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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46

 

 

우리의 관념(觀念)이 잘못된 선입 관념이 있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염불(念佛)은 정도가 낮은 하근 중생이 하는 것이고 참선은 고급, 보다 차원이 높은 고도 한 분들이 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용수보살이란 제2의 석가가 하필이면은 그와 같이 차원 높고 분별 있는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생각해 보더라도 본래가 부처기 때문에 우주 자체가 부처 아님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을 생각한 것 같이 더 높고 깊고 더 행복스러운 방법이 어디가 있겠습니까. 내가 나의 본 이름을 외운다. 내 생명의 본래 이름을 외우는 것이고 또는 우주의 이름이란 말입니다. 우주의, 또는 그 이름 자체가 모든 공덕을 다 원만히 갖추고 있습니다. 무생청정보주명호(無生淸淨寶珠名號).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 참선을 한다 하더라도 그 자리 그 자리에서 우리 마음이 근본 성품을 안 여의면은 염불을 해도 그것이 바로 참다운 염불참선(念佛參禪)입니다. 부처님은 저가 있고 나는 여가 있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부처와 나를 나누어 생각할 때는 염불참선이 못됩니다.

 

그냥 나무아미타불 부른다 그래서 염불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염불이 참선이 되기 위해서는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마음의 근본 성품이나 또는 저 사람 마음의 근본 성품이나 우주가 모두가 다 부처 아님이 없다. 이와 같이 우주의 실상(實相), 우주의 근본성품을 마음에다 두고 염불해야 비로소 염불참선입니다. 따라서 그냥 염불과 부처님은 저 대상에 있고 내가 부처님을 생각하면 나한테 와서 부처님이 도와준다. 이런 식의 것은 염불참선이 못됩니다. 또는 우리가 화두(話頭)를 의심한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원래 부처거니 어떤 의심을 하던지 간에 부처가 무엇인가. 부처님 자리를 우리가 찾고 참구(參究)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기에 중국에서도 역시 송나라, 송나라 뒤에는 내내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아닙니까. 특히 명나라 때 불교가 또 굉장히 융성 했습니다 만은 그 명나라 때 4대 고승이 있어요. 운서 주굉, 감산덕청, 지욱우익, 자백진가 그 분들이 명나라 때 4대 고승입니다. 4대 고승인데 이 분들이 똑같이 한결 같이 모두가 다 염불화두(念佛話頭)를 했단 말입니다. 염불화두를, 화두란 것은 무엇인가? 이 화두란 것은 우리 마음이 성불(成佛)하기 위해서 임시로 우리 마음을 통일(統一)을 시키기 위해서 우리한테 제시된 하나의 방편(方便)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는 화두가 있지를 않았습니다. 중국 당()나라 때 까지도 화두가 있지를 않았습니다. 참선(參禪)의 정통조사(正統祖師)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28대가 달마(達磨)스님이요. 서른세 번째가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인데 그때까지는 화두란 말이 없었습니다. 중국 송()나라 때 비로소 대혜 종고스님 그 어른께서 화두의 체계를 세웠단 말입니다. 하도 혼란스러운 것이니까 세상이, 그래서 우리 마음을 통일시키기 위해서 임시로 그렇게 세운 것이지 어떤 누구나가 꼭 화두를 들어야한다 이런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달마가 한 것도 아닌 것이고 육조 혜능스님이 한 것도 아닌 것이고 부처님이 하신 것도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한계성을 알아야 됩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시대에 따라서 잠정적으로 화두를 들어란 것이지 우리 한국에 있어서는 중국 송나라 때가 우리 한국(韓國)의 고려(高麗)에 해당합니다. 그때 중국에서 화두법이 들어와서 이조(李朝) 오백년 동안에는 우리 불교(佛敎)가 중국(中國)과 교류(交流)를 못했어요. 교류를 못해 버렸기 때문에 화두가 들어온 채로 해서 딱 오백년 동안 굳어 버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한국, 이 선방 가나 저 선방 가나 화두만 합니다만은 그 나쁜 것이 아니라 화두를 한다 하더라도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근본(根本)자리를 우리가 추구하는 근본자리를 참구하는 그런 태도가 아니면은 참다운 화두가 못됩니다.

