인데 30대에 자기 아버지와 같이 어망을 지고 고기잡이를 나갔습니다. 어망의 한쪽 귀는 아버지가 잡고 한쪽은 자기가 잡고 있었는데 그때에 비가 많이 와서 어망이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는 평생 동안 어업만 해온 셈이라 살림 도구인 어망이 그대로 떠내려가면 큰일이겠지요. 그래서 안간힘을 쓰고 잡고 있는데 물의 수세로 보아서 도저히 어떻게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대로 있다가는 자기 아버지도 그물도 현사 스님도 한꺼번에 떠내려 갈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현사 스님은 그때 생각에 내 나이 삼십밖에는 안되었는데 이대로 죽을 수가 없다. 무엇인가 금생에 나온 보람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는 어부이고 별로 공부도 안한 사람이었지만 선근이 있었는지라, 과거 전생에 사문이 되어 공부한 사람이었던지 도저히 그대로 죽을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물을 놓자니 자기 아버지가 떠내려 갈 것이고 놓지 않으면 자기도 한꺼번에 죽을 것이고 고민하다가 비장한 각오를 하고서 잡고 있던 그물 벼리를 놓아 버렸습니다. 자기 아버지는 그물과 함께 급류에 휩싸여서 수장水葬이 되어 버렸겠지요.

 

어차피 자기가 놓으나 안 놓으나 아버지는 돌아가시지마는 그래도 자기만 살고 아버지가 가셨다는 생각에 출가한 뒤에도 두고두고 죄책감을 떨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수행도 진지하고 한 점의 빈틈도 없이 정진하여 위대한 성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수좌들을 제접할 때도 굉장히 준엄하여 웬만한 것도 용납을 안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사 스님은 설봉 스님 제자로 장경혜릉 스님이 사형이 되므로 사형한테 가서도 공부하고 또는 은사한테도 가서 공부하고 왔다 갔다하면서 12년 동안에 무명베로 만든 좌복이 일곱 개나 떨어질 정도로 일심정념으로 정진했습니다. 그랬어도 공부가 안 트이는 것입니다. 그 동안에 몹시 고생도 하고 여러 모로 자기를 매질도 하고 심각한 고행을 했겠지요. 그러나 12년 동안이나 공부를 했으니까 무던히 공부가 익었겠지요. 그러다가 12년이 다 되는 여름이었던가, 선방에서 발을 획 젖히고서 밖을 내다보는데 문득 산천 경계가 훤히 열려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발을 들고 산천 경계를 볼 때에 활연대오를 해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때에 읊은 게송입니다.

 

也大差矣也大差矣야대차의야대차의 크게 차이 있구나 크게 차이 있구나

捲起簾來見天下권기렴래견천하 드린 발을 걷고서 천하 경계 바라보니,

有人問我解何宗유인문아해하종 어느 누가 나에게 깨달은바 묻는다면

拈起拂子劈口打염기불자벽구타 불자 들고 입을 쳐 말을 막아 버리리.

 

- 長慶慧稜장경혜릉 -

 

크게 차이가 있구나 크게 차이가 있구나, 범부로 있을 때에 느끼던 자기 경계와 활연대오豁然大悟한 경계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다는 환희충만한 심경心境입니다. ‘견성오도 해도 약간 더 알고 마음이 시원하겠지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사소한 차이가 아닙니다. 12년 동안에 좌복을 일곱 개나 떨어뜨리면서 공부를 하다가 발을 걷고서 바깥 하늘을 바라볼 때 활연대오하여 깨달아 버렸는데 깨닫기 전의 범부경계와 깨달은 성자의 경계는 참으로 하늘과 땅의 차이임을 감탄하는 말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한테 무슨 종지宗旨를 깨달았는가? 묻는다고 하면 염기불자拈起拂子하여, 총채와 같은 불자拂子를 들어서 벽구타劈口打, 그 입을 때려서 쪼개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공부한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사무친 마음이 있었겠지요. 몇 번 죽으려고도 해보았을 것이고 겨우 가까스로 깨달은 것이며 깨달은 종지宗旨란 말도 상도 여읜 것인데 그냥 말 몇 마디로 쉽게 알려고 묻는다면 괘씸하기도 하겠지요.

 

보통, 사람들이 찾아오면 그냥 말로만 알려고 애씁니다. 많은 말을 않더라도 화두면 화두, 염불이면 염불, 주문이면 주문으로 오로지 공부하고 계행 지키고 닦아나가면 원래 부처인지라 부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말로만 알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기에 과거 조사 스님이나 도인들은 너무 세밀한 너절한 말을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다 스스로 공부를 시키기 위해 그러는 것입니다. 결국은 참구자득參究自得이라, 참구해서 스스로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깨달은 경계를 묻는다면 불자拂子를 들어서 그 입아귀를 부수어 버린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