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48

 

 

오늘날 우리가 금타(金陀)대화상을 숭앙하는 것도 금타 대화상은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실참실구(實參實究) 해서 그냥 말씀으로 철학적인 체계를 세워가지고 우리한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난행고행(難行苦行)으로 수십년동안 참선(參禪)을 통하고 또는 교학(敎學)을 공부해서 깨달으신 분입니다. 여러분들한테 배부해 드리는 금타 대화상의 비명(碑銘)에도 있습니다마는 39세 때 활연대오(豁然大悟)를 하신 분입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가 아니라 자기 생명(生命)을 온전히 바치고서 참선(參禪)을 하셨단 말입니다.

 

성자의 가르침이 가장 원칙적이고 정통이기 때문에 제일 쉽습니다. 어디서 그냥 꾸어온 것도 아닌 것이고 남한테 빌려온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내 마음 그대로 나한테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 그대로 불성자리가 얼마나 행복스러운 자린가. 이것은 다른 도인(道人)들도 말씀을 많이 했지마는 특히 금타 대화상께서 금강심론(金剛心論)의 오지여래(五智如來), 오지여래란 항목이 있습니다. 그 항목 보면 꼭 진리(眞理)의 사진 같단 말입니다.

 

금타 대화상은 비단 그러한 종교(宗敎) 철학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라 현대가 과학만능시대(科學萬能時代)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우주(宇宙)의 본질(本質)과 형량(形量)이라는 저술을 하셨습니다. 그 저술(著述) 내용도 그냥 자연과학적(自然科學的)으로 기계론적(機械論的)으로 이렇게 말씀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하고 물질(物質)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물질의 근원(根源)은 무엇인가. 지금 현대의 제아무리 정밀(精密)한 양자역학(量子力學)도 물질이 뭣인가 모릅니다. 다만 하나의 장 에너지라, 하나의 에너지라고는 말하지만 그 에너지의 실체가 뭣인가? 이걸 모른단 말입니다.

 

금타 대화상께서 우주의 본질과 형량이라는 거기에서 에너지의 실체(實體)는 바로 불심(佛心)이란 말입니다. 구체화 시키면 바로 금진(金塵)이라, 훤히 빛나는 하나의 빛이란 말입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여러분들 대체로 알으시겠지요. 하나의 방사선(放射線), 하나의 방사광을 가지고 있는 광선(光線)이란 말입니다. 양자(量子)나 전자(電子)나 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미세(微細)한 소립자(素粒子) 단계에서는 하나의 빛이란 말입니다. 빛의 근원적인 더 정밀한 빛이 뭣인가?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금진이라, 금진이란 말은 불교(佛敎)의 원래 구사론(俱舍論)에 있는 것인데 금타 대화상께서 재차 그것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우주는 결국은 금진이라 하는 광명(光明)으로 해서 우주(宇宙)가 충만해 있습니다. 어떠한 에너지고 모두가 다 금진광명(金塵光明)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금진광명은 뭣인가? 이것은 바로 불심(佛心)이라, 불성(佛性)이라, 부처님의 성품이 바로 금진광명(金塵光明)의 순수한 생명자체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대화상 탑비(塔碑)제막식에 이렇게 참여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우리가 꼭 기억 할 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정통성 문제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또는 하나의 종단적으로나 꼭 정통성이 살아 있어야 그래야 빛을 냅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제일 쉽고 가장 확실합니다.

 

우리 불교인들이 참선(參禪)공부를 하고 염불(念佛)을 한다 하더라도 그냥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그렇게만 해도 큰 공덕(功德)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왕이면은 보다 더 큰 공덕을 입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또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할려면 그 불성자리 내 생명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만유의 본바탕인 불성이 우주에는 항시 영원히 빛나있다. 무량공덕(無量功德)을 갖춘 불성(佛性)이 우주에는 끊임없이 시간 공간을 초월해서 영원히 빛나있다. 이렇게 생각 하면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는 것과 이렇게 생각 않고서 그냥 이름만 부르는 것과는 굉장히 차이가 있습니다.

 

화두를 참구한다 하더라도 마찬 가집니다. 그냥 덮어놓고 이뭣꼬라던가 ()’라던가 그냥 화두(話頭)만 의심 한다고 해서 공부가 쭉쭉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를 드는 원인도 역시 근원자리를 근본 체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화두를 드는 것이지 그냥 덮어 놓고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어떻게 공부를 하던지 간에 참선(參禪)공부 하나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나 또는 염불(念佛)을 하나 주문(呪文)을 외이나 항시 우리 마음의 근원자리 불심자리를 놓치지 않아야 그래야 원칙적인 공부란 말입니다.

