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불자님들 꼭 그 대승 불법을 생각하셔서 모두가 다 진여연기라,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인연 연(緣)자, 일어날 기(起)자 말입니다. 진여불성이라 하는 것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언제나 존재하는 우주의 생명 자체입니다. 우주의 아주 실상 자체입니다. 이 자리가 바로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이 자리는 조금도 치우침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비록 인간존재로 태어나서 몇십 년 동안 살다가 죽어갑니다만 그렇더라도 우리 인간 자체는 절대로 우리 물질적인 몸뚱이와 더불어서 소멸이 안 됩니다. 우리 인간존재는 바로 생명 자체 생명 진여불성이 바로 우리마음 자리이기 때문에 이 자리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즉 따라서 무시 이래로 과거에 이 지구가 생겨나고 우주가 생겨나기 전에는 그때는 그냥 광명천지(光明天地)입니다. 진여불성만 우주에 충만해 있던 것인데 그때 여러 가지 그런 그 중생의 공업(共業)으로 해서 그때는 우주가 형성되어 나온단 말입니다.
우주가 형성되는데 그 가운데 우리 지구가 생겨나고 하겠지요. 그래서 인간존재가 나오는 것인데 따라서 지금 현재 인간존재로 있다 하더라도 우주의 본래 자리, 우리 인간존재 본래의 자리는 모두가 다 진여불성입니다. 진여불성이란 것이 이것이 모든 만유의 근본 생명이다. 이렇게 깊이 외이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진여(眞如) 이것은 불심(佛心), 불성(佛性) 또는 법성(法性), 법계(法界) 또는 열반(涅槃) ․ 극락(極樂) ․ 도(道) 이것이 모두가 다 같은 뜻이어요. 불자님들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이런 도리만은 이런 술어만은 외어두시면 굉장히 편리합니다.
열반이나 극락이나 또는 보리(菩提)나 또는 불심이나 불성이나 법성이나 또는 실상(實相)이나 중도(中道)나 이런 것은 같은 뜻이어요. 모두가 다. 이명동의(異名同意)라, 이름은 달라도 뜻은 똑같습니다. 따라서 이 자리가 바로 우리 생명의 진짜 본래면목(本來面目)입니다. 이 자리에다가 마음을 두기 위해서 우리가 참선(參禪)도 하고 염불(念佛)도 하고 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여불성을 그렇게 명심 하시고 외워두시기 바라고 또 한 가지 제가 더 말씀드릴 것은 뭣인고 하면은 우리 지금 불교도 그런 경향이 있는 것도 같고 다른 종교도 그렇습니다 만은 우리의 본래 생명자리인 부처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소홀히 생각한단 말입니다. 부처라는 것은 하나의 그야말로 참 우주의 생명인데 우리 마음의 바로 근본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자리를 찬탄(讚嘆)하고 찬미(讚美)하고 한없이 찬탄하고 찬미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찬탄하는 그런 정도가 지금 미약하단 말입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외인다 하더라도 우선 현상적인 문제를 생각해서 현상적인 자기의 소원성취를 위해서 모두가 하는 것이지 정말로 그 생명의 내 생명의 본래면목자리를 찬탄하고 찬미하고 우리가 추구해서 하는 것은 보통 아니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님들은 그 우리 생명의 본 고향 자리에 대해서 보다 더 간절한 그런 동경심(憧憬心)과 흠모(欽慕)하는 마음을 가지셔야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 본래의 그런 고향 자리 우리 본래 생명자리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을 거기다가 딱 집중을 시킨다고 생각할 때는 현재 모든 문제가 현상적인 문제도 가장 좋은 쪽으로 풀려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이 아프면 몸이 건강하기 위해서 기도를 모시고 집안의 운수가 나쁘면 운수가 잘되기 잘 풀리기 위해서 기도를 모시고 하지요. 그러나 그 잘 되기 위해서 일부러 생각하고 꼭 그 자리를 생각하는 것보다도 그 진여불성 자리 진여불성 자리에다가 우리 마음을 거기다가 두어서 우리가 기도를 모시고 부처님 명호를 외이고 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다른 것은 저절로 다 이른바 법이자연(法爾自然)적으로 다 풀려가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진여불성 자리 이것은 한계가 없단 말입니다. 김가의 진여불성이나 박가의 진여불성이나 또는 돼지나 소의 진여불성이나 또는 나무의 진여불성이나 또는 그 철 가운데 있는 무쇠에 있는 진여불성이나 어떠한 것에나 진여불성은 본래로 존재하는 생명자체 생명의 광명자체인데 그 자리는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은 시간성 공간성이 없습니다. 따라서 진여불성에다가 우리 마음을 두고서 기도를 모신다고 생각할 때는 다른 것은 그때는 따라서 저절로 다 풀려가는 것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모르면은 참다운 불법이 아닙니다. 불법 가운데도 소승에 머물고 맙니다. 따라서 진여불성을 꼭 알으시고 진여연기(眞如緣起)라, 더 나아가 진여연기라, 모두가 다 진여불성 자리에서 인연 따라서 잠시간 내가 되고 너가 되고 이 산천초목(山川草木) 모두가 됐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본래에 있어서는 똑 같단 말입니다.
