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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43

 

 

우리 마음을 우리 중생들은 그 흩어질 산(), 마음 심(), 산심(散心)이라. 이른바 산란한 마음을 도저히 잠재우기가 어렵습니다. 온전히 산란한 마음 산심을 잠재웠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성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중생심을 완전히 끊어 버리기 전에는 산란한 마음을 우리가 이길 수가 없단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가 이길 것인가? 그것이 여러분들이 지금 공부하시는 그런 방법입니다.

 

그야말로 참 주문(呪文)도 외이고 경()도 쓰고 또는 참선(參禪)도 하고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을 영원적인 진리에다가 딱 붙여서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서 그 자리를 생각 생각에, 생각 생각에 간단없이, 끊임없이 그 자리에다가 우리 마음을 집중을 시켜 나간단 말입니다. 맨 처음에는 우리 버릇이 별로 좋지가 않기 때문에 잘 안 됩니다. 그것이 그래서 참선(參禪)도 하다 보면 맨 처음에 들어온 사람들은 자꾸만 지금까지 버릇이 된 그런 산란한 마음 때문에 이른바 상 때문에 걸려서 공부가 안된단 말입니다.

 

그러면 억지로 앉으면 그때는 기()가 올라가 가지고서 상기(上氣)가 되어서 병나고 하지요. 따라서 우리 재가 불자님들이 그렇게 어려운 공부는 하시기가 좀 곤란스럽지 않습니까. 선방에 공부하는 것도 우리가 밖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쉽지만은 하루에 그렇게 몇 시간씩 한 여남은 시간씩 앉아서 지내는 것이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누구 자기 무슨 어머니가 계시는 것도 아닌 것이고 또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오직 그냥 외로운 데서 그렇게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재가 불자님들은 그 선방(禪房)에서나 산중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을 상당히 생각을 많이 해서 도와주시기도 하고 동정을 좀 하셔야 됩니다. 제일 쉬운 방법이 무엇인고 하면은 종교가 다 거의 공통이 됩니다. 공통이. 기독교도 , 주여!’ 하고 하느님이시여!’ 하지 않습니까. 역시 그 표현은 좀 다르다 하더라도 불교도 그와 거의 다 같습니다. 표현만 차이가 있지 말입니다. 오직 부처님의, 부처님의 이름을 외인단 말입니다. 왜 그냥 가만히 있어놓으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금생(今生)에도 어려서부터 가지가지의 여러 가지 업을 많이 지어놔서 그 업 때문에 공부가 어디로 그냥 간 곳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이름을 외는 것은 그래도 하면 좀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한 시간도 염주(念珠)를 헤아리면서 할 수도 있고 또는 염주 없이도 할 수가 있고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이름을 외이는 이른바 염불(念佛)이 제일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도 공부하는 수행법에 관해서 염불 말씀을 제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염불 그러면은 잘 모르는 사람들은 염불은 그냥 무식한 사람들이나 하고 우리 노인네나 하는 것이지 유식한 사람들이나 현대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염불할 것인가. 이렇게 쉽게 생각한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염불도 염불의 차원(次元)이 있단 말입니다. 그냥 덮어놓고서 부처님 이름만 외이는 그런 염불도 있습니다. 이런가 하면은 우리 마음이 산란스러운 것이니까 산란스러운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부처님 얼굴같이 원만덕상 (圓滿德相)이 없지 않습니까. 부처님 얼굴은 삼십이대인상(三十二大人相)이라, 눈이나 코나 입이나 모두가 다 아주 완전한 상호란 말입니다. 부처님 얼굴이 왜 그렇게 태어났는가 하면은 부처님은 무량(無量)세월 동안에 상을 떠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때그때 몸을 몇 번이나 몇 천 번 바치고 했단 말입니다.

 

우리가 팔상록(八相錄) 보면 추녀개용(醜女改容)이라. 추녀개용. 추녀는 무엇인고 하면은 더러울 추(), 여자라 하는 녀()자 말입니다. 그 추녀가 개용이라. 고칠 개(), 얼굴 용(), 못생긴 추녀가 얼굴을 다시 아주 예쁘게 고쳤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 팔상록에 있습니다. 추녀개용이라. 어떻게 해서 한 번 태어난 사람이 얼굴이 그렇게 예뻐질 수가 있는 것인가? 분명히 그것은 있습니다. 있으니까 부처님께서도 말씀을 하시겠지요.