 

내 본래면목 자리, 언제 어디에나 존재(存在)하는 생명(生命)의 근본(根本)자리, 이런 자리에다가 우리 마음을 두고서 이것이 무엇인가? 그자리를 참구(參究)하고 구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참선(參禪)이 됩니다. 그래서 염불(念佛)한 분들은, 저는 역시 시간이 또 얼마 안남은 것 같으니까 제가 말씀을 줄여서 하겠습니다만은 그 염불할 때 꼭 우리 불자님들이 외 두셔야 할 것은 염불이라는 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장 쉬운문이기 때문에 집안에서 공부하시고 또는 재가(在家 ) 불자님들에게 아주 알맞은 그런 수행법(修行法)이고 또는 출가(出家) 불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왕이면은 쉬운 방법이 이것이 좋을 뿐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원래 지성(知性)도 있고 감성(感性)도 있고 다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공부가 지성에만 너무 치우치면은 이론적(理論的)인 사람들은 무방할란가 모르지만은 감성적인 사람은 조금 마음이 흡족하지가 않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란 것은 그 그리움 이라하는 동경과 그리움 말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린 나이에 객지(客地) 생활을 많이 한 분들은 느낍니다 만은 객지에 가서 자기 고향(故鄕)을 그리워하고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얼마나 참 순결합니까.

 

그런데 우리 인간 존재의 모든 존재의 근본 고향(故鄕) 자리가 바로 부처님이고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란 말입니다. 극락세계는 이것은 없는 것을 부처님께서 우리를 위로를 시키기 위해서 가설(假說)로 만든 법문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극락세계란 것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우리 모든 존재의 근본 고향자리란 말입니다.

 

()에 보면은 극락세계는 여기에서 부터서 저 십만억 국토 서쪽에 가야 있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은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 (衆生)들이 잘 이해를 못할까봐서 염려해서 하신 말씀인 것이지 극락세계는 분명히 외시기 바랍니다. 극락세계는 이것은 바로 우리가 한 발도 옮기지 않고서 이 세계나 저 세계나 여기나 저기나 모두가 다 본래로 극락세계입니다. 우리 중생은 극락세계인데도 중생이 업장(業障)에 가리어서 보지 못 할 뿐입니다. 극락세계는 무량무변(無量無邊)합니다. 끝도 갓도 없습니다. 끝도 갓도 없는 가운데는 우리 지구(地球)도 다 포함돼 있습니다.

 

끝도 갓도 있어야 지구는 지구 따로 있고 극락세계는 극락세계가 따로 있겠습니다만은 극락 세계는 그러한 제한된 세계가 아닙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가 사실은 부처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맑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이 세계(世界)가 그대로 극락세계(極樂世界)입니다. 이 세계(世界)가 바로 광명정토(光明淨土)입니다. 극락세계의 풀이 이름은 광명정토입니다. 광명으로 충만(充滿)된 세계란 말입니다. 이 세계가 바로 광명으로 충만된 세계입니다.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은 모든 존재의 근본이 하나의 방사광명(放射光明) 같은 광선(光線)이라 그럽니다. 광자(光子)나 또는 양자(陽子)나 중성자(中性子)나 모두가 다 하나의 광명의 빛입니다. 현대물리학도 종당에는 모두가 다 광명뿐이다. 이렇게 말씀한단 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무엇인가. 아미타불은 이것은 무량광불(無量光佛)입니다. 무량광불이라, 한도 끝도 없는 빛의 부처입니다. 청정광불(淸淨光佛)이라, 조금도 때가 없는 광명(光明)의 부처입니다. 모두가 다 옆에 있는 사람, 미운 사람, 도둑질을 하는 나쁜 사람도 그 몸이 지금 광명으로 됐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정화가 되면은 저 십만억 국토 밖에 가서 극락세계에 가서 우리가 부처님을 뵈올 것이 아니라 이대로 이 자리에서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들어서 극락세계를 훤히 보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삼매(三昧)란 말을 깊이 외시기 바랍니다. 삼매가 무엇인가? 삼매란 말은 이것은 우리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우리 마음이 부처님 쪽으로 통일이 된 상태, 우리 마음이 부처님 쪽으로 통일이 돼서 산란스러운 분별시비를 않는 상태가 이것이 삼매입니다.

