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법문 가운데는 방편가설인 그런 법문도 있고, 또 그런가 하면은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라! 대총상법문이 있곤 합니다. 대총상법문은 무슨 법문인고 하면은 이것은 그 부분적인 또는 임시적인 시설로 이루어진 법문이 아니라 부처님 법의 체용성상(體用性相)이라. 그 부처님 법의 본체(本體)라든가 또는 현상적인 문제라든가 모두를 다 모조리 담아서 총괄적으로 말씀하신 법문이 대총상법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다 같이 외우고 있는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은 이른바 대총상법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 법문 가운데는 이른바 삼신일불(三身一佛)이라, 부처님의 그 본체(本體) 본바탕인 법신(法身)과 또는 부처님한테 갖추어 있는 모든 성품공덕(性稟功德) 한량없는 지혜(智慧) 또는 만 가지 그런 억만 가지의 여러 가지 공덕상, 그런가 하면은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이 현상계 모두가 다 이것이 이른바 화신(化身)인데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법문의 본체인 법신(法身)과 또 법신에 들어 있는 일체 성품 공덕인 보신(報身)과 법신과 보신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이른바 활용적인 그런 면인 이 현상계(現象界) 이러한 화신(化身)과 세 가지를 다 겸비해 있는 법문이 이것이 이른바 삼신일불(三身一佛)인데 이런 법문을 가리켜서 대총상법문 그럽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독교를 설사 공부하고 또는 상식적으로 좀 알아본다 하더라도 기독교의 핵심 가운데가 어떤 법문이 있는가? 이것은 이른바 니케아 공의회, 니케아 공의회는 그 당시 동로마 제국 때 그때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하나의 지명인데 그것은 서기 325년에 그때 콘스탄티노스 그런 황제가 즉 말하자면 기독교의 교리를 다 제대로 체계화시키기 위해서 이루어진 하나의 그것이 이른바 주교 회의인데, 추기경이나 모다 주교 그런 분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기독교 교리를 점검하는 그런 회의인데, 그때에 결정을 했단 말입니다.
서기 325년에 그것이 니케아 공의회인데 그 때 결정한 그 내용이 무엇이고 하면은 이른바 삼위일체(三位一體)입니다. 삼위일체라, 석 삼(三)자, 자리 위(位)자, 한일(一)자, 몸 체(體)자. 삼위일체(三位一體)란 말입니다. 우리 부처님 법문인 삼신일불(三身一佛)하고 비슷비슷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 같이 그 합리적이고 또는 모두를 다 우주(宇宙)만유(萬有)를 다 포괄한 그런 점은 좀 미흡 합니다만 그래도 비슷비슷합니다.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 동(東)에 가 있으나 서(西)에 가 있으나 다 인간 자체가 본래로 이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어 놔서 정말로 깊이 우리가 탐구를 하고 또는 천착(穿鑿)을 하다 보면은 결국은 다 같아 버린단 말입니다.
지금 이 다종교(多宗敎)사회기 때문에 우선 세계적인 큰 종교만 하더라도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불교 또 기독교 이슬람교 아닙니까. 이렇게 돼 있으나 역시 그런 가운데 그 내용에 있어서는 모두가 다 서로 상통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공부한 분도 역시 어느 정도 마음 깊이 공부한 분들은 불교를 충분하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불교를 공부한 분들은 마치 산봉우리 올라가서 보면은 사방이 다 훤히 보이듯이 다른 종교(宗敎)나 다른 철학(哲學) 체계나 그런 것은 다 저 밑에 어느 만큼 한계가 있구나 우리가 짐작할 수 있단 말입니다.
다 그런 정도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을 알고 보면은 다른 것을 그때그때 비판하기도 쉽고 또 다른 어중된 어중간한 그런 신앙체계(信仰體系)나 또 철학(哲學)적인 체계나 그런 것에 우리가 혼란을 느끼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 대총상법문(大總相法問)인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을 깊이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때부터서 중국의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까지 33분의 정통조사(正統祖師)가 계셨습니다. 정통조사란 것은 무엇 인고 하면은 조금 표현은 좀 달리한다 하더라도 부처님 그 정통법문은 조금도 어긋남이 없단 말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 할 때는 정통조사(正統祖師)라 해야 억지로 그냥 후대인들이 그렇게 조금 똑똑하고 훌륭하니까 꾸며서 만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 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정말로 그 삽삼조사 가운데 하신 법문(法問)을 보면은 약간의 표현의 차이 뿐인 것이지 법문이 똑같단 말입니다. 어떤 점에서 똑같은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 똑같단 말입니다. 육조혜능스님께서 그이가 스스로 저술한 것은 아니지만은 그 어른의 즉 말하자면 어록(語錄)을 그 어른의 법문말씀을 제자 분들이 다 수록해 가지고서 편집한 책이 육조단경(六祖壇經)인데 육조단경 보면은 충분히 그것을 느낄 수가 있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 말따나 대총상법문이 온전히 들어 있단 말입니다. 법신이나 또는 보신이나 화신이나 그러기에 여러분들께서 좀 어려우시더라도 적어도 체계적으로 불교를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대총상법문인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이 3가지 법문이 모두가 다 하나의 몸이다. 이른바 삼신일불(三身一佛)이란 말입니다.