 

그 파사익 왕자의 딸이 있는데 그 왕 딸이니까 그야말로 참 귀한 딸 아닙니까. 그런데 굉장히 얼굴이 못생겼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대신들이 와도 통 보이지도 않고 말입니다. 딱 그냥 어떻게 유폐(幽閉)해 가지고 숨겨서 저녁에 만난단 말입니다. 그러나 어려서는 모르거니와 그렇게 과년이 되어서 결혼하게 됐으니까 어떻게 참 그야말로 염려가 더 크겠지요. 왕자로 해서는. 그러나 왕자니까 대신 아들 가운데서 제일 구차한 사람, 대신 아들도 부자는 이놈이 아상(我相)이 좀 있을 것이고 하기 때문에 거부할지 모르니까 제일 구차한 사람한테 억지로 공주를 맡겼단 말입니다.

 

그렇게 공주는 결혼식 때도 얼굴이 하도 못생겨 놓으니까 얼굴도 안 내놓고 말입니다. 비밀로 해가지고서 꼭 자기 방 하나 만들어 가지고 거기다가 유폐를 시켰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새아씨 마음이 얼마나 참 고독하고 슬프겠습니까. 그 귀한 공주인데도 그렇게 하니까 말입니다. 다행히도 부처님 세상이니까, 또 자기 아버지인 파사익왕은 부처님한테 굉장히 잘 한 분입니다. 아주 독실하게 부처님을 신봉(信奉)한 분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이 어떤 분이란 것을 자기 딸도 들어서 알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은 그야말로 참 모두를 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부처님한테 내가 상의해야 되겠구나. 그래서 하여튼 자기 온 힘을 다해서 부처님한테 기원제(祈願祭)를 드렸단 말입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저는 과거세(過去世) 무슨 죄로 금생에 이와 같이 얼굴이 참 못나게 생겼습니까. 그야말로 참 죽고 싶을 정도가 됐겠지요. 그러니까 하여튼 우리가 같은 기원도 죽을 정도로 간절할 때에 그런 기원은 굉장히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나쁜 짓을 많이 해가지고서 죽을 때 그때는 영락없이 삼악도에 가야 되겠지요. 그러나 죽을 임시에, 나쁜 짓을 많이 했지만은 죽을 임시에 선지식 만나서 정말 지성으로, 지성으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한 번만 한다고 생각할 때에 한 번 한 공덕(功德)으로 해서 지옥(地獄)에 안 가고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태어난단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나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그러는가 보다. 생각 할란가 모르겠지만은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란 것이 본래로 부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형상이 없는 부처기 때문에 형상(形相)이 없다는 것은 사실은 오염(汚染)이 안 됩니다. 모양이 있어야 자취가 있어야 그래야 오염되고 말고 하겠지요. 본래 우리 마음은 자취가 없는 하나의 부처와 똑같은 생명 자체기 때문에 오염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래놔서 우리가 사무치게 기원드릴 때는 그때는 우리 마음이 비약적으로 맑아온단 말입니다.

 

맑아지면 우리 몸이라 하는 것은 결국 하나의 우리 마음의 형상에 불과합니다. 과거전생(過去前生)에 어떻게 살았든가? 우리 업 따라서 금생에 우리가 몸을 받는단 말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의 삼십이대인상, 부처님의 원만덕상(圓滿德相)은 우연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과거세에 무수한 동안에 이렇게 저렇게 중생한테 보시하고 말입니다. 그때그때 남한테 듣기 싫은 말 않고 우리가 남한테 듣기 싫은 말 할 때에 거울로 자기 얼굴을 봐 보십시오. 얼마나 추한가 말입니다. 그래서 사무치는 마음으로 파사익 왕자의 못난 딸이 부처님한테 기원 드리니까 부처님한테 기원 드리는 그 공덕(功德)으로 해서 그렇게 못생긴 얼굴이 모양을 바꾸어서 아주 정말로 참 아름다운 얼굴로 해서 바꿔졌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추녀개용입니다.

