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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39

 

 

이른바 법신(法身)이라. 법신 자리에 법신 자리에다가 우리 마음을 항시 머물게 한단 말입니다. 법신이란 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 불(), 마음 심(), 바로 불심(佛心)이고 말입니다. 또는 부처 불(), 몸 신(), 그때는 불신(佛身) 그래도 무방한 것이고 말입니다. 또는 법 법(), 성품 성(), 불성(佛性) 그래도 무방한 것이고 같은 뜻이에요.

 

모두가 다 법성이나 불성이나 불신이나 또는 불심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그것은 모두가 다 일체 존재의 근본 바탕을 말한단 말입니다. 사람의 바탕을 말할 때는 그때는 불심 말해야 가장 더 타당이 되겠지요. 그 어떻게 말하든지 간에 모든 존재의 근본 바탕 자리인데 거기다가 마음을 두지 않는 한에는 우리 마음은 온전히 다스려지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러한 우리 마음을 안정되게 할라면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을 근본성품(根本性品) 자리에다가 머물게 할 것인데 머물게 하는 공부 가운데서 가장 그런 수승한 공부가 이른바 참선(參禪)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참선에 대해서 너무나 그냥 첫 박스로 어렵게 생각을 하시는 그런 분들이 더러 계십니다. 근데 참선이라는 것도 역시 우리가 알고보면은 가장 쉬운 것입니다. 부처님 법이 알고보면은 사실은 가장 쉬운 법이란 말입니다. 어디서 꾸어 온 것도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내내야 자기가 다 본래 갖추고 있는 그 자리를 계발한 것이기 때문에 제일 쉬운 것이 부처님 법이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참선법도 따지고 보면은 부처님 법 가운데서 부처가 되기 위한 가장 간편하고 가장 압축된 이른바 대총상법문이 바로 참선법이기 때문에 가장 쉽습니다.

 

그러면 그 참선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여러 가지로 말씀들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우리 한국도 각 불교 그 다종교(多宗敎)사회인지라 종파(宗派)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말씀들을 많이 합니다. 이 종파는 또 어느 참선법을 말하고 저 종파는 또 다르게 말하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여러 가지 참선법이 대체로 세 가지로 구분해 있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이런 그 부처님 법 가운데 성불하기 위한 가장 지름길이 이른바 참선의 길인데 참선 길이 세 가지 법으로 보통 구분돼 있단 말입니다.

 

 

한 가지는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한국 지금 조계종(曹溪宗)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바와 같이 어느 문제 어느 화두(話頭)를 우리가 의심(疑心)한단 말입니다. 어느 문제를 의심하면서 그 화두를 풀어나가는 그런 방법이 있습니다. 화두란 말은 또 공안(公案)이라고 말도 합니다 만은 그러한 그 공안을 풀어나가는 그런 참선법이 있고, 또 한 가지는 그런 공안 법이 아니라 그런 문제를 설정하지 않고서 그냥 명상적으로 우리 마음이 원래 부처거니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 부처를 잠자코 비추어 보는 그러한 법도 있습니다.

 

이것은 학문적인 술어로 하면은 그때는 아 묵조선(黙照禪)이라 이렇게 말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일본(日本) 사람들은 주로 그 묵조선 쪽에다가 관심을 더 두어서 묵조선하는 사람들이 훨썩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은 특히 조계종(曹溪宗) 같은 그 종파(宗派)에서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화두공안(話頭公案)을 의심하는 그런 참선법이 거의 대부분이란 말입니다.

 

또 한 가지는 어떤 법인고 하면은 그 우리가 본래 부처고 앞으로도 우리가 부처가 돼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본래 부처인지라 본래 부처인 자리를 떠나지 않고서 꼭 앞으로 부처가 돼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부처님을 순간 찰나도 놓치지 않고서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 마음을 깨닫게 하는 그런 방법이 이른바 염불(念佛) 참선법(參禪法)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법이 있습니다. 세 가지 법이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쁘다고 할 수가 없어요. 다 도인들이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모두 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세 가지 법을 우리가 다 놓고 본다고 생각할 때에 따져 보면 결국은 다 하나의 법이란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내내야 결국 우리가 본래로 부처인 것이고 또 우리가 앞으로도 부처가 되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내내야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고 걸음걸음 부처가 되어 가면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가 않은 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우리가 하도 금생에 나와서도 업을 많이 지었단 말입니다. 이래저래 우리가 그런 부질없는 망상분별(妄想分別)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화두(話頭)를 의심 하나 또는 화두가 없이 그냥 잠자코 묵묵하니 명상적으로 공부하는 우리가 묵조선(黙照禪)을 하나 또는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가 되어가는 그런 염불선(念佛禪) 공부를 하나 그렇게 쉽지가 않단 말입니다. 쉽지가 않더라도 우리가 참선을 해야 하니까 인제 꼭 우리가 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이른바 우리가 업식(業識)을 녹여서 법신(法身)하고 하나가 돼서 즉 말하자면 우리가 성불(成佛)의 길로 나아갈 수가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은 이 가운데서 여러 가지로 그런 공부 문제에 애를 많이 쓰시기도 하시고 경험도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재차 한번 생각을 깊이 해서 말입니다. 정말로 내가 어떻게 참선을 해서 성불을 빨리할 것인가? 사실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 안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가 되는 길보다도 더 수승(殊勝)한 길은 없습니다. 부처가 되는 길보다도 더 급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 생명이 이것이 얼마나 허망합니까. 저 같은 사람도 작년에라도 죽어버렸으면은 여기 와서 이런 말씀을 드릴 수가 없지요. 그 어느 누구나가 언제 안 죽으라는 법이 없단 말입니다. 나이 먹어지면 그 응당 그것은 다 죽는 것이고 말입니다.

 

따라서 죽음이라는 것은 노소부정이라. 늙다 그래서 빨리 가고 젊다 그래서 늦게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그때 인연(因緣)이 닿으면 결국 가진단 말입니다. 인연이 가기 전에 인연이 다 하기 전에 우리가 공부(工夫)를 익혀둬야 공부의 습관성(習慣性)을 많이 붙여둬야 그래야 우리가 업신(業身)으로 윤회(輪廻)를 안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냥 죽자마자 몸뚱이 버리자마자 그 업신 가지고서 다시 우리가 뱅뱅 도는 윤회의 과정에서 고생한단 말입니다. 호리찰나도 그때는 사정이 없습니다. 꼭 자기가 지은 대로 받는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금생에 공부를 부지런히 해서 즉 성불(成佛)의 지름길이 참선(參禪)인데 참선을 부지런히 해서 공부를 해야 할 것인데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화두공안(話頭公案)을 의심하는 그런 법 또는 화두공안이 없이 그냥 마음을 명상으로 비추어 보는 그런 묵조선(黙照禪), 또 한 가지는 부처님을 생각하고 순간 찰나도 부처님을 놓치지 않고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부처가 되어 가는 염불선(念佛禪 ) 3가지가 있단 말입니다. 3가지 가지고도 여러 스님네나 위대한 분들이 여러 가지로 논쟁(論爭)을 많이 했습니다. 논쟁이 지금도 끝나지 않으니까 그때그때 모다 일본(日本)은 뭣이 더하고 한국(韓國)은 어떤 것이 더하고 그런 차별이 있게 되겠지요? 여러분들께서도 여러분의 성격을 스스로 반조(返照)를 해서 말입니다. 나한테는 과연 이 3가지 방법 가운데 어느 방법이 가장 맞을 것인가? 이렇게 선택을 빨리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거기다가 온 혼신의 힘을 다 경주해야 한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