모두가 하나의 진리(眞理)입니다. 우주(宇宙)가 하나의 생명(生命)입니다.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불이법문(不二法文)이라 둘이 아닌 법문이란 그 법문이 굉장히 중요해요. 여러분 유마경(維摩經)을 보셨으면 알으시겠습니다 만은 유마경에서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 둘이 아닌 진리에 들어가는 법문이라 말입니다. 화엄경(華嚴經)도 모두가 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다 불심이라 하는 불심이라는 그 마음으로 우주가 됐단 말입니다. 우주가 다 물질은 이것은 다만 그런 불심이 어떻게 진동하는가 불심 에너지가 어떻게 진동하는가 그런거 따라서 진동하는 모양이 하나의 전자요 양성자요 한다는 말입니다.
우주 생명 에너지의 파동에 불과한 것을 사실은 물질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이나 색즉공(色卽空)이라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이런 것은 뭣 인고 하면은 일체 존재는 모두가 다 본래로 비었다는 것입니다. 본래로 비었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빈 것이 아니라, 그 빈자리, 빈 그 정체는 바로 불성이고 진여고 그럽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알기 위해서는 모두가 다 비었다는 소식을 알아야 그 자리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21세기 뭐 세기를 따른다면 우리가 한계를 지을 필요도 없지만은 앞으로도 오는 세대는 말입니다. 꼭 부처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해야 될 그런 세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전쟁이라든가 인간끼리 갈등이나 반목이 도저히 그치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때는 우리 모두가 인제 불행에 불행의 혼탁한 그런 탁류에 휩싸이고 말겠지요.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정말로 감사하고 부처님 공덕(功德)에 대해서 한도 끝도 없이 우리는 찬탄해도 오히려 부족합니다. 내 생명의 근원인 동시에 또는 우리 생명이 그 진여 불성으로부터 왔습니다. 다시 또 진여불성이 됩니다. 진여불성이 못되면 또 괜시리 잘못 살아가지고 지옥도 갔다가 어디로 갔다가 우리가 헤매는 것입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의 길은 오직 외길 한길뿐입니다. 성불의 길이란 말입니다.
뭐 때문에 성불의 길을 우리가 주저하고 더디게 갈 것인가? 그 하찮은 물질들 음식은 많이 먹어서 좋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음식 많이 먹는건 도리어 해롭습니다. 고기를 많이 먹어서 꼭 그것이 다 우리 살로 가고 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기를 너무나 많이 먹어서 도리어 지금은 이른바 문명병(文明病)이 더 많이 생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돼지나 소나 그것도 역시 우리 생명과 더불어서 같은 생명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왜 그네들을 함부로 우리가 죽여서 우리가 먹을 것인가 말입니다.
부처님 계율(戒律)은 그냥 아무렇게나 된 계율이 아닙니다. 우주의 도리에 비추어서 꼭 우리가 성불하기에 알맞는 그러한 도덕률(道德律) 이것이 부처님 계율이란 말입니다. 우리 갈 길은 다른 길은 우리 생명을 낭비하는 길입니다. 부처님 가르침만이 부처가 되는 그 길만이 우리가 꼭 가야 할 당연한 길인 것이고 또는 우리를 최상의 행복(幸福)으로 인도하는 그런 오직 하나의 청정한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사실은 제일가기가 쉬운 것입니다. 불자님들 부처님 되는 것이 어렵다고 절대로 생각을 말으십시오. 우리가 본래로 부처입니다. 진여불성은 우리도 똑 같이 석가모니 같은 자비심 또는 지혜 또는 모든 능력을 다 온전히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들 때문에 우리 눈이 멀어서 그런 온전한 능력을 개발 안 한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 생명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 만유의 근본 자리인 진여불성, 진여불성을 꼭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진여불성은 이것은 내 마음이 바로 생명인데 내 생명의 근본자리가 진여불성 자리기 때문에 우리가 혼신의 힘을 다해서 그 자리를 흠모하고 추구하고 그 자리를 우리가 구해야 됩니다. 그 우리 진여불성의 이름이 하나의 인격이기 때문에 인격적인 이름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 문수보살(文殊菩薩) 다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 진여불성 하나의 공덕(功德) 이름이란 말입니다.
진여불성은 만 공덕을 갖춘 자리이기 때문에 하나의 이름으로 해서는 다 표현을 못 합니다. 전체를 포괄해서 말할 때는 그때는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인 것이고, 또는 진여불성 자리에 있는 그 한도 끝도 없는 대자대비(大慈大悲)를 말할 때는 관세음보살, 지혜를 말할 때는 문수보살, 우리 원력(願力)을 말할 때는 보현보살(普賢菩薩) 말입니다. 우리 중생의 영혼을 다스리는 쪽에서 말할 때는 지장보살(地藏菩薩), 그 자리는 모두가 하나의 자린데 만 공덕의 자리이기 때문에 하나의 이름으로 해서는 다 표현을 못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인연 따라서 관세음보살을 외이시든 또는 지장보살을 외이시든 다 같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모두가 진여불성의 무한 공덕 자리를 표현한 이것은 다른 공덕 이름이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서 그 부처님 명호(名號), 부처님 명호를 외이면은 바로 그것이 진여불성의 인생과 우주의 근본 생명 이름이기 때문에 우리 생명이 차근차근 정화가 되고 또는 진여불성으로 접근되는 것입니다.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화두(話頭)를 드나 무슨 공부나 모두가 다 그 자리 우리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자성 불성자리를 우리가 다 개발하고 얻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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