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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741

 

 

참선이란 것은 뭣 때문에 하는 것인가? 참선은 이것은 허튼 허망한 것에 걸려있는 허망한 것에 집착해 있는 우리 마음을 다 풀어버리고서 본래의 마음자리, 본래의 순수한 마음자리로 간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할 일은 무엇인가? 인간의 할 일도 그러니까 훤합니다. 무명을 떠나서 참다운, 참다운 깨달음으로 간단 말입니다. 참다운 깨달음은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 번뇌, 그 모양에 사로잡혀서 모양 보고 참말로 있다고 생각하고 모양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 우리가 부숴버리고서 모양을 떠나버린 이른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그런 참다운 생명(生命)을 얻는단 말입니다.

 

우리 범부(凡夫)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양만 가지고 상만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상만 말입니다. 상만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딱 우리 마음이 구속되기 때문에 모양이 없는 그 자리는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지금 모양이 있습니까. 우리 마음은 모양이 없습니다. 부처님이나 하나님은 지금 모양이 있습니까. 그도 없습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한테 우리 인간 존재에 대해서 가장 귀중한 그런 선물이 무엇인가? 가장 귀중한 가르침이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마음이. 우리 마음도 모양이 없잖습니까. 모양이 없다는 것은 어느 공간 속에 제한돼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다는 것은 천지우주(天地宇宙)에 두루해 있다는 말이나 같습니다. 우리 마음도 모양도 없고 또 부처님도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하나의 역사적으로 나오셔서 닦아서 성인이 되어서 비로소 우주의 도리를 아신 분이란 말입니다. 다른 도인(道人)도 사실 다 마찬가집니다. 다만 표현만 다르고 그때그때 역사적인 발달과정 따라서 조금 다르게 표현된 것이지 내내야 우리가 철학적(哲學的)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그렇습니다. 공자나 예수님이나 석가님이나 다 닦아가지고서 마음이 청정해서 우주의 도리와 하나가 됐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바꿔서 말하면 사실은 예수님이나 공자님이나 우리 석가모니나 모두가 다 우주와 하나가 돼버렸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자리에서 보면 다 부처님 아님이 없고 하나님 아님이 없습니다. 제가 아직 지금 본론(本論)에 안 들어갔습니다. 본론에 안 들어가서 너무 그냥 서론(序論)이 길어지면 지리하실 것이고 저도 그렇고 해서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그 중요한 문제가 우리가 어떻게 가장 쉽게 생명의 근본 자리인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이 문제가 제일 크지 않습니까. 제가 여기서 몇 시간 동안 얘기해 봐도 무슨 이것저것 제가 주워 외인 것을 갖다 얘기해봐도 그것은 하나의 참고밖에 안 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우리가 성불(成佛)할 것인가 말입니다. 즉 이 문제 단 말입니다. 성불하는 것, 부처가 되는 것, 영원한 도리와 하나가 되는 것, 이것보다도 더 중요한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석가모니께서 우리한테 주신 가장 귀중한 선물이 무엇인고 하면은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란 가르침입니다. 그러면은 지금 선방에서 우리 스님네가 참선을 하고 계십니다만 참선은 뭣 때문에 하는 것인가? 참선은 이것은 다른 자질구레한 이론들은 거기다가 마음을 두면은 가장 소중한 우리 마음이 부처라는 도리를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복잡한 것은 다 그만 두고서 그냥 비약적(飛躍的)으로 마음이 바로 부처라, 마음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 깨달아야 되겠지요.

 

우리가 생각할 때는 석가모니 같은 마음이나 공자 같은 마음이나 예수님 같은 마음은 바로 마음이 부처라 해도 좋지만은 우리같이 더러는 이상한 생각도 하고 모다 그런 별 보잘것없는 마음이 어떻게 부처가 될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중생 차원에서 봐서 그런 것이지 본래의 자리, 불교는 본래(本來)란 말씀을 굉장히 소중하니 여깁니다. 본래의 자리. 본래 생긴 대로, 본래 실존(實存)대로 즉 실상(實相)대로 얘기하면은 잘난 사람 마음이나 도둑놈 마음이나 석가모니 마음이나 똑같단 말입니다.

 

깨달아서, 깨닫고 난 뒤에가 아니라 깨닫기 전에도 역시 지금도 이 가운데는 상당히 공부도 많이 하고 또는 학식도 높으신 석학들도 많이 계시고 또는 정히 하여튼 별로 그렇게 신앙적(信仰的)으로 탐구하지 않는 그런 분들도 계시고 그렇게 그러시겠지요. 그러나 그분들 마음이 겉에 뜬 그런 마음은 천차만별이 되겠지만 밑에 바탕 이른바 성품(性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똑같습니다.

 

참다운 성품이 불교에서는 불성(佛性) 그래요. 불성이라, 부처 불(), 성품 성()자 아닙니까. 또는 우주를 말할 때는 법 법(), 성품, ()자 법성(法性) 그럽니다. 이것도 표현만 차이가 있을 것이지 우리 마음의 본성인 불성이나, 또는 우주의 근본 바탕인 법성이나 똑같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인위적으로 그때그때 편의 따라서 이루어진 이름 때문에 자꾸만 걸린단 말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꼭 그 이름 때문에 허망한 그런 그야말로 가명(假名)이라 가짜 이름 때문에 걸려서는 안 됩니다. 김 아무개 박 아무개도 모두가 본래 타고 나온 이름이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은 다 가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가명이나 가상(假相)을 떠나서, 철학(哲學)이나 종교(宗敎)를 공부 할 때는 될수록 가명가상을 떠나야 됩니다. 이른바 쉬운 말로 하면은 상을 떠난, 상을 없앤단 말입니다.