원래 부처란 것이 법신 따로 있고 보신 따로 있고 화신 따로 있고 뿔뿔이 있으면 그때는 불교가 못 됩니다. 비록 우리 중생이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본바탕인 법신을 말 하고 또는 법신 가운데 들어 있는 만공덕인 보신을 말 하고 또는 법신과 보신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그것이 화신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3가지가 모두가 다 편의적으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그렇게 시설한 것이지 따로 따로 뿔뿔이 있지가 않습니다. 비단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계도 세밀히 미시적(微視的)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하나의 몸으로 돼 있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지금 모두가 하나의 몸으로 돼 있다는 이런 말씀을 납득하시기가 좀 어려우시지요? 우리가 우선 원자 차원만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 우리들 이 방 안에는 벌써 몇 100명 우리 불자님들이 계시지만은 우리가 겉으로 거시적(巨視的)으로 이 모양으로만 본다고 생각할 때는 김씨가 따로 있고 박씨가 따로 있고 인제 뿔뿔이 따로 있겠지요. 그러나 원자 차원으로 산소나 수소나 그런 원자 차원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 때는 내 몸도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그런 것으로 돼 있고 저이 몸도 마찬가지고 또는 우리 몸들을 담고 있는 이 공간도 내내야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그런 원소가 없는 데가 있습니까. 약간의 질량만 차이 뿐인 것이지 결국은 저 사람 몸이나 내 몸이나 이 공간이나 모두가 다 산소나 수소나 질소나 그런 걸로 해서 지금 돼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차원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잘 구분이 안 돼 버립니다. 거시적(巨視的)으로 겉으로 보이는 것은 분명히 내 몸 따로 있고 니 몸 따로 있고 하지만은 우리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원자 현미경 놓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지가 않단 말입니다. 저 사람 몸에도 각각 원자가 지금 꾸물꾸물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이고 지금 진동하고 있고 이 사람 몸도 마찬가지고 이 공간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더 들어가서 소립자라. 그 소립자 같은 그 에너지 단계, 에너지 단계에 들어가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결국은 거의 다 하나가 돼 버린다.
우리 불자님들 불교를 공부할 때는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 이란 말씀을 그때그때 순간 찰나도 놓치지 않고서 상기를 하셔야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그 불성(佛性)으로 부터서 우리 존재나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모두가 다 이루어져 있단 말입니다. 불성을 떠나서 이루어져 있다고 하면 그때는 불교가 돼버리지가 않습니다.
불성 위에서 이루어져 있고 또는 그것이 비단 우리 인간뿐 만이 아니라 다른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든 존재 우리 사람 눈에 보이는 존재나 안 보이는 존재나 우리 사람 눈에 안 보이는 존재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그 세상이라 하는 것은 굉장히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모른다 그래서 안 보인다 그래서 없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귀신세계(鬼神世界)도 분명히 있는 것이고 또는 천상세계(天上世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극락세계(極樂世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 실증적인 것만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람 눈에 안 보이는 것은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우리가 어떻게 믿을 것인가? 공연시리 우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큰스님들이나 모다 도인들이 말씀 해놓은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성인(聖人)들 말씀은 거짓말이 없습니다. 허투로 그런 과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인들 말씀은 진실어(眞實語)라. 진실을 그대로 말씀 하시고 그리고 여어(如語)라. 여법히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불경에 있는 말씀이나 또는 어디가 있는 말씀이나 그런 말씀을 가리켜서 금구성언(金口聖言)이라. 금구성언이라, 쇠 금(金)자, 입 구(口)자, 또는 성인 성(聖)자, 말씀 언(言)자, 말입니다. 다시 어떻게 에누리로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보탤 수도 없고 말입니다. 꼭 그대로 사실대로 말씀한 말씀이 이른바 금구성언(金口聖言)입니다. 금구성언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100% 믿으셔야 됩니다. 우리 생명 그대로 표현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불성(佛性)이란 것은 정말로 이것은 우리가 불성을 몰라서는 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손해입니다.
