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49

 

 

생사 해탈이란 그 말은 사실은 적어도 술어적으로는 불교 외에는 없습니다. 종교의 본뜻은 영생해탈(永生解脫)의 뜻이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다 들어있다 하더라도 아주 직설적으로 바로 생사를 떠난다는 것은 우리가 죽고 사는 한계상황을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런 가르침은 불교 외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생사를 떠난다는 커다란 문제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커다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활짝 열어야 되는 것인데 마음을 열지 못 하면은 생사(生死)를 떠난다는 커다란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종교나 마음을 열려고 아주 무진 애를 많이 씁니다. 애를 많이 쓰나 애를 너무 많이 쓰기 때문에 자칫하면 집착(執着)을 해버립니다. 우리가 집착한다는 문제가 아주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역사적(歷史的)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에 우리 불교는 그와 같이 너무 잔인한 그런 것은 없습니다만은 기독교도 사실은 예수님의 뜻도 얼마나 숭고(崇高)합니까. 숭고하지만 중세기(中世紀)에 있어서 기독교의 카톨릭 사회에서 이른바 종교재판(宗敎裁判), 종교 재판문제는 굉장히 그야말로 참 잔인하게 이루어졌습니다.

 

16세기부터서 17세기까지 그 90년 동안에 이단자로 몰려서 불에 태워서 죽인 사람이 10만명 됩니다. 10만명을 한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여기가 지금 옥과면(玉果面)입니다. 옥과면 인구가 만명 조금 넘습니다. 10만명은 옥과면 전체 인구 10배란 말입니다. 10배가 90년 동안에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90년 동안에 10만 명을 불에 태워서 죽였단 말입니다. 이것은 카톨릭 법왕의 로마 법왕청의 공인 밑에서 도미니쿠스가 맡아가지고 했단 말입니다. 얼마나 참 무시무시한 일입니까. 그 절대평등(絶對平等)을 주장하는 하느님의 사랑의 이름 밑에서 그랬단 말입니다.

 

비단 기독교뿐만 아니라 일본(日本) 불교사(佛敎史)를 또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불교도 종파(宗派)가 이렇게 나누어지면 말입니다. 자기 종파의, 종파 이기주의(利己主義) 그런 의미에서 다른 종파 가령 법화경(法華經)을 신봉(信奉)하는 법화종(法華宗)이 있지 않습니까. 또는 염불을 주로 하는 염불종(念佛宗)이 있고, 일본은 종파끼리의 대립이 아주 첨예 합니다. 그런데 그런 염불종과 법화종 또는 천태종 사이에서 같은 스님네끼리 서로 자기 이익을 주장하기 위해서 서로 싸워서 코를 베고 귀를 자르고 했단 말입니다. 얼마나 참 끔찍스런 일입니까. 이른바 독단 도그마 말입니다. 집착이란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저는 여기저기 법회에 나다니면서도 많이 보고 있습니다 만은 가령 우리가 염불한다. 염불을 하는 것이 사실은 그야말로 얼마나 쉽습니까. 생각 염()자 부처 불()자 아,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 이름을 부르고 싶으면 부르고 부르기 싫으면 속으로 또 외고 말입니다. 그러면 되는 것을 꼭 자기 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리도 꼭 자기식으로 내야하고, 그리고 같은 염불종도 특히 일본종교에서 있는 것입니다만은 생각을 말고 꼭 소리만 내서 하라는 종파가 있어요. 일본 진종(眞宗)같은 참 진()자 마루 종()자 그런 종파는 꼭 소리만내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염불하는 법에서는 여러분들 대체로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습니다 만은 가령 관상염불(觀像念佛)이라 관상염불은 무엇인고 하면은 부처님의 원만스러운 모습을 우리가 관찰한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란 것이 얼마나 산란스러움이 많습니까. 그 산란스러움이 많고 분별시비가 많아놔서 그냥 염불하면 마음이 잘 통일이 안돼요. 그러니까 부처님의 원만덕상(圓滿德像)을 이렇게 상상하면서 보면서 하는 염불이 관상염불 아닙니까. 가령 우리가 여기 부처님 관음상(觀音像)을 모시고 있는 셈인데 부처님을 우리가 참배하면서 우러러보면서 염불하면은 훨썩 더 마음도 차분하고 공부가 잘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불상(佛像)을 순수한 우리 마음을 지속을 시키기 위해서 불상을 모시는 것인데 그 불상을 상상 말고서 꼭 소리만 내야 된다.