 

따라서 삼매에 들어가야 성자(聖者)가 된단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본래의 인간성(人間性)을 회복하고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아라, 큰대(), 나아()자 큰나라. 또는 참진()자 나아()자 진아(眞我)란 말입니다. 부처님 되기가 저 같이 게으름 부려서 지금도 온전히 못 됐습니다만은 부처님 되기가 저는 제일 쉽다고 생각합니다. 왜 쉬울 것인가? 어디서 꾸어서 부처님 되는 것도 아닌 것이고 본래 갖추고 있는 그대로 우리가 닦으면 된단 말입니다.

 

또는 우리가 부처가 안 될 것도 아닌 것이고 금생(今生)에 못되면 내생(來生)되고 내생 못되면 또 그 다음 되고 말입니다. 본래 부처기 때문에 헤매고 헤매다가 몇 만생 헤매드라도 다른데로 갈 데가 없습니다. 다 부처가 꼭 되고 만단 말입니다. 그럴 바에는 우리가 금생에 돼서 금생에 영원히 행복스런 행복만이 존재하는 죽음이나 또는 여러 가지 고통이 많은 세계가 인간의 그야말로 괴로울고 ()자 바다해()자 인생고해(苦海) 아닙니까. 생사고해 (生死苦海). 죽고살고, 나고죽고 생사고해에 헤매지 않고서 우리가 영생(永生)의 안락(安樂)을 누리는 극락세계 가기 위해서는 금생에 닦으면 된단 말입니다.

 

금생에 닦아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삼매라. 삼매 가운데도 제일 쉬운 삼매가 염불삼매(念佛三昧)입니다. 염불을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우리가 삼매에 들어가 버린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삼매에 한번 들어가 보십시오. 얼마나 좋은가 말입니다. 우리가 어디가 몸이 아프다 합시다. 몸이 아프다가도 염불삼매에 척 들어서 우리마음이, 마음이나 몸이나 훨썩 더 가벼워지고 또는 앞에 부처님의 한도 끝도 없는 광명을 도인이 채 못 되어도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광명을 본다고 생각할 때에 어디가 몸이 아프더라도 그냥 즉시에 나아 버립니다.

 

우리 중생은 부처님 법만 따르면 천하에 살기가 참 제일 쉬울 것인데 우리가 어째서 하필이면은 부처님 법을 안 따르고 세속에서 조금 배운 것 가지고서 그것만 좋다고 따른단 말입니다. 기독교나 또는 다른 이슬람교나 그런 종교(宗敎)도 모두가 다 성자의 가르침입니다. 성자의 가르침이나, 같은 성자의 가르침도 성자의 개성 따라서 또는 그 시대에 따라서 표현을 달리하고 같은 성자라 하더라도 똑같지가 않단 말입니다. 우리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 같이 원만하게 모두를 다 하나부터 이른바 일체종지(一切種智), 다 알으신 분도 있고 또는 같은 우리 불교 성자라도 부처님 같이는 몰라도 조금 알으신 성자도 있고 가지각색입니다.

 

우리 불교 화엄경(華嚴經)에서 보면은 같은 성자도 열 층계가 있단 말입니다. 열 단계가 말입니다. 초환희지(初歡喜地). 맨 처음에 도를 깨 달아서 아주 환희충만한, 한도 끝도 없이 행복(幸福)을 느끼는 그런데가 초환희지라. 환희지고 말입니다. 아무리 점잖은 사람도 환희지 들면 그때는 춤을 안 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기쁘든가 말입니다. 마하가섭 같은 그런 분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부터서 정통법을 받으신 어른 아닙니까만은 그 분은 굉장히 근엄한 분인데 아, 그 분도 환희지를 성취할 때에 그냥 춤을 너울너울 추었단 말입니다. 일반사람들 이사 얼마나 좋겠습니까.

 

환희지까지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환희지까지 가면 그때는 벌써 성인인데 성인에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삼매에 들어가면은 들어간만치 우리 행복도 차근차근 정도가 더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께서 외 두실 것은 유심정토 자성미타(唯心淨土 自性彌陀). 바꾸어서 자성미타유심정토라. 이렇게 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꼭 그것은 오늘 외 두셔야 됩니다. 자성미타 유심정토라. 자성미타란 것은 자성은 스스로자(), 성품 성()자 우리 본래성품(本來性品)이란 말입니다.