불성공덕(佛性功德)이 어디가 뭐 한계가 있다든가 불성공덕이 조그만 하고 그럼 모르겠지만은 불성공덕이 없는데가 없단 말입니다. 흔히 불경에 열반경(涅槃經)에 있는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이라. 이 말은 ‘모든 중생(衆生) 가운데 부처가 있도다’ 하는 그런 부처님 말씀 아닙니까. 모든 사람 가운데 불성이 다 있다. 부처의 성품이 다 있다. 이렇게 말하면은 잘 모른 사람은 불성이 그러면 내 머리에 가 있을 것인가? 내 심장에 있을 것인가? 또 그렇지 안하면 우리 몸 어느 부위에가 있을 것인가? 또 그렇지 안하면은 우리 몸뚱이에 불성이 가득 차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우리가 의심을 품겠지요.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 말입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적인 생명이 불성이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오셔서 불성이란 것만 깊이 외셔도 굉장히 큰 소득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천지우주(天地宇宙)의 보배 가운데 불성보다도 큰 것도 없고 더 귀한 것도 없단 말입니다. 제일 귀하고 제일 높고 제일 깊고 제일 행복한 생명 자체가 이른바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헌데 그 불성은 우리 몸 어느 부위에 가서 부분적으로 국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뚱이 온전히 다 불성으로 돼 있단 말입니다. 불성으로... 다른 사람 몸도 마찬가지고 또는 천지우주의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안 된 것이 없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진리(眞理)기 때문에 진여불성이라. 이렇게도 말도 합니다. 또는 법법(法)자, 성품 성(性)자, 법성(法性)이라. 우리 사람한테 있는 그런 불성은 그냥 인격화 시켜서 불성 그러는 것이고 우주에 있는 우주의 본성 그럴 때는 법성 그러는 것인데 내내야 똑 같은 뜻입니다. 다 우주의 참다운 성품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사실은 불성을 모르면은 자기 바탕을 모르는 것이나 똑 같습니다. 자기 고향(故鄕)을 모른단 말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고향을 ‘잃어버린 고향’이라. ‘상실된 고향’이라. 또는 우리가 지금 참다운 자기를 모르고 있으니까 ‘자아(自我)의 회복’이라. 이런 말씀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참다운 자기 회복이라. 그러면 참다운 자기가 무엇인가? 우리 불자님들 우리 중생은 사실은 우리 중생은 참다운 자기를 지금 잘 모르고 삽니다. 참다운 자기가 어떠한 것인가 모르고 삽니다. 또는 우리 인간의 고향인 참다운 고향도 모르고 삽니다. 우리가 자기 태생인 고향을 모른다고 생각 할 때에 얼마나 그것이 참 절망적인 일입니까?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기 고향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그와 같이 허무하고 절망적인 것이 없습니다.
헌데 하물며 그 생명의 고향 우리 생명의 근본 고향이 무엇인가? 이걸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구제할 길이 없습니다. 생명의 고향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바로 불성이란 말입니다. 극락세계(極樂世界)란 뜻도 똑 같습니다. 극락세계는 어느 특별한 사람만 따로 따로 모여서 가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 인간 존재나 모든 것의 모든 존재의 근본 고향이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란 말입니다. 극락세계가 없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 인간이 얼마나 살벌하겠습니까. 행복스럽고 영원히 죽지 않고 모든 것을 모든 좋은 것을 다 갖춰 있는 세계가 극락세계란 말입니다. 그 유한적(有限的)인 상대적인 우리 인간이 절대적이고 또는 영생(永生)으로 살 수 있는 그러한 우리의 근본 고향이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우리가 안 가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 고향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가 꼭 가야 한단 말입니다.
그 못 가면 어떠는 것인가? 못 가면은 죽도록 고생고생 하다가 아! 남들은 금생(今生)에도 갈 수가 있는 것인데 몇 천생 몇 만생 헤매도 극락세계(極樂世界) 종당에는 꼭 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의 본 고향이고 우리 생명이 거기에서 부터서 나와 있는 그런 우리 뿌리 그런 것이 그런 최상의 나라가 극락세계(極樂世界)기 때문에 우리가 안 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 업(業을) 지어서 뱅뱅 도는 윤회(輪廻) 가운데 개 같이 살다가 개가 되었다가 소 같이 살다가 소가 되었다가 윤회(輪廻) 가운데서 그 극락세계(極樂世界)를 우리 고향을 우리가 잊어버렸단 말입니다.