 

헌데 사실 참 그야말로 우리가 염불(念佛)할 때 있어서도 부처님 이름만 외일 때 하는 염불도 있고, 또 그런가 하면은 부처님의 원만상, 법당에다 모시고 모다 여기도 뒤에 가 부처님 화상이 있잖습니까만 부처님의 그런 원만한 상호를 우리가 관찰하면서 말입니다. 관조(觀照)하면서 염불하는 것과 또 한 가지는 뭣인가 하면은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우주에 끝도 갓도 없이 가득 차 있는 하나의 생명이다. 따라서 그러한 부처님의 생명을 우리가 상상하면서 하는 염불은 이른바 실상염불(實相念佛)입니다.

 

실상염불이라. 우주의 참다운 도리를 생각한단 말입니다. 다시 바꿔서 말 하면은 우주(宇宙)의 근본(根本) 바탕, 근본 바탕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른바 불성(佛性)이고 또는 법성(法性)이고 합니다. 그래서 불성이나 법성이나 또는 보리나 열반(涅槃)이나 다 같은 뜻입니다. 그때그때 편의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달리 부를 뿐인 것이지 불성이나 법성이나 또는 참 진(), 같을 여(), 진여(眞如)나 또는 일자(一者)나 한 일(), 놈 자(), 일자나 다 같은 뜻이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고구정녕으로 이 사람한테는 이렇게 가르치고 저 사람한테는 저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그 편의에 따라서 약간 차이가 있을 뿐인 것이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래생명(本來生命)자리로 돌아가는 본래생명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그러한 것은 다 똑같습니다. 하여튼 우주의 근본 생명 이것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인 것이고 진리(眞理)로 말하면 진여(眞如)고 또 생명으로 말하면 그때는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불성을 찾는 것이 우리 인간이 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인데 찾는 방법이 여러 가지 방법이 많이 있으나 특히 우리 재가불자님들은 부처님의 이름을 외이는 염불(念佛) 공부가 제일하기가 쉽단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슨 이름, 무슨 이름 무슨 명사가 있고 무슨 개념이 있고 다 그렇지만은 그런 모든 관념이나 개념 가운데 가장 귀하고 가장 무섭고 가장 자비스러운 이름이 부처님 이름입니다. 부처님 이름은 여러 가지 많이 있지만은 포괄적으로 말하면 내내야 가장 쉬운 아미타불(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아닙니까. 나무를 보태서 나무아미타불! 해도 좋고 또는 나무를 보태지 않고서 그냥 아미타불! 해도 똑 같습니다. 아미타불해도. 우리 중생의 그 이름들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때그때 자기 부모가 짓던가 작명가(作名家)가 짓던가 그래서 박 아무개, 김 아무개 하지만은 부처님 이름은 우리 중생견해(衆生見解)로 짓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무량공덕(無量功德)이 거기에 깃들어 있어 놔서 무량공덕을 다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말로 하면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 명호부사의라. 이름자체가 부사의한 공덕이 있단 말입니다. 불자님들 쉽게 생각을 말으십시오. 명호부사의라. 부처님 명호는 우리 사람만 두려워하고 좋아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천상 인간이나 귀신이나 신장이나 다 좋아하고 다 두려워합니다. 우리가 어머니나 아버지, 아버지 부르고 어머니 어머니만 부른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얼마나 더욱더 그리워지고 그렇게 거기에 마음이 가까워지고 하지 않겠습니까.

 

한데 하물며 내 생명(生命)의 근본(根本) 자리 내 마음의 근본자리가 바로 부처고 또는 우주(宇宙)의 생명자리가 바로 부처기 때문에 부처의 이름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냥 보통 이름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우주의 진리가 거기에 담아있도록 지은 이름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명호부사의라, 이름 자체가 부사의한 공덕이 있단 말입니다. 한번 외이면 외인만치 우리의 업장(業障)이 녹아진단 말입니다. 우리가 나는 업장이 없지 않는가. 내가 무슨 금생(今生)에 나와서 큰 죄도 안 짓고 무슨 업장이 있는가 하지만은 우리 중생들은 사실은 업장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중생인 한에는 지금 업장으로 꽁꽁 묶여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공부를 하면은 그 업장 때문에 분별시비(分別是非)라든가 여러 가지 망상(妄想) 때문에 우리가 공부가 하기가 어려워요.