 

또는 염불 가운데는 이런 염불도 있습니다. 이른바 실상염불(實相念佛)이라. 실상염불은 무엇 인고 하면은 이것은 부처님의 진리(眞理)자체를 우리가 상상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의 진리가 우리 눈에 지금 보이지 않지 않습니까. 따라서 실상염불은 우리에게 보이는 대상이 아닙니다. 보이는 대상이 아니지만은 이 우주란 것은 바로 부처님 생명이란 말입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아주 훌륭한 말씀이 있습니다.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아주 고도한 진리를 담은 그런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인고하면은 모든 부처님은 여래(如來)라는 것은 부처님 아닙니까. 시방 여래는 모두 부처님이란 뜻입니다. 모든 부처님은 법계신이라, 이 법계라는 것은 바로 우주를 말합니다. 모든 부처님은 우주를 몸으로 한단 말입니다. 우주를 말입니다.

 

이런 말씀은 방편(方便)을 떠나버린 진리 그대로의 말씀입니다. 우주(宇宙) 자체가 이것이 부처님의 몸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이른바 불교의 대승불법(大乘佛法)이 됩니다. 이리 나누고 저리 나누고 둘로 나누고 셋으로 나누고 그런 것은 참다운 대승불법이 못되는 것입니다. 나까지도 포함해서 이 우주 자체가 오직 하나의 생명(生命)이란 말입니다. 우주가..........시방여래는 법계신이라, 모든 부처님은 우주를 몸으로 한단 말입니다. 우주를 말입니다.

 

우주를 몸으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산도 부처님 물도 부처님 곤충도 부처님 다 부처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가 어디가 있는가? 그것은 중생들은 자꾸만 이렇게 나누어서 본단 말입니다. 나누어서.... 어째서 그런 것인가. 중생(衆生)은 겉에 뜬 상()만 본단 말입니다. 나라는 상(我相), 너 라는 상(人相) 밉다는 상 사랑한다는 상 그런 상만 집착한 것이 중생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자(聖者)란 것은 모든 존재(存在)의 본바탕을 봅니다. 본바탕을 본다고 생각할 때 똑같단 말입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항시 우리가 인용해서 비유할 수 있는 수파(水波)의 비유라 물수()자 물결파()자 물과 파도의 비유란 말입니다. 바람 따라서 파도가 천파만파 일어난다 하더라도 내내야 똑같은 물이란 말입니다. 그렇듯이 부처님은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우주바다의 물에 비길 수가 있는 것이고 또 중생의 분별 따라서 일어나는 우리 번뇌망상(煩惱妄想)이나 모든 상은 이것은 하나의 그야말로 파도에 비긴단 말입니다. 파도와 물과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내야 파도가 천파만파 일어난다 하더라도 결국은 다 물이란 말입니다.

 

그렇듯이 우리 중생이 인과(因果)의 법 따라서 산이 되고 하늘의 별 되고 인간이 되고 또는 도둑놈이 되고 또는 범이 되고 그렇다 하더라도 똑같이, 모두가 다 똑같이 우주의 법에서 나왔단 말입니다. 우주의 법인 부처님 몸에서 모두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보나 금강경(金剛經)을 보나 모두가 다 그런 도리로 해서 성품(性品)과 현상(現象)의 관계를 말씀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현상만 보는 것이고 성자란 것은 본바탕을 본단 말입니다. 따라서 아까 말씀드린 실상염불(實相念佛)이라. 실상염불이란 것은 가장 고도한 염불(念佛)이 실상염불입니다. 우주의 본바탕 우주의 실상(實相)을 우리가 관찰하면서 하는 염불이란 말입니다.