성자(聖子)의 길이란 것은 다른 길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우리 참다운 자기가 무엇인가? 참다운 자기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른바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이란 말입니다. 불성을 우리가 불성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참다운 자기를 모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아의 회복이라. 잃어버린 자기를 찾는다 하지만은 어떻게 찾을 것인가? 잃어버린 자기가 어디가 있을 것인가? 이걸 모르면 은 찾을 길이 막연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우리 고향(故鄕) 우리의 참다운 생명의 바탕이 바로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불성을 찾아야 비로소 자기를 찾는 것이 됩니다. 불성을 온전히 불성과 하나가 되면 그때는 인제 성자(聖者)가 되고 부처가 되겠지요. 그러나 온전히 체험적(體驗的)으로 하나가 못 된다 하더라도 아 내 참다운 생명은 불성이구나. 이렇게 이해라도 해야 된단 말입니다. 이해라도. 우리 공부는 항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귀로 듣고 또는 머리로 헤아리고 해서 우선은 깊은 이해(理解)를 가져야 됩니다. 깊은 이해를 가진다 하면은 우리가 실천적으로 참 그야말로 체험적으로 불성과 하나가 되어야 되겠지요. 그런데 우리 중생(衆生)들은 불성(佛性)을 잃어버린지가 불성하고 멀리 살아온지가 오래 됐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불성 있는 불성이라는 그런 정말로 우리의 본바탕에 대해서 소홀히 생각한단 말입니다. 소홀히 생각하다가 부처님이나 성인들이나 큰스님들 말씀 듣고서 그때는 빨리 깨달은 분도 있고 또는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아! 그렇겠구나. 역시 그 길로 가야만이 되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그때그때 번연히 가질 수도 있습니다.
헌데 우리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살다보면 그래그래 이 현상적인 문제가 쉽지가 않지 않습니까. 정말로 하여튼 한 가족을 꾸려 간다든가 또는 사회에서 어느 지위를 한다든가 말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중요한 그런 가르침이 부처님 가르침이고 성자(聖者)의 가르침이다. 이렇게 안다 하더라도 소홀히 생각하기가 쉽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선 느껴야 할 것은 무엇 인고 하면은 우리 몸뚱이만 생각하는 이른바 육신이라. 살 육(肉)자 몸 신(身)자 육신(肉身)이라. 우리 몸은 이대로 지금 육신 아닙니까? 일반 사람들은 저속하고 또는 생각이 짧을수록 이 육신은 다 누구나가 다 긍정(肯定)을 합니다. 그러면 육신(肉身)보다도 더 깊은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업신(業身)이라. 업업(業)자, 몸신(身)자 업신(業身)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업신은 지금 안 보인단 말입니다. 안 보이나 업신이 분명히 또 존재합니다.
그 업은 무엇인가? 업은 이른바 신구의(身口 意) 삼업(三業)이라. 우리 입으로 말로 해서 짓는 우리 행위, 또는 우리 몸으로 하는 그런 행위, 우리 뜻으로 헤아리는 그런 우리 사고 활동,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업이란 말입니다. 이른바 삼업이라. 몸과 또는 자기 언어와 자기 뜻으로 짓는 그 행위가 이것이 우리가 그때그때 욕도 하고 또는 좋은 말도 하고 또는 좋은 생각도 하고 이렇게 할 때 이런 것이 그때그때 순간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아! 저 놈 나쁜 놈이다’ 이렇게 생각했으면은 그 생각이 에너지화 되어서 그대로 또 남습니다. 우리 몸에 와서 그 흔적을 둔단 말입니다. 남 미워하면은 미워하는 그 생각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도 역시 우리 의식에 가서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에다가 흔적을 둡니다.
우리가 그 염불(念佛)해라 뭣해라. 이렇게 부처님 법문에 따라서 다 구할려고 하는 것도 무엇인고 하면은 훌륭한 그런 말씀을 우리가 기억한다거나 또는 부처님 이름을 외인다거나 그러면 선악여하에 따라서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모두가 다 우리 잠재의식 (潛在意識)에다가 흔적을 두는 것이 모두가 다 업신(業身)이라. 업신이라. 육신이나 그 업신이나 이 모든 그런 우리 중생(衆生)의 눈에 보이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도 더 깊은 그 본래적인 것은 아까 삼신일불(三身一佛) 이라고 그렇게 했듯이 삼신일불(三身一佛)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인데, 법신 보신 화신 가운데서 법신만 뚝 떼어서 법신이 기본이기 때문에 법신만 똑 떼어서 우리가 업신 다음에 법신을 내세워서 그 육신과 또는 업신과 법신과 이 셋을 또 삼신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이 셋, 그 삼신에 대해서 깊이 기억을 해 두셔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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