 

그것이. 더구나 집안일은 또 봐야 되고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재가 불자님들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일 쉬운 공부인 동시에 사실 은 제일 속빠른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경(佛經)에서 이왕이수(易往易修). 이왕이수(易往易修). 쉬울 이(), 갈 왕()자 말입니다. 또는 쉬울 이(), 닦을 수(). 닦기도 쉽고 또 성취가 쉽단 말입니다. 모든 존재의 근본 이름자리 또는 그것이 바로 따지고 보면 내 스스로의 이름입니다. 김아무개, 박아무개 그것은 그때그때 편의에 따라서 지어 붙인 하나의 가명에 불과하고 참다운 진짜 이름은 결국은 내내야 아까 말씀드린바 우리 마음이 본래 부처인지라. 우리 마음이 결국은 생명 아닙니까. 따라서 그 마음자리 이름인 부처님 이름이 바로 내 이름이란 말입니다.

 

어느 누구나가 다 자기 참 이름은 바로 부처님 이름이기 때문에 내가 바로 아미타불이라. 불교에서 자성미타(自性彌陀), 자성미타. 내 본래가 바로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나 같은 것이 어떻게 아미타불일 것인가? 이렇게 생각을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 생각인 것이고 본래로,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내가 설사 무슨 살인죄를 범했다 하드라도 죄란 것은 모양이 없습니다. 업은 있으나 모양은 없습니다. 모양이 없어 놔서 내가 지금 살인죄를 범했다 하드라도 모양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물들지가 않아요.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나쁜 업을 했다 하드라도 사실은 우리 마음을 오염 시킬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잠시간 업이 가려있다는 한계를 분명히 알으셔야 됩니다. 우리모양이 우리 마음이 오염(汚染)이 되어 버렸으면 그때는 상당히 오랫동안 닦고, 닦고 또는 깨끗이 빨고 그래야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 마음은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양이 없는 하나의 생명자체기 때문에 순수생명(純粹生命)이기 때문에 어떤 업으로나 죄로나 그런 거로 해서 오염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다만 가리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사무치면 과거에 무슨 백정을 했든가 도둑놈이 됐든가 말입니다. 그런 것도 사실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으로 해서 내 마음이 본래는 부처다. 저 사람 마음도 본래는 부처다. 내 마음만 부처가 아니라 저 사람도 부처기 때문에 내 마음도 우주에 가득 차 있고 그대 마음도 우주에 가득 차 있고 말입니다. 굉장히 이것이 심오(深悟)한 문젭니다. 심오한 문제고 모든 철학(哲學)이 사실은 다 들어 있는 문젭니다. 그 머리 좋은 철학자들이 인간이 대체로 무엇인가? 인간 생명은 무엇인가? 그걸 알려고 수백 년 동안 모다 애쓰고 하는 그것이 하나의 그런 문젭니다. 그런 문젠데.

 

부처님 가르침은 별로 많은 말씀이 아니라 그런 말씀으로 해서 우리한테 다 밝혔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내 마음 이대로 바로 이대로 바로 부처다. 이것이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핵심입니다. 제 아무리 공부한다고 애쓴다 하더라도 이런 도리를 알고 닦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수고를 많이 하고 별로 이익(利益)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달마스님 관심론(觀心論)에도 요심수도(了心修道), 마음이 뭣인가를 알고 닦으면 생공이이성(省功而易成)이라, 별로 공을 안 들이고서 빨리 성취가 되고 또는 불료심수도(不了心修道)면 만약 우리가 마음이 무엇인가 모르고 닦으면 그때는 증사작반(蒸沙作飯)이라. 마치 모래를 삶아서 밥을 만드는 것이나 같단 말입니다. 모래를 삶으면 밥이 되겠습니까.

 

그와 같이 우리가 공부할 때는 꼭 근원적인 자리를 안 떠나야 됩니다. 이른바 본체(本體)를 안 떠난단 말입니다. 그래서 염불(念佛)을 하시기 바랍니다. 염불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일하기도 쉽고 사실은 제일 행복(幸福)한 자립니다. 염불하면 어떠한 공덕이 있는 것인가? 이 시간에 너무 말씀을 다 하면 나중에 제가 밑천이 짧아지면 곤란스럽고 염불한 공덕은 다음으로... 만공덕이 있습니다. 만공덕이. 한량없는 공덕이 있는 것인데 한량없는 공덕은 다음에 말씀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부지런히 외셔서 꼭 성불(成佛)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