 

비록 똑같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우리가 외인다 하더라도 우리 맘이 덮어놓고 부처님은 저 밖에 계시다가 우리가 염불을 많이 하면 우리한테 와서 도와 주시겠지, 이런 정도의 이것은 이른바 타력염불(他力念佛)이라. 보통 그렇게 많이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애쓰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하면은 그때는 그야말로 참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와서 가호(加護)를 하시고 복()을 주고 그렇게 하신다고 생각되는 것이 보통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은 가장 소박한, 하나의 방편염불(方便念佛)입니다. 염불은 염불이지만은 참다운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꼭 하시고 싶은 그런 염불법은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꼭 하시고 싶은 염불법은 무엇인고 하면은 아까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실상염불이라, 우주(宇宙) 생긴 대로, 우주진리(宇宙眞理) 생긴 대로 그런 염불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아까도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소승법(小乘法)과 대승법(大乘法), 소승법은 부처님께서 편의에 따라서 중생의 그릇 따라서 그때그때 중생 근기에 맞게 시리 하신 법문이 이른바 소승법이고 말입니다. 그러나 진리란 것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소승이고 대승이고 가르는 것도 그도 하나의 방편인 것이지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뿐이란 말입니다.

 

법화경(法華經)을 이른바 모든 경론(經論) 가운데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 법화경은 모든 경론 가운데서 통일(統一)된 경이라고 합니다. 화엄경(華嚴經)도 마찬가지고 법화경, 화엄경 뜻은 무엇인고 하면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모두가 둘이 있고 셋이 있고 이런 것이 아니라 한결 같이 하나의 진리뿐이다. 일불승(一佛乘)이다. 한일(), 부처불()자 탈승(), 일불승이라, 모두가 다 부처님 가르침뿐이다. 이런 것이 법화경이나 화엄경이나 대승불교의 본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염불(念佛)을 하든 또는 화두(話 頭)를 들고서 의단(疑端)을 품고 공부를 하든 우리 근본적(根本的)인 목표는 어디가 있는고 하면은 우리가 부처님이 돼가는,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이 돼 가는데 있습니다. 왜 부처님이 꼭 돼야 할 것인가? 부처님이 되지 못 하면은 참다운 행복(幸福)을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어느 누구나가 다 한도 끝도 없는 행복을 구한단 말입니다. 아는 것도 기왕이면 세상만사 다 알아버리고 싶고 말입니다. 어떤 면으로 보나 우리 인간은 최선(最先)의 것을 다 구합니다. 제일 부자가 되고 싶고 얼굴도 제일 잘나고 싶고 그런단 말입니다.

 

한편 생각할 때는 아이참 별스럽게 욕심도 너무 많구나 생각할 란가 모르겠지만은 우리 인간존재는 원래 그런 존재여요. 어째서 그런고 하면은 우리 인간의 본바탕이 부처기 때문에 우리 본바탕이 그렁저렁한 존재 같음사 한도 끝도 없는 것을 구하겠습니까만은 우리 인간이 본래가 부처란 말입니다. 본래가 부처...

 

부처란 것은 어느 면으로 보나 완벽한 것이 부처 아니겠습니까. 자비(慈悲)로 보나 지혜(智慧)로 보나 능력(能力)으로 보나 어떠한 면으로 보나 완벽한 것이 부처인데 따라서 우리 본 성격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우리가 구하는 것도 항시 한도 끝도 없이 다 구한단 말입니다. 다 구하나 상대적인,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것은 어떻게 우리가 다 구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상대적인 것은 그런 한계가 있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욕망(慾望)은 한도 끝도 없는 것인데 물질(物質)도 한계가 있고 또는 이런 자원(資源)도 한계가 있고 말입니다. 그렇게 상대적인 이 물질 한계가 있는 물질을 구한다고 할 때는 그때는 필연적으로 그야말로 치열한 경쟁이 안날수가 없단 말입니다. 즉 인간사는 모습이 주로 지금 그런 모습 아닙니까.