 

참선(參禪)의 교과서 같은 육조단경(六祖壇經)은 이것은 바로 자성(自性)을 깨닫는 견성오도(見性悟道) 하는 내용을 말씀한 경전(經典)입니다. 육조단경이란 말입니다. 자성이란 것은 스스로자(), 성품성()자 바로 우리 본성 불성이란 말이나 똑같습니다. 자성이라. 그래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자성은 바로 우리 불성인데 자성의 본래의 자리는 조금도 번뇌(煩惱)에 오염(汚染)되지 않았으니까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그럽니다. 그래서 자성을 깨닫는 것이 이른바 견성오도란 말입니다. 스스로자(), 성품성()자 자성을 깨닫는 것이 견성이라. 볼견(), 성품성(), 그 자성을 보고 깨닫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참선은 한 말로 하면은 다 자성선(自性禪)입니다. 자성선이라, 육조단경 말씀은 자성선 자리를 고구정녕으로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신 내용으로 충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자성미타(自性彌陀). 우리의 본래면목 자성이 바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인 것이고 또는 유심정토(唯心淨土). 마음이라는 것은 어디에가 국한된 한정이 없이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것인데 우리 마음이 열려지지 않고서 마음이 폐쇄가 되어서 제한돼 놓으면 안보이지만은 마음을 열면 제 아무리 고통스러운 것도 고통이 아니라 모두가 다 그 자리 그대로 극락세계란 말입니다.

 

그래서 유심정토라. 오직유(), 마음심(), 정토란 것은 극락세계란 말하고 똑같습니다. 맑을정 조촐할정(), 흙토()자 말입니다. 광명정토(光明淨土)나 또는 그냥 정토나 극락세계나 다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꼭 외 두셔야 할 것은 가장 쉬운 공부를 두고서 우리가 어려운 공부를 할 필요는 없겠지요.

 

특히 재가 불자님들은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하기 때문에 염불선(念佛禪) 공부를 하되 염불선은 그냥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부처와 나와 둘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은 염불선 공부가 못됩니다. 부처와 나와 모든 존재와 나와 우주와 나와 절대로 둘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우주의 부처님 도리의 근본자리를 여의지 않고서 바꿔서 말 하면은 본 성품을 여의지 않고서 우리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하나 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하나 또는 이름을 부르기가 싫어서 가만히 명상(瞑想)에 잠기나 그러면은 바로 그때는 가장 좋은 참선법(參禪法)이란 말입니다.

 

화두를 드나 화두를 안 드나 그건 상관이 없습니다. 들고 싶으면 들고 또는 들기 싫으면 안 든다 하드라도 우리 마음이 그 자리에 가, 근본자리, 불성자리, 자성자리에가 있으면은 바로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일본(日本)사람들 선방(禪房)같이 염불(念佛)을 화두(話頭)로 하는 황벽종(黃檗宗)을 하든 또는 화두가 없이 그저 잠자코 비추어 보는 명상 선을 하는 묵조(墨照)를 하든 또는 화두를 참구하는 임제선적인 선을 하던 다 좋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뭣이 좋다. 궂다 할 것이 아니라 역시 참선법의 제일 좋은 것은 우리 불심 그대로 우리 자성 그대로 닦는 법인데 참선법은 근본 마음자리, 근본 불성자리만 우리가 떠나지 않으면 근본불성에다가 우리 마음을 둔다고 생각할 때는 염불을 하나 또는 화두를 하나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나 모두가 다 참선법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제일 쉬운 참선법으로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자성미타 유심정토(自性彌陀 唯心淨土). 우리 자성이, 바로 자성이 이것이 그야말로 바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이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고 불심(佛心)이고 불성(佛性)이다.

 

또는 우리 마음이 청정하면은 어디에 가서 극락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가 모두가 극락세계인데 우리 마음이 더러우니까 더럽게 보이는 것이지 우리 마음이 참말로 맑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 자리가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은 우리 마음을 정화할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꼭 다시없는 가장 쉽고도 가장 행복(幸福)스러운 그런 법으로 성불(成佛)하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