 

그래야 체를 안 여윈 자기 주체의식(主體意識)을 안 떠난 공부란 말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 제일 쉽습니다. 이렇게 하면은 다른 것 엿볼 필요가 없어요. 부처님 공부만 하기에도 우리는 너무나 바쁘고 자기 인생이 너무나 짧습니다. 우리 인생(人生)의 의의(意義)가 뭣입니까? 인간존재(人間存在)가 자기한테 갖추고 있는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계발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 가정생활 무슨 생활 또 직장생활도 해야 되고 뭣해야 되고 우리는 여러 가지 성불(成佛)의 법()외에 걸로 해서 얼마나 시간과 정력을 많이 빼앗깁니까. 그러기 때문에 그때그때, 그때그때 우리 생명의 손해를 안볼 라면은 잠을 아껴서 공부해야 되고 음식을 아껴서 공부해야 되고 또는 필요 없는 잡담을 아껴서 공부해야 되고 최선을 다해서 공부해야 만이 금생(今生)에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셔서 꼭 금생에 성자(聖者)들이 명백히 가르쳐주신 투명한 가르침 한 점의 의심, 우리가 의심 할 것도 없습니다. 본래로 부처인데 본래로 부처가 되는 것이 제일 쉽습니다. 제일 쉽고 제일 확실하고 제일 이익도 많습니다. 일반사람들은 다른 공부가 보다 더 이익이 많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지만은 그렇지 않고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원칙대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하면은 이른바 이행문(易行門)이라, 쉬울이()자 행할행()자 제일 쉽단 말입니다. 제일 쉽고 제일 이익이 많은 것입니다. 부처님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부처님과 성자들 가르침 따라서 특히 그러한 가르침을 보다 역설 강조하신 우리 금타 대화상 가르침, 여러분들이 나중에 보시면 알으시지만 오늘 나누어 드리는 금강심론(金剛心論) 비록 어렵기는 어려워도 불교의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核心)이 거기에 대부분이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성불하는 데 어떠한 과정을 밟아서 할 것인가? 그런 문제도 중요한 문제 아닙니까. 과정을 모르면 결국은 암중모색(暗中摸索)한다 말입니다. 금강심론에 보면 해탈십육지(解脫十六地), 우리 범부중생(凡夫衆生)이 부처가 되는데 16계단으로 차근차근 과정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냥 단박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재적이고 과거전생(過去前生)에 업장(業障)이 가벼운 분들은 더러 그런 분이 있을란가는 모르겠지마는 보통은 다 어느 수행 방법을 거쳐서 간단 말입니다. 또 방법론에 있어서도 가장 세밀한 방법입니다. 어느 다른 종교(宗敎)나 또 불법(佛法)도 역시 다른 데가 있는 불법은 과정론이 우리 범부중생이 성불로 가는 과정론을 명확히 밝힌 가르침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에 금타 대화상이 비단 불교사(佛敎史)뿐만이 아니라 철학사(哲學史)에 있어서도 굉장히 문화사적(文化史的)으로 아주 공로가 크신 분입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본체론적인 진여불성을 여실하게 사진같이 꼭 생생한 사진 같이 밝히신 거라든가 또는 우리가 부처가 되는데 있어서 어떻게 어떠한 과정으로 부처가 되는 것인가 그런 문제라든가 또는 과학적(科學的)으로 우리가 물질이라는 것이 얼마나 존중히 생각하고 물질 때문에 욕심을 내고 싸우고 죽이고 전쟁을 하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 물질(物質)의 본질(本質)이 무엇인가? 물질의 본질 이것이 물질 자체가 아니란 말입니다. 물질은 모두 허망(虛妄)한 것입니다.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물질이 본래로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우리중생이 지금 허상을 보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存在)는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내는 것이지 실존적(實存的)으로 항시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불교는 무상(無常)이라, 무아(無我), 무상무아는 이것은 원래 없는 것을 우리중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무상, 무아를 부처님께서 그냥 말씀하셨다. 이런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본래로, 본래로 생긴 모습이 무상이란 말입니다. 항상이 없이 변화무상(變化無常)한 것이 무상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법유전(萬法流轉)이라 모든 현상은 다 그때그때 변화무상(變化無常)하단 말입니다. 변화 무상하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존재(存在)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공()이라. 또는 무아(無我)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주 생긴 것이 그대로 무상이고 무아고 공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꼭 금강심론을 잘 보셔서 제 말씀을 참고로 하시고 다른 것은 모르거니와 적어도 삼신일불(三身一佛)이라 부처님이 바로 내 생명인 동시에 우주생명이니까 부처님의 속성 가운데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이 다 갖추고 있고 이것은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하고도 대비가 된나 그것보다 도 훨썩 더 원칙적이고 체계적이지만은 대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기독교(基督敎)와 불교(佛敎)와의 대화(對話)면에서도 불교의 삼신일불 (三身一佛)과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는 충분히 같이 토론도 하고 같이 음미하고 같이 화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어떠한 공부를 하시던 간에 순간도 떠남이 없이 일체삼신자성불(一體三身自性佛) 육조단경에서도 말씀하시고 여러분들이 지금 외이시고 있는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에서도 재차 말씀해 있는 그 법문이 성불의 지름길입니다.

 

금타 대화상께서도 성불의 첩경이라 성불의 지름길이라 역설하셨습니다. 우리가 부처가 돼야 되는데 부처가 될라면 내 스스로 부처고 천지우주만유(天地宇宙萬有)가 바로 부처라는 그런 것에 대한 명확(明確)한 관념(觀念)이 먼저 앞서야 됩니다. 그러니까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우리가 화두를 참구하나 또는 염불을 하나 주문을 외이나 항시 그 자리 본체의 자리를 여의지 않고서 공부를 하셔야 그래야 공부가 날로 날로 진척이 돼서 드디어 우리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과 하나가 딱 돼 버린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