 

그러나 종교(宗敎)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존재(存在)를 허망(虛妄)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실로 있지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제법(諸法)이 공()이라, 제법이란 것은 모든 존재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상(現狀)이 공이라. 또는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유위법이란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상대유한적인 모든 존재가 유위법이란 말입니다. 그 유위법은 여몽환포영이라, 마치 꿈이요 또는 허깨비요 그림자요 거품 같다는 것입니다.

 

꿈이 있습니까. 꿈 꿀 때는 실제같이 실제로 있는 것같이 보이지요. 꿈을 깨버리면 무엇이 남습니까. 그림자요 분명히 이렇게 빛이 볕이 비추고 또는 모양이 있으면은 모양에 따르는 그림자가 보이지 않습니까. 분명히, 분명히 보이지만은 또 분명히 없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중생이 지금 나요 너요 밉다 또는 좋다 이런 것은 사실은 그림자 같고 꿈같은 것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이 꿈같고 그림자 같은 것을 이해를 못 하면은 그때는 불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허망(虛妄)하다 하더라도 우리가 꼭 이해를 해야 한단 말입니다. 억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가 꿈이고 허깨비 같은 것을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어째서 없는 것인가? 우리가 깨달아서 성자가 되어놓으면 분명히 다 허망하게 여실하게 보일 것인데 우리 중생은 꼭 있게만 보인단 말입니다. 미운사람은 꼭 밉게만 보이고 사랑한 사람은 그냥 또 사랑스럽게만 보인단 말입니다. 그것은 중생의 착각(錯覺)입니다. 중생이 잘못 보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서 잠시간 허망 상을 지금 보이고 있단 말입니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라, 제행이 무상이란 것은 모든 존재는 어느 순간도 고유한 존재가 없습니다.

 

이쁜 사람은 지금도 이쁘고 또 그다음도 이쁘고 미운 사람도 지금도 밉게 보이고 그다음도 내일도 미울 것이고 이런 생각이 보통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은 중생의 착각입니다. 미운 사람도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생겨난 존재이기 때문에 일초동안도 같지가 않단 말입니다. 우리 세포도 역시 일 초의 몇 천분의 일 동안도 그대로 있지가 않습니다. 순간순간 신진대사(新陳代謝)해서 변화해간단 말입니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그때는 조금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어느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도가 제일 강한 다이아몬드 같은 금강석도 역시 정밀(精密)한 현미경(顯微鏡)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순간순간 마멸돼 간단 말입니다. 존재(存在)하는 것은 다 그런 것입니다. 같은 것이 언제 어느 시간(時間)대에도 없고 어느 공간(空間)대에도 없단 말입니다. 다만 중생이 잘못보기 때문에 중생은 뚜렷하게 못 봅니다. 천안통(天眼通)을 통해야 우리 육안(肉眼)의 참다운 실성(實性)을 회복해서 천안통을 통해야 비로소 존재의 본바탕을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때는 못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제아무리 정밀한 현미경을 놓고 본다 하더라도 물질의 한계 내에서 보는 것이지 물질을 떠나버린 저쪽세계는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정신을 현미경으로 볼 수 있습니까. 우리 불자님들 그 모든 존재가 다 꿈이요 허깨비요 또는 거품이요 그림자 같다. 이 소식을 아무리 섭섭해도 꼭 이것을 깊이 생각해 두셔야 됩니다.

