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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32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우리 마음은 원래 청정한 것인데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통해서 우리 마음은 원래 청정한 것인데 우리 중생들이 자기 마음을 여실하게 보질못 하니까 내 마음이 때가 묻었다 내 마음은 김 아무개다 박 아무개다 이렇게 우리가 자기를 비하시킨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와같이 내 마음은 때가 묻었으니까 오랜 세월 동안 내가 닦아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방편 공부고, 내 마음은 본래로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래로 자성 청정이라, 본래로 청정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은 이것은 방편공부가 아니라 그대로 불교 전문말로 하면은 그때는 돈오(頓悟)공부라, 문득 단박 깨닫는 공부라 말입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 모든 마음이 우리가 생각할 때는 나는 업을 많이 지어서 금생에 고생도 많이 하고 내 마음은 때가 많이 끼어 있거니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고, 나는 또 별로 업을 안 지었다고 자부심 가지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우리 마음의 범부심(凡夫心)의 헤아림인 것이고 그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여기 계시는 분들 다 마음마다 자성청정심이라 청정한 마음입니다. 석가모니 같은 그런 마음인 것이고 공자나 예수 같은 그런 마음입니다. 마음이 모양이 없거니 오염이 될 레야 될 수도 없고 오염을 시킬 레야 시킬 수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마음이 자성청정심이라, 이렇게 느끼는 것은 이것은 이른바 불교 말로 하면은 돈오공부 입니다. 부처와 나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시방여래는 법계신이라, 모든 부처님은 이 온 법계를 몸으로 한단 말입니다. 이 세계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온 세계를 몸으로 합니다.

 

따라서 이 삼천대천세계가 모두가 다 부처님 몸 덩어립니다. 모두가 진여불성 덩어립니다. 다만 허물은 우리 중생이 스스로 마음을 얽어매서 보지를 못 한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김 아무개라고 해도 김 아무개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어요. 스스로 그때그때 부모님이 이름을 지어서 너는 누구다. 너는 내 아내다, 너는 내 남편이다. 뭐 그렇게 모다 사람이 잠정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지 본래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본래는 다 똑같이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자리는 절대로 변화가 없습니다. 우주는 부처님 자리는 항시 지속이 됩니다. 내가 죽든 말든 또는 이 지구가 파괴가 되든 말든 부처님 자리는 그대로 상주부동(常住不動)이라, 항시 그대로 부처님 자리는 청정(淸淨)하고 또는 자비(慈悲)롭고 지혜(智慧)롭고 또는 만능(萬能)을 다 갖추고서 항시 흘러(살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할 때도 역시 그와 같이 근본 자리, 근본 자리를 안 여의고 공부를 해야 공부가 빨라져요. 우리가 상대적인 그런 문제로 이럴까 저럴까 이것인가 저것인가 그렇게 해서는 우리 마음이 한도 끝도 없이 불안스럽습니다. 우리가 이럴까 저럴까 한다는 그런 것이라든가 상대적(相對的)인 문제는 아까도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한 것입니다. 인연(因緣)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이 세상에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이 현상적인 것은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런 것은 다 허망하단 말입니다. 누구한테 내가 얻어맞으나 또는 금생에 살다가 더러 과거세 업으로 해서 누구한테 내가 지금 칼을 맞고서 내 목숨이 금방 끊어지나 이런 것도 모두가 다 허망한 것입니다. 사실이 아니란 말입니다.

 

실지로 있는 것은 내 생명 자체는 절대로 훼손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할 때에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나 또는 염불(念佛)을 우리가 하나 말입니다. 또는 다른 주력(呪力)을 하나 우리 마음 자리를 절대적인 그 자리 조금도 변동이 없는 자리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咎不淨)이라, 낳지 않고 죽지 않고 오염(汚染)될 레야 될 것도 없고 항시 청정하고 항시 만공덕(萬功德)을 갖춘 그 자리에다가 마음을 둬야 그래야 우리공부가 신속히 되고 우리 마음의 불안의식도 해소를 시킬 수가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가르침은 절대로 우리들을 시달리게 하고 또는 공부 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기운(氣運)이 소모가 되고 그런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기 때문에 우리가 내가 부처가 아니다그래야 우리가 손해를 보고 또는 마음도 괴롭고 그런 것이지 본래 부처가 부처라고 믿을 때는 우리 몸 조건이나 모든 마음 조건이 제일 좋은 상태입니다.

 

지금 가정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도 많이 계시는 그런 분이 참 많을 것입니다. 사바세계라는 것은 고생 바다라 놔서 뭣이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그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 같은 것이고 이 현상적인 존재는 다 그래요.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지로 있지가 않습니다. 그 금강경(金剛經) 보아도 다 모두가 그런 도리가 아닙니까. 모든 상이,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상 모든 상이 상 아님을 우리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즉견여래(卽見如來)라 바로 부처를 본단 말입니다. 우리가 상() 때문에 부처를 못 봅니다. 우리 중생은 상만 보고 성자는 항시 그 본 성품에 입각해 삽니다. 본 성품 자리는 절대로 생사(生死)가 없고 또는 변동이 없습니다.

 

따라서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불자님들이 화두를 참구하는 사람도 역시 그 본래의 자리 본래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에다가 마음을 두고 그 자리를 참구하는 의미에서 화두를 들어야지 덮어놓고서 이것이 뭣인가 저것이 뭣인가 그걸로 해서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확실히 믿고서 본래 그 본분 자리 본래 우리 자기의 본래 근본 면목자리,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서 공부해야 한단 말입니다.

 

염불(念佛)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한다 하더라도 그 생명의 실상 그 자리에다가 마음 두고 해야 그래야 참다운 염불인 동시에 염불참선(念佛參禪)입니다. 기왕이면 염불하면은 염불참선을 다 하시고 싶어 하시지 않겠습니까. 여러 불자님들께서 먼 데서 오셔서 이 법회에 참여하신 일을 생각하면은 2시간 3시간도 오랫동안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허나 지금 나이가 무던히 먹어서 제가 말을 할 때는 모르는데 말을 하고 나면은 숨이 좀 가빠요. 따라서 제가 그렇게 많은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또 빨리 안 죽어야 그래야 여러분들 앞에 앞으로도 자주 나올 수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금생에 빚진 빚이 굉장히 많습니다. 따라서 금생에 빚을 졌으니 금생에 다 갚고 가야 할 것인데 갚고 가기 위해서는 그래도 법회(法會)라도 앞으로 두고두고 많이 나와야 그래야 갚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말씀을 많이 안 드립니다. 에너지를 아끼느라고 우리 불자님들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부처님 공부가 제일 쉬운 공부입니다. 제일 쉽고 제일 마음 편하고 몸도 편하고 집안도 편하고 누구한테나 제일 좋은 공부입니다.

 

남편한테나 아내한테나 아들한테나 이 사회를 위해서나 가사 높은 그런 지위나 그런 벼슬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부처님 자리 생명의 실상 자리 부처님 자리다가 마음 두고서 정치를 하고, 또는 남을 가르치고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에 그래야 근본적인 철학이 있는 그러한 가르침이 됩니다. 우리 본질을 무시하고 우리 본 근원을 무시하고 이것이 바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자리 하나님 자린데 그런 자리를 무시하는 것은 이것은 우리 인간의 참다운 구제가 못 됩니다. 어떠한 사회사업 하던지 간에 꼭 우리 마음자리는 근원 자리 거기다가 마음을 두고서 하시도록 그렇게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