 

그러게 금강경(金剛經)에도 아상(我相)이라, 나라는 상, 인상이라 너라는 상 또는 중생이라, 본래에서 보면 결국 다 같은 똑같은 하나의 진리 존재인데 이것저것 우리가 하나의 것을 설정해 가지고서 거기다가 우리 마음을 잡아맨단 말입니다. 그러니 중생상이라 또는 수명도, 우리 목숨도 역시 본래 길고 짧은 그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조금 어렵게 들어갑니다만 원래 우리가 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시간성 공간성이 없기 때문에 사실은 수명이 짧다 길다 한 것도 이것은 없단 말입니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불교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생사(生死)가 없다고 하지요. 왜 그런고 하면은 원래 우리 생명이라 하는 것이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낳고 죽는 것도 역시 우리가 모양만 각 물질로 이루어진 허깨비 같은 모양만 없어지고 있어지고 보이고 안보이고 하는 것이지 생명 자체는 본래 죽엄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불생불멸이라. 낳을 것도 없고 죽을 것도 없단 말입니다. 이런 도리가 염불(念佛)도 많이 하고 참선도 많이 하고 하면은 그때는 저절로 마음이 맑아지는 정도에 따라서 차근차근 더 선명해 집니다. 그러기에 경에도 구구순숙(久久純熟이라, 구구순숙, 생각 생각에 오랫동안 진리를 지향해 닦다 보면 아주 순수하게 닦다 보면 그때는 자연내외타성일편(自然內外打成一片)이라. 밖에 보이는 것이나 우리 마음이나 타성일편이라. 모두가 다 하나가 돼버린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 얼마나 분열돼 있습니까. 너 따로 나 따로 이것 따로 저것 따로 짧다 길다 여러 가지로 분열돼 있지만은 우리 마음이 순수화 되면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겉으로 집착한 모든 것이 다 하나가 돼버린단 말입니다. 하나가 돼버린 그런 정도가 돼야 참다운 자비심(慈悲心)이 나옵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그런 관념적(觀念的)으로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중생의 나쁜 버릇 때문에 꼭 나한테는 좋게 해주고 또 나 아닌 사람한테는 그때는 소홀히 대해진단 말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나와 남이 원래 둘이 아니다. 이런 것이 차근차근 더 확신이 깊어 지면은 처음에는 확신이 깊어지지 않겠지요.

 

그러나 구구순숙이라. 오래 구(), 오래 구()자 오래 오래 우리 마음이 하나의 진리로 해서 이렇게 딱 모아지다 보면 그때는 차근차근 나와 남의 관념(觀念)이 다 흐려지고 말입니다. 나와 남의 관념이 흐려지면 그때는 그에 정비례해서 우리 자비심이 생겨납니다. 누구한테 보시(布施)를 많이 해라, 또는 사회적으로 희사를 많이 해라. 그런 말 저런 말 많이 하지만은 그 말로 해서 그것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음이 그도 어느 정도 맑아져야 되는 것이지 억지로 시켜놓으면 그것이 그땐 위선(僞善)이 되고 만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 상이 없이 해야 위선이 안 되는 것이지 상이 있는 것은 항시 그때는 해도 위선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불(成佛)하기 위해서 하는 법은 여러 가지가 많이 있잖습니까. 그 참선(參禪)하는 법이나 또는 기타 주문(呪文)을 외이는 법이나 또는 경()을 베끼는 법이나 여러 가지 법이 있습니다. 아무튼 모두가 다 요체(要諦)는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마음을 하나로 통일(統一)시켜서 통일된 염력(念力)이라. 염력이라 하는 것은 진리(眞理)에 대해서 거기다가 우리 마음을 모은 이른바 집중력(集中力)이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涅槃) 들으실 때에 경이 이것이 유교경(遺敎經)이라. 그것은 짤막한 경입니다만 부처님께서 마지막 설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경이지요. 거가서 이런 말씀이 있어요.

 

염력강고(念力强故). 염력이 하나의 진리에다가 마음을 딱 붙여 가지고서 생각 생각에 변치 않는 그 마음, 염력이 강한 고로, 염력이 강하고 오욕적중(五欲敵中) 불위소해(不爲所害), 오욕을 우리가 탐심(貪心)을 내고 진심(嗔心)을 내고 남을 미워하고 또는 재물에 대해서 욕심을 내고 감투에 욕심을 내고 그런 여러 가지 인간적인 욕망들이 오욕인데 그것이 오욕적중이라. 적어도 진리를 배우는 사람들은 그런 오욕을 원수같이 봐야 됩니다. 사실 그것 때문에 그 오욕 때문에 우리가 생각을 바로 못 하고 나쁜 행업(行業)을 지어서 고를 받으니까 말입니다. 혹업고(惑業苦). 우리가 무명(無明) 때문에 업()을 짓고 업 때문에 고()를 받는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업을 짓는 그런 원인은 무엇인가? 내내야 우리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무명심(無明心) 때문에 결국은 바로 못 보는 것인데 우리 마음을 한가지 진리에다 딱 붙여가지고서 생각 생각에 힘을 모으면 그때는 차근차근 염력이 강해집니다. 염력이 강해지면 그때는 오욕적중불위소해라. 그 오욕이라 하는 재물욕(財物慾), 명예욕(名譽慾), 자기 생명욕(生命慾) 그런 욕심의 원수 가운데 있다 하드라도 우리 불자님들은 꼭 그런 욕심이나 우리가 세간적으로 보통 생각하는 상에 대한 것을 모두가 다 원수같이 봐야 됩니다. 그런 오욕의 욕심 그런 원수 가운데 있다 하드라도 불위소해라. 어떻게 해치지를 못 한단 말입니다. 수행이 많이 된 스님 네한테 가서 당신한테 무슨 감투를 줄 테니까 써라 하면 쓰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