 

우리가 결혼하고 가정을 꾸며서 산다는 것도 얼마나 참 좋은 일입니까. 얼마나 이것이 좋기는 좋은데, 이것도 사실은 허망(虛妄)한 거란 말입니다. 이것도 다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신부가 있고 수녀가 있고 우리같은 비구가 있고 비구니 스님들도 계시지 않습니까. 성자(聖者)의 길이란 것은 꼭 결혼해서 자식 낳고 그것이 별로 소중한 것이 아니어요, 그것이... 오직 문제는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 우리가 꿈을 깨어서 꿈같은 모든 것을 우리가 깨서 참다운 진리(眞理)로 가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서 결혼 안하신 분들은 가급적이면은 안하시면 참 좋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아까 제 말씀마따나 그야말로 참 실상염불(實相念佛)이라. 실상염불, 염불하실 라면은 기왕이면 제일 고도한 염불을 하십시오.

 

실상염불은 우리 마음으로 그냥 소리만 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본바탕을 그대로 생각하시면서 하신단 말입니다. 그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천지우주(天地宇宙)는 모두가 다 부처님뿐이다. 이 사람 보나 저사람 보나 이것 보나 또는 우리가 길을 가다가 하나의 독사를 보나 뭘 보든지 간에 그렇게 모든 존재가 본래로 부처님이니까, 부처가 아닌 것을 억지로 보라는 것이 아니라 본래가 부처인 것을 우리 중생이 지금 잘못 봐서 부처라고 보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저는 지리산서 조금 살았습니다만은 저 지리산 천왕봉 밑에 거가 부도암 이란 암자가 있었어요. 거기서 제가 몇 철을 좀 지냈는데 거기 옆에 집에 가서 처사가 살아요. 처사님 한 분이, 근데 그 처사님이 불교도 독실하게 믿지만은 굉장히 강직한 분입니다. 강직한 분이어서 산에 다니면서 가다가도 독사를 만나면 독사보고 서라고 말합니다. 아주 호랑이같이 독사보고 서라고 말하면은 독사가 꼿꼿이 서요. 독사가 말입니다.

 

사람의 정신이라는 것은 사무치면은 그렇게 위대한 힘을 내는 것입니다. 그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중국에 들어와서 법을 펼칠 때에 달마대사 법을 반대한 사람들이 굉장히 달마대사를 중상모략도 하고 달마대사를 독으로 죽일라고 말입니다. 독살 할라고 독을 여섯 번이나 드렸어요. 그러나 다섯 번째까지는 독이 닿지를 않아요. 독이 말입니다.

 

정말로 사무치게 모든 것이 다 부처다. 천지 우주가 다 오직 부처님 아님이 없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독도 내내야 부처 아닙니까. 독도... 우리 중생이 독은 독이고 약은 약이고 우리 중생은 이렇게 분별하니까 중생이 독 먹으면 그때는 죽습니다. 그러나 깨달은 분상에서 독도 저것도 내내야 저도 본래는 불성(佛性)이 아닌가. 이렇게 바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독이 사람을 중독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의 본래 성품은 그렇게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염불 하실라면 바르게 이른바 실상염불이라. 실상염불 해야 그래야 참다운 공()이 있단 말입니다. 실상염불의 공은 어디다가 비길 수가 없습니다. 글쎄 그것은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좋은 사람보나 나쁜 사람보나 장사할 때 고객이오나 인상이 나쁜 사람이 오나 다 부처님같이 생각하면은 그때는 또 서로 상통(相通)이 됩니다.

 

내외간 같이 살 때도 남편을 부처님같이 대하고 또 남편은 아내를 부처님같이 대해보십시오. 그보다 더 훌륭한 부부관계가 없습니다. 친구지간도 마찬가집니다. 여기 선생님들도 많이 계시지만은 교단에 서서 학생들 70, 80명 앞에다 두고서 저들 모두가 다 부처님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실 때는 얼마나 귀엽게 보이고 그야말로 참 좋은 말씀을 많이 하실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어떠한 면으로 보나 실상염불로, 실상식으로 하는 것이 참다운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바